탐서일지 #18.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

탐서일지 #18.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

2025-03-09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고독〉.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가장 가까웠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려는 내 고개를 억눌렀던 감정,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대학 4년 내내 나의 뒤를 쫓아다녔던 저 오래 묵은 감정.

대학 2년차에 시작된 희미한 직감이 연구실 생활 등 경험의 누적으로 스스로의 가장 안쪽에서 부풀어 오르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그 압력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 중압감에 가장 격정적으로 시달렸다. 가슴 어딘가에서 내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 위에서 나는 삶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이고,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지’를 질문했고 이 세상을 거쳐간 수많은 문호들과 철학자들의 유산들 속으로 뛰어들어 불안한 현실 속에서 버틸 수 있는 단 하나의 고정점을 어떻게든 찾고자 했다.

총 2년 6개월의 방황 끝에 나는 일종의 메타적인 직감에 도달한 것 같다. 풍선에 바람을 오랫동안 불면 그 부피를 견디지 못한 끝에 표면에 난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풍선을 터뜨려 그것을 작은 고무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듯, 일정 수준에 이른 철학이 마음을 가장 아래까지 짓누른다면 지금까지 자신에게 운명처럼 떨어지던 고통 일체가 급작스러운 긍정으로, 근본적인 가벼움으로 전환되는 때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원하다. 그런데 삶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알베르 카뮈 식으로 말하면 〈부조리〉,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마침내 니체 식으로 말하면 〈무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상실〉이다. 〈부조리〉는 〈합리〉의 결여이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확실성〉의 결여이고, 〈무의미〉는 〈의미〉의 결여이다. 카뮈, 쿤데라, 그리고 니체 세 사람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결여, 즉 〈상실〉은 인간의 가장 아래에 자리한다.

문학과 철학 고전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경험들이 과거의 〈상실〉로부터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리라는 것을 느낀 인간은 마침내 텍스트의 향기로부터 이 근본적인 〈상실〉 속에서 그 자리를 완전히 채울 수 없기에 언젠가 떨어져버릴 무엇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게나마 구멍이 뚫린 자리에 가져다 대기 위한 대체재를 찾는 것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라는 통찰에 도달하게 된다. 그 통찰 앞에서 인간은 전율하게 되고, 자신의 모든 과거가 반복되더라도 그것이 결국 자신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왜 산과 동굴에서 지상으로 다시 한 번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이제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느꼈기에 높은 공기를 갈구했으나 그 차이가 가장 격정적인 폭발을 일으킨 끝에 타인과 자신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 깨달음에 이르렀기에 아마도 그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모든 것을 긍정하시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그토록 자신이 경멸해온 인간들의 삼라만상을 관찰한 끝에 나타났음을, 그리고 그 삼라만상은 모두 타자적 경험이 수많은 암시와 표상들과 함께 예술적인 구조로 배치되어 자신 안으로 재현될 때에 가장 높은 설득력을 가졌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는 이러한 맥락 위에서 그 가치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나의 철학이 대학 여정과 함께 중간 매듭을 짓기 시작한 지금 이 작품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상당한 행운인 셈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5.

I. 총평

인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생물학적 죽음 뿐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가능한 모든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가 없기에 인간은 그저 죽음이 어떤지 그의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1그래서 《미키 17》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활할 수 있는 ‘미키 반스’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 (What it feels like to die?)” 라 묻는 것이다.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경험. 대상의 죽음에 반드시 수반되는 바로 이것, 대상과 관계되는 자극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환되는 바로 이 순간을 우리는 〈상실〉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물질들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이기에 인간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어렴풋이 인식한다. 하지만 그 인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끝이라는 무서운 직감으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영속을 꿈꾼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상실된 것에 집착하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는 것, 잃어버린 바로 그 대상을 불완전한 형태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재현하려 시도하는 것 모두는 인간이 자신의 근본적인 불완전성, 언젠가는 자신이 끝나버릴 것이라는 희미한 직감 위에서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그가 덥석 믿어버리는 과정이다.

라캉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대상과 주체의 영원한 단절에 일찍이 집중하여, “인간의 욕망은 〈대상의 결여〉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우리는 그의 이론이 소설의 등장인물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기즈키의 상실과 함께 뒤틀려버린 주인공과 나오코에서부터 사랑과 금전적 지원의 상실로 고통받은 미도리 그리고 정착감과 진중함의 상실로 끊임없이 배회하며 게임을 즐겨야만 하는 나가사와까지. 라캉이 그린 근본적 격리 속에서 불가능한 합일을 향해 손을 뻗는 인간의 운명을 하루키는 문장 사이마다 소복히 쌓인 단절들로써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서사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이해받지 못한 수많은 순간들, 마찬가지로 수많은 욕망과 그 투사체를 발견한다면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름 이전에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해프닝을 곱씹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이제는 상실되어 버린 예전의 이름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소설이 음미하는 인간의 주제를 고백했을지도 모르니까.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상실의 치명성에 영원히 시달려야만 하고, 그건 이 소설을 읽는 독자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라는 바로 그 주제를.


II. 인상 깊은 부분 두 가지와 그 이유

II.1. 첫 번째 대목

그녀는 내게 들판의 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우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안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나 기호였을지도 모른다. 저 어두운 나날들 가운데에서 그녀가 머릿속에 자아낸 다른 수많은 사물들처럼. 그러나 나오코가 우물 이야기를 한 이후로 나는 그 우물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우물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한 부분으로 풍경 속에 굳게 자리 잡은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p. 14-15.
  • 우물이란 무엇인가? 기능적으로 정의한다면 마실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지정된 장소가 우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우물의 연장(공간)적 특성이다. 우물에 어울리는 수식언에는 무엇이 있을까? 〈깊은〉? 〈아득한〉? 〈끝을 알 수 없는〉? 〈떨어지면 빠져나오기 힘든〉? 〈좁은〉? 〈어두운〉? 여러 단어들이 떠오르고, 단어의 부유와 동시에 우리 머릿속에서는 즉시 그 수식언들에 상응하는 우물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물 하나가 드넓은 마음 속 세계에 하나, 재현되는 것이다.
  • 우리 마음 속에 재현되는 이 〈우물〉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마음 속에 그려진 이미지니까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고, 존재하는 어떤 우물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텍스트를 통해 지시되는 우물을 그리는 것일 뿐이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한 가지 주장이란 〈우물〉은 분명히 그것을 상상한 자의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이거나 기호”라는 점일 것이다. 그가 “머릿속에서 자아낸 다른 수많은 사물들처럼”.
  • 그렇다면 분명히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 〈우물〉이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어떤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신을 상상해보자. 〈우물〉은 어떤가? 다시, 처음에 생각했던 ‘어울리는 수식언’들대로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지지 않는가? 〈깊은〉, 〈아득한〉, 〈끝을 알 수 없는〉, 〈떨어지면 빠져나오기 힘든〉, 〈좁은〉, 그리고 마침내 〈어두운〉.
  • 대상을 그 자체의 이름이 아니라,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에 상응하는 수식언들로 파악할 때 주목할 만한 일 중 하나는 문자가 가지는 특성이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특정 반응을 격발시킨다는 점이다. 흰색 바탕에 쓰인 검은 도형, 즉 문자를 보면 우리는 반드시 그 문자에 상응하는 실제 사물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실 사물에 대한 즉각적인 연상은 문자 자체가 구체적인 사물 하나를 곧바로 지칭하는 경우에는 명확히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만을 향하게 되지만, 문자가 추상적인 개념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그것과 관계된 여러 사물들이나 개념들을 향하게 된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여기서 특히 개념에 우리의 이미지 작용이 닿아버린다면 재귀적으로 그 개념에 상응하는 사물들이나 개념들을 불러오는 과정이 일어나게 되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가정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인간은 추상 개념을 나타내는 말을 보면, 그 속에 품은 개념들까지 모조리 포함하여 그 단어를 구체적인 사물 이미지들의 복합체로 환원하는 암묵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한 〈우물〉을 다시금 수식언으로 풀어 헤쳤을 때 가지게 되는 종합적인 광경이란 무엇이 되는가? 〈깊은〉을 볼 때 우리는 기억 속을 뒤져서 수많은 〈깊은〉 사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놀러갔을 때 보았던 깊은 산골짜기들, 항공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볼 때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깊은 하늘, 혼자 훌쩍 떠난 여행에서 볼 수 있었던 부산 해변가 앞에 펼쳐진 깊은 바다 …. 마찬가지의 일이 〈아득한〉, 〈끝을 알 수 없는〉 등 나머지 수식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이 경우 그 종합적인 광경은 내가 겪은 과거 사건들과 기억들의 이상야릇한 혼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기억과 사건들을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불러올 때, 유감스럽게도 이미지 그 자체만을 불러올 수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은 그 이미지들에 결부된 정동들, 즉 그 당시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또 어떤 감정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한 회상을 즉각 격발시켜서 해당 정동을 현재에 재현해버린다. 그래서 이를테면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놀러갔음에도 조용히 혼자서 밖을 볼 때의 고립감이라던가, 항공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볼 때 내가 너무 높이 있다는 것을 재인식함에 따라 스스로를 덮쳐오는 공포, 혼자 훌쩍 떠난 여행에서 자신 앞에 펼쳐진 부산 해변가의 지평선에서 자연히 떠오르는 막막함과 울적함 따위가 모조리 떠올라 버리는 것이다.
  • 이처럼 〈우물〉을 자신 안에 재현하는 인간은 그것과 관계된 모든 기억들과 감정들이 모조리 그 〈우물〉 속으로 빨려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비단 〈우물〉을 상상하는 경우에만 일어나는 기작은 아니겠지만, 이 지점에서 하필 우리가 상상하는 대상이 바로 그 〈우물〉이라는 점 때문에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우리는 연상의 연쇄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을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듯 ― 즉, 〈깊은〉, 〈아득한〉, 〈끝을 알 수 없는〉, 〈떨어지면 빠져나오기 힘든〉, 〈좁은〉, 그리고 마침내 〈어두운〉 바로 그곳 내부를 들여다보듯 ― 이 모든 경험들과 감각들을 느껴버리게 된다. 이 괴상한 과정을 겪고 나면 우리는 인간 정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과 이미지들이 펼쳐질 수 있는 광활한 들판에서 우리가 거기에 일종의 〈우물〉을 세웠고, 그 안에 〈우물〉이라는 단어와 관계되는 나 자신의 일부들이 모조리 들어 있는데 자신이 그 속에 조금씩 빨려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희미한 직감을 얻게 된다.
  • 사고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왜 나오코가 우물 이야기를 한 이후로 주인공이 왜 그 〈우물〉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고 진술했는지를 조금 더 흥미로운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우물, 있는지 없는지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심지어는 머릿속에서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만들어져버린 우물일 수도 있지만 그 우물 속으로 빨려드는 은밀한 체험을 이제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과연 우리가 인간 정신의 저 드넓은 들판을 상상할 때 이 〈우물〉이 없다고 가정해볼 수 있기는 할까?
  • 인간 정신이 겪는 진통과 뒤틀림에 대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저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그래서 소설은 〈우물〉을 반드시 언급하면서 시작해야 했던게 아닐까,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또 다시 〈우물〉 속으로 빠져든다.

II.2. 두 번째 대목

“고독한 게 좋아?” 그녀는 턱을 괸 채 물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 먹고 강의도 혼자서 뚝 떨어져 앉아 듣는게 좋아?”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그녀는 선글라스 다리를 입에 물고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실망하는 게 싫을 뿐이야.” 그녀는 되뇌었다. “만일 네가 자서전 같은 걸 쓴다면 이 대사 써먹도록 해.”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p. 111-112.
  •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다. 그는 단지 “실망하는 게 싫을 뿐이”다.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명제는 간단하지만, 그 함의와 내포된 장면들은 그렇지 않다.
  • 지난 2월 17일에 있었던 〈날적이〉 오프라인 모임 하루 전, 홀연히 부산으로 일찍 내려가버린 나는 글에서 고백한 바 있듯 ‘혼자’ 여행을 하면서 단독여행의 ‘고독’을 곱씹었다. 그 때 나는 ‘고독’이라는 두 글자가 삶 전반에 걸쳐 내 뒤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고속열차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들에 겹쳐 보았던, 가물가물하지만 그 정동만큼은 선명한 유년기의 시간들을 되돌아봄에 따라 선명해진 글자 덕분이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아르곤의 전투(The Battle of Argonne)〉에서 흐릿한 구름과 명료한 바위의 상이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뿌연 기억들과 그 기억 전체를 요약해버리는 문자가 머릿속에서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 어릴 적 나는 원래 살던 진주시 상대동을 떠나서 문산읍의 작은 초등학교에 새로 떨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일면식도 없는 동네에서 일면식도 없는 급우들과 어울려야 했던 나는 또래 사이에 끼어들어가지 못했었다. 학업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을 나는 그때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2월 16일에 부산역 근처의 어느 모텔방에서 새벽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 둘은 하나의 욕구를 매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인정욕’.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오래전부터 심리학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욕망이라 생각해온 바로 그것. 그런데 나는 이 인정욕이 특출나게도 왕성한 편이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친구들이 행하는 놀이라던가 그들만의 어떤 규칙에 참여하는 형태로는 달성될 수 없었다. 그 학교에서 이방인이었던 나는 내가 자리하지 않았던 그 동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문화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다가가려 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이라고는 함께할 수 없다는 말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 그것들 뿐이었기에 역사와 맥락의 단절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이해의 단절을 나는 너무 일찍 이해해버렸고, 그래서 나는 인정을 받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렸던 것이다.
  • 나는 학업에 천착하게 된 것이 또래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으로 더욱 격정적인 것이 되어버린 나의 인정 욕망을 어른들을 통해 해소하려고 한 시도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완벽한 성적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문제 한 개라도 틀려버리면 엉엉 울어버렸던 그 당시의 내가 했던 생각은 대략 15년이 흐른 지금의 나에게는 어느 새벽의 안개 속 그림자로서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 실루엣으로 미루어보건대 어른들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그 학업적 우수성이 흔들림에 따라 스멀스멀 엄습해오는 ‘고독’의 불안한 내음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 스스로를 덮쳐오는 저 ‘고독’으로부터의 도피는 이처럼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학업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거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고,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버렸음을 기억한다. 나는 유달리 당선에 필사적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서 선전의 제왕으로 악명이 높은 괴벨스의 연설까지 개인적으로 수십 시간 연구해가면서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선생님들은 이 정도로 학생들이 환호하는 연설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선생님들로서는 내가 친우들을 동원해서 벌여놓은 뒷공작을 알 방도가 없었다.) 왜 이런 일까지 내가 벌였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욕망은 라캉이 이야기했듯 대체제로써는 전혀 해소될 수 없는 본성을 가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래나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의 결여로 시작된 당초의 욕망이 어른들로부터의 인정 따위로 해소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꿈꿔버린 것이다. 상처받는 것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자명한 명제에도, 필사적으로 갈구했지만 결국 실패해버렸던 그런 종류의 관계가 아닐 것이라는 직감에도 불구하고, “같이 놀래?”라고 수줍게 물었던 나의 유년기로.
  • 이처럼 최초의 〈상실〉 경험으로 인해 뒤틀려버린 나의 내면은 결국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러서는 라캉이 지적한 〈승화〉의 도식대로 욕망을 발생시킨 당초의 격리된 대상이 아닌 다른 것을 이상화하고 추구하는, 전적으로 독일적인 공기로 숨쉬는 무언가로 전락해버렸다. 되돌이켜보면 그저 당시 교무부장이었던 과학 선생으로부터 받는 관심과 인정이 좋았을 뿐이었던 초등학교 3학년이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한 내 운명의 시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에 무언가 이바지하고 싶다는 원대한 키치를 발명해버리고서는 그 속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자발적 고립을 택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던 그 시절, 나는 브릿지 교육의 첫 몇 주 동안 〈학원〉이나 〈선행 학습〉 따위를 공유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추가적인 결여 내지는 고립을 발견해버렸다. 최초의 고립 경험이 교묘하게 변주되어 자리한 것이 나의 키치였기에 그때 발견된 외로움은 즉각적으로 은폐되어 있던 내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어느 날 밤에 내 정신은 발작해버렸고, 나는 자발적 고립을 더욱 강화해버렸다. 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선생님들의 주문을 덥석 믿어버린 끝에 그것을 염불하면서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기로 결정해버렸고, 나는 더욱 고독해졌다.
  • 이렇게 “내가 무엇을 하는지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대학의 문 아래로 들어와버렸다. 범세계적 유행병 덕택에 처음 1년은 본가에서 어머니와 산책을 하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기에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다음 해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불쑥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불쾌한 무언가들이 자신의 자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대학에 대한 회의로 시작해서 저주로 변주되었다. 나는 2학년 즈음에 썼던 글의 대부분이 과 동기들, 그리고 강의가 끝나도 질문하지 않는 이 대학의 〈위대한 모랄〉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할애되었음을 기억한다. 나는 그들을 격렬한 어조로 비난하면서 도대체 이 대학에는 장차 학문을 논하고 상대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인간다운 인간은 어디에 다 숨어버렸냐고 한탄했다. 이게 이 대학의 실태라면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라.”라는 저 문장은 희대의 개소리가 아닐 수 없겠다며 냉소했다. 그래서 나는 소수성을 택함으로써 자발적 고독이라는 내 키치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첫 MT에서 양푼에 술이란 술과 음료란 음료는 싹 다 때려부어서 섞어먹고, 더 이상 들이키기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분위기상 마셔라고 강권하는 그 분위기를 목격함에 따라, 교수의 강의가 끝나고 혼자서 이해가 안 되거나 설명이 애매한 것들을 물어 따지기 위해 앞으로 나갈 때 문을 열고서 유유히 밖으로 사라지는 다른 학생들을 봄에 따라 내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나는 고립을 유지하면서 저들과는 다르게, 〈거리의 파토스〉를 유지하면서 내 고귀함을 보존하겠노라 다짐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저들과 나 자신을 분리하는 것,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철학을 확고히 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내면에서 자리를 요구하는 저 불쾌한 것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키워버렸다. 나는 분명히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합리화한 저 논리대로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 먹고 강의도 혼자서 뚝 떨어져”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대로 그런 것들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분명히 나는 대답을 주저했을 것이다.
  • 《노르웨이의 숲》 에 둥지를 튼 수많은 문장들 중 다름아닌 저 문장들이 눈에 읽는 즉각 뇌리에 박혀버린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논한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인상깊었던 첫 대목으로 가져왔던 〈우물〉에 대해 논의하면서 밝힌 마성의 효과처럼, 어쩌면 저 문장 자체가 하나의 격발점이 되어서 그것과 관계된 추상 개념들을 연상하는 과정 중에 고독에 몸부림쳤던 내 과거들을 눈 앞에 하나씩 세워버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지금까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얼마나 깊고 어두운 상처 위에 서 있었는가하는 막연한 덩어리가 이제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됨에 따라, 나는 이 소설이 펼치는 광야를 둘러볼 때면 그 가운데 자리한 나 자신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나오코가 우물 이야기를 한 이후로 나 역시도 그 우물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 없게 되어 버린 셈이다.

III. 장별 주요 내용 요약

III.1. 제1장

  • 서른일곱 살의 ‘나’는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내린 비행기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를 듣자 〈우물〉 속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는 실제로 〈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 〈우물〉을 이야기한 것은 나오코로, 그녀는 초원과 숲의 경계에 자리한, 아주 깊고 검은 〈우물〉은 풀로 가려져 있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으면 우물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음을 암시하면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 ‘나’는 희미해져가는 나오코와의 추억, 그리고 그 시절의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그녀의 호소를 곱씹는다.

III.2. 제2장

  • 고전연극부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어떤 우익 단체가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청소도 귀찮아하고 벽에는 누드 사진을 붙이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규칙적으로 청소하고 체조하는 룸메이트, ‘특공대’와 생활하게 되었다.
  • ‘나’와 나오코가 처음으로 만난다. 둘 사이의 대화는 ‘나’의 친구이면서 나오코의 남자친구였던 기즈키가 매개했는데, ‘나’는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재능을 오직 그때에만 사용하지 않았나 하고 느낀다. 그가 없이 단 둘이 있을 때에 ‘나’는 나오코와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눈 대화를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 기즈키가 어느 날 차고에서 배기 가스 흡입을 이용한 자살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는 그의 죽음을 조사하러 온 경찰이 수업을 빼먹고 당구나 치러 다니는 인간이라면 자살한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나’는 방황하기 시작한다. 어떤 여자 애와 하룻밤 같이 자기는 했지만 자신 속의 희뿌연 덩어리가 또렷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나’는 그 덩어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III.3. 제3장

  • 나오코와 ‘나’는 둘 다 기즈키의 상실에 시달리며 단절 속의 만남을 이어간다. ‘나’는 무엇을 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 속에서 클로델을 읽고 라신을 읽고 예이젠시테인을 읽었지만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토요일 밤에 한산하고 고요한 로비에서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도대체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 『위대한 개츠비』를 매개로 ‘나’는 나가사와 선배를 만난다. ‘나’는 그의 주선으로 종종 시부야나 신주쿠의 밤거리에서 술을 먹고 호텔로 가서 여자와 함께 잔다. ‘나’는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그의 재능을 다른 누구도 아닌 기즈키와 비교한다.
  • 1969년 4월 나오코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뭉개져버린 케이크를 들고 그녀의 자취방을 찾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그녀가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뭔가를 끌어안은 채 말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늦었을 때, 이야기는 툭 끊어져버렸으며 그와 함께 그녀의 눈물샘을 붙잡고 있던 실도 같이 끊어져버렸다. 그날 밤 ‘나’와 나오코는 함께 잤고, 나오코는 어디론가 이사를 가 버렸다.
  • ‘나’는 기즈키에 이어 나오코라는 이중의 상실에 시달리면서 방황한다. 대학이 〈대학투쟁〉의 여파로 동맹 휴교에 들어가자 ‘나’는 운송 업체와 레코드 가게에서의 아르바이트와 술, 나가사와를 동반한 섹스 사이에서 방황한다. 여전히 그녀를 생각한 ‘나’는 나오코가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안 직후에 이어 6월에 나오코에게 또다시 편지를 부친다. 7월 초에 짧은 답장이 온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옥상에서 반딧불이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옴을 느낀다.

III.4. 제4장

  • ‘나’는 동맹 휴교를 앞장서 주장하며 운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들을 반대자로 매도하던 학생들이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낀다. 강의에서 출석을 부를 때 대답하지 않는 식으로 ‘나’는 조용히 항의했고, 9월 둘째 주에 마침내 대학 교육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실로 돌아온 학생들과는 달리 방학 때 본가로 간 ‘특공대’는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나’는 방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으며, 홀로 강의를 듣고 식사하는 생활을 이어간다.
  • 학교에서 도보로 십 분 정도 떨어진 작은 레스토랑에서 ‘나’는 ‘연극사 2’ 강의를 같이 듣는 미도리를 만난다. 고독한 게 좋냐고 묻는 미도리의 물음에 ‘나’는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라 대답한다. 미도리는 ‘나’에게 자신의 이름인 ‘녹색’은 자신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도리는 ‘연극사 2’ 강의의 필기 노트를 빌려간다.
  • 노트를 돌려주기로 한 때에 미도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가 나타나 노트를 돌려준 것은 ‘연극사 2’의 다음 강의가 시작된지 십오 분이 지난 다음이었다. 중간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미도리뿐만은 아니었다. 학생 둘이 전학련 동맹 휴교 운동을 설파하기 위해 강의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진정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도리와 ‘나’는 강의실을 나와 전철을 타고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과 급우들을 비교하면서 겪었던 좌절감과 오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 그 주 일요일에 ‘나’는 미도리의 본가 고바야시 서점을 방문한다. 나오코와 작별한 직후와는 달리 서점으로 가는 길은 화사하고 희망적이었다. 미도리가 끼니를 대충 때우는 집안에 염증을 느껴 돈을 조금씩 모아 산 조리 기구와 책으로 배운 관서식 요리를 먹으면서 ‘나’는 그녀가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아버지는 우루과이로 떠났고, 남은 누나는 어쩔 수 없이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화려한 것을 탐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날 오후 ‘나’는 맥주와 함께 이웃집에서 난 불을 구경하면서 미도리가 부르는 엉터리 포크송을 들었고, 자신은 듬뿍 사랑받고 싶었고 따라서 지금은 투정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사랑을 원한다는 미도리의 고백도 듣는다. 그래서 ‘나’와 미도리는 눈을 마주친 뒤 입을 맞추었다. ‘나’는 미도리와 헤어진 뒤에도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한다.
  • 나가사와와의 외박이 어떤 여성도 끌어들이지 못한 채 실패한 날, 나는 새벽을 새기 위해 들어간 24시간 커피숍에서 불륜을 목격한 여성과 그 여성을 위로하는 다른 여성 두 명과 술을 함께 마셔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한 명을 역에서 전송하고 ‘나’는 불륜을 목격한 여성과 모텔에서 섹스를 한다. ‘나’는 낯섬과 비현실감 사이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가 받지 않자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오코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III.5. 제5장

  • 편지에서 나오코는 ‘아미 사’라고 부르는 요양소에서 보내는 날들에 대해 설명한다.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선언한 나오코는 ‘나’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 나오코는 ‘아미 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한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인 외부 세계와는 달리 ‘아미 사’에서는 이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라는 점도 주지시킨다. 나오코는 요양소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산다고 말하며, 별자리와 새와 꽃과 벌레에 대해 대화하는 것, 운동하는 것 그리고 과일 · 채소를 재배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한 연대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 나오코는 담당 의사가 슬슬 외부 사람과의 접촉을 시작하라고 했다며, ‘외부 사람’이라고 할 때 떠오르게 되는 ‘나’가 요양소로 찾아와 자신을 면회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다시 읽은 후 밖으로 나가 혼자서 거리에서 거리로 떠돌았고, 마침내 날이 저문 다음 기숙사로 돌아와 나오코가 있는 ‘아미 사’로 장거리 전화를 걸어 내일 그녀를 면회하겠다고 말한다.

IV. 더 찾아보거나 생각해 본 대목들

IV.1. 작중 등장하는 문학 작품 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요소들에 대한 조사

  • 조사해보고 싶은 것이야 도처에 자리한 죽음 한복판에 자리한 한 남성의 혼란을 다룬 《마의 산》부터 광란의 20년대 미국 한복판에 자리한 한 남성의 고립감을 그린 《위대한 개츠비》까지 다양하기는 하지만, 소설의 주제가 무엇인지 개인적인 경험 덕택에 명확하게 인식하는 나로서는 인용된 문학 작품이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굳이 더 찾아볼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한다.
  • 다만 나는 아래와 같이 작중 대학 안에서 일어나는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을 설명해줄 수 있는 현대 일본의 역사 중 하나는 부언하고자 한다.

    여름 방학 동안 대학 당국은 경찰에 출동을 요청했고, 기동대는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농성 중인 학생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즈음 어느 대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딱히 특별한 일이라 할 수도 없었다. 대학 해체 따위는 없었다. 대학에는 거대한 자본이 투하되었는데, 그런 조직이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는 정도로 ‘예, 알았습니다.’라며 얌전하게 해체를 받아들일 리 없다. 물론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한 그들 또한 진심으로 대학이 해체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학이라는 조직의 주도권 변경을 갈구했을 따름이고, 나에게는 그 주도권이 어디에 있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동맹 휴교가 분쇄되든 말든 특별한 감회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p. 101-102.
  • 작중 ‘나’와 나가사와의 대화를 통해 당대는《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죽음으로부터 28년이 지난 때임을 알 수 있다. 피츠제럴드는 1940년에 사망했으므로, 당대는 1968년이 되며 작품 내 대학 해체를 주장하는 학생 시위는 그 다음해까지 걸쳐 일어났으므로 상기된 사건들은 1968년과 1969년 사이에 발생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실제로 1968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김누리 교수가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언급한 바 있는 68혁명과 그 뒤를 잇는 세계 지성사의 물결 속에서 일종의 학생 운동이 일본 대학가에서 태동했다. 도쿄 대학 의과대학의 무급 인턴십에 대한 문제 제기로 불씨가 시작된 이 시위는 이사회의 비리 의혹에 대해 불만을 품은 니혼 대학의 학생들이 합류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일본 대학들로 퍼져나갔다. 진보 계열 학생들의 동맹 휴학과 시위로 세가 붙은 이 운동은 68년 중반 〈전학공투회의〉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학생 단체들은 캠퍼스 주변 건물들을 점거하기 시작했고, 1968년 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신주쿠역에 모여 폭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 절정을 장식했다. 여론은 당연히 우호적이지 못했고, 1969년 1월 경찰이 도쿄 대학을 포위하고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해 8월 7일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자유민주당 주도로 정기국회를 통과하면서 (물론 그 과정에서 일정 변경 기립 의결 · 위원장 보고 · 토론 등을 모조리 생략, 의사운영 관례를 어겨가면서 무리하게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학생 시위대 해산에 대한 더 강경한 대처에 대한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따라서 시위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대 학생들의 운동은 카를 마르크스나 레온 트로츠키 등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철학 속에서 일본 지성인들의 진보적 · 자유주의적 사상 해석에 대한 비판을 담은 요시모토 다카아키 등이 학생 사회에서 확산됨에 따라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자기 비판과 점검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오늘날 〈일본 대학투쟁〉이라 불리는 1968년부터 1969년 사이의 학생 운동의 해체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 그러니까 작중 서사에 한 획을 긋는 학생 운동은 그 시작과 끝이 모두 〈상실〉로 연결되는 셈이다. 시작은 68혁명이 그러했듯 〈의미〉의 결여로, 〈합리〉의 결여로, 마침내는 〈진보〉와 〈인간〉이 이 사회에서 결여되고 있다는 직감에서 발발하였고2물론 결여가 재현된 구체적인 양상은 이를테면 베이비붐으로 인해 급증한 학생 수에도 불구하고 정원만 늘어났을 뿐 학내 시설이나 교직원 수는 제자리인 대학이라던가, 22억엔이라는 정체불명의 자금이 니혼 대학 이사회의 비자금으로 축적될 동안 무능력했던 당국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분노였다., 그 끝도 〈의미〉의 결여로, 〈합리〉의 결여로, 마침내는 〈진보〉와 〈인간〉이 이 운동에서 결여되고 있다는 직감에서 발생했으니까 말이다. 출발점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을 이 대학의 토양 위에서 소리 높여 부르짖으면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바로 그 직감이었으나,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립하면서 학생들은 조금씩 자신들의 방식인 ‘폭력 투쟁(우치게바, 內ゲバ)’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고, 자신들이 도중에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지는 않을까 회의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은 해체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학생 운동도 이 《노르웨이의 숲》의 제1장에서 등장하는 초원과 숲의 경계에 자리한 그 〈우물〉의 연장인 셈이며, 수업 도중 난입한 두 명의 학생의 연설을 들은 ‘나’가 “이들의 진정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IV.2. 대비되어 보이는 인물 한 쌍과 그들의 대조점, 나의 성향과의 비교

  • 소설은 자신의 주제를 전반에 걸쳐서, 즉 모든 문장과 대목들 사이에 치밀하게 각인하고 있다. 이 점은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떤 등장인물도 대비시키고 싶지는 않으나, 여기서는 그들의 차이점을 드러내라는 요구가 있기에 부득이 아래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점들을 대조하고자 한다.
  • 대비되어 보이는 첫째 인물의 쌍: ‘기즈키가 죽기 이전’ (‘나’ 즉 와타나베 도루, 나오코)
    • 제1장에 등장하는 〈우물〉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나오코는 함께 걷고 있던 ‘나’를 뒤돌아보며 눈을 맞추고는 우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 들판 어딘가, 숲과 들판을 가르는 그 경계에 있기는 한데 풀들로 교묘히 가려져 있어서 도저히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운 그 〈우물〉을. 나오미는 〈우물〉에 빠지고 싶지 않으며 ‘나’와 함께 있는 한 자신은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지만, 이미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속에 빠져버린지 오래였다. 독자는 이 사실을 그녀가 ‘나’의 눈을 들여다볼 때, ‘나’ 역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발견했던 것, 즉 눈동자 깊은 곳 검고 무거운 액체가 이상한 도형을 그리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로써 체감할 수 있다. 그 소용돌이는 분명 대상의 〈상실〉 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나’는 작중 묘사되는 바로는 열여덟에 이른 그때까지 평범하게 살아왔기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경험이 없지만, 나오코는 묘사대로라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것이 비록 제5장까지의 서사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지만 독자는 손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기즈키의 죽음’이라는 중대한 상실을 공유하기 이전에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 〈우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느끼면서도 그것에 공감하거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검고 깊은 〈우물〉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쌓여버린 끝에 부드러운 진흙으로 바뀌어 버리는 기억들로 가득한 저 심연을.
  • 대비되어 보이는 둘째 인물의 쌍: (나가사와 선배, 미도리)
    • 나가사와 선배와 미도리는 그 성장 배경이라던가 현재 처한 가정 환경이 정확히 반대라 할 수 있겠다. 미도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자신과 비교했던 여자 아이들 ― 지요다 구 3번가, 미나토 구 모토아자부, 오타 구 덴엔초후, 세타가야 구 세이조 등에 살면서 운전사가 딸린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학교로 올 수 있으며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어 한 바퀴 도는 데 십오 분이나 걸리며 소형차 크기만 한 엄청난 개 두마리가 쇠고기 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 과 같은 가정을 가진 사람은 나가사와 선배 하나뿐이니까. 미도리의 경우 여성 잡지와 섹스 테크닉 등등이 가장 잘 나갈 뿐이며 『전쟁과 평화』, 『성적 인간』, 『호밀밭의 파수꾼』 모두가 없는 고바야시 서점을 운영하던 양친 중 어머니는 요절,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우루과이로 훌쩍 떠나버렸지만 나가사와 선배의 경우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는 나고야에서 큰 병원을 경영했고, 형은 도쿄 대 의학부를 나와 그 뒤를 이을 것”인, “도무지 흠 잡을 데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용돈도 넘처날 정도로 받”는다. 그런데 이 대비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는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며 친하게 지낸다. 당연히 이러한 교제 뒤에는 상실이 숨어 있다. 나가사와 선배의 경우 ‘나’에게 있어 기즈키의 빈자리를 채웠고 미도리의 경우 나오코의 빈자리를 채웠으니까.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일찍이 밝혔듯 상실된 대상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서 대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미도리와 ‘나’, 나가사와 선배와 ‘나’는 작중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표면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듯 서술되어 있지만 결국은 갈라져 있는 대화 속에서 독자는 ‘나’와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은밀한 단절을 확인한다. 미도리와 나가사와 선배가 모두 ‘나’와 짝을 이룸에 따라 자연히 형성되는 둘의 대립으로부터, 우리는 두 등장인물의 배경 즉 유년기 환경은 다르지만 지금 처한 상황, 상실에 시달리는 상황은 동일하다는 점을 확인함에 따라 소설의 주제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다.

IV.3. 소설의 뒷 부분 전개에 대한 개인적 예상

  • 소설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상실〉인 이상 뒷 부분에 예상되는 사건들이 너무 많기는 하지만, 일단 미학적인 관점에서 크게 세 가지 정도만 예측해본다.
  • 하나. 나오코는 반드시 사망할 수밖에 없다. 우물에 깊게 빠져든 인간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데, 그 방황이 제1장에서 ‘나’에게 묘사되어 있고 하필 그때 그가 연상한 것이 나오코의 〈우물〉인 이상 미학적으로 반드시 나오코는 요양원 또는 어딘가에서 사망해야만 한다.
  • 둘. 특공대는 돌아오지 않고, 이후 계속해서 ‘이야깃거리’로 소비될 수밖에 없다. 특공대가 만일 돌아와서 ‘나’와 그 사이에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냈다면 그는 더 이상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홀연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즉 그와 함께했던 시절이 ‘나’에게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나 말들이 회상 가능하며 추억할만한 경험으로서 다른 주제들과 함께 소설 속에 병존하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언제까지나 서른일곱 살의 ‘나’의 회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셋. 미도리는 반드시 소설의 끝까지 생존할 수밖에 없다. 나오코의 사망이 전제됨에도 미도리마저 죽여버리는 것은 〈상실〉을 둘러싼 인간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 소설에서 굳이 나오코와 같은 운명을 가지는 또 한 사람의 등장인물을 설정할 이유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는 항상 대립과 화해를 통해 전개되기에, 소설은 나오코의 죽음과 대비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며 ‘나’의 어떤 자리에 대응되는 두 여성이 나오코와 미도리인 이상 미도리는 나오코와 생사가 반드시 반대여야만 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그래서 《미키 17》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활할 수 있는 ‘미키 반스’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 (What it feels like to die?)” 라 묻는 것이다.
  • 2
    물론 결여가 재현된 구체적인 양상은 이를테면 베이비붐으로 인해 급증한 학생 수에도 불구하고 정원만 늘어났을 뿐 학내 시설이나 교직원 수는 제자리인 대학이라던가, 22억엔이라는 정체불명의 자금이 니혼 대학 이사회의 비자금으로 축적될 동안 무능력했던 당국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