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5. 성찰 – 2 –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개요
오늘은 꽤 늦잠을 자 버리고 말았다. 변명이라도 좀 해보자면 물리학실험 1 Report 과제로 새벽 2시 30분까지 작업을 한 데에 이어, 그 새벽에 바로 자지 않고 1시간짜리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들은 후에서야 비로소 잠을 청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오전 10시에 SNU CMP 프로그램으로 만난 사람들과 줌 독서실을 2시간 동안 하기로 계획했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다행히도 (또 어떤 면에서 보면 불행히도) 그 약속 시간의 10분 전에서야 비로소 일어났다. 후닥닥 준비를 하고 줌 독서실을 키고, 새벽의 작업을 이어 마침내 어제 오후와 오늘 오전을 다 바치어 레포트를 끝마쳤다.
그 레포트를 어제 오후부터 썼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어제 오후에는 나는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고전의 세계 시리즈의 일환, 양진호가 엮은 2011년 초판 인쇄, 2019년 개정 1판 2쇄한 데카르트의 ‘성찰’을 마저 2장 더 읽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문제는 어제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계획을 다소 수정하여 4장을 읽어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7일에 예정된 도서 세미나 세션을 준비하려면 남은 시간은 7일도 채 되지 않는데, 주중에는 강의 필기와 정리로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는 탓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당초 1편에서 언급한 계획을 수정하여, 제3성찰부터 제6성찰까지 한꺼번에 읽는다. 이틀 전 해석주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려보면, 데카르트의 ‘성찰’의 제1성찰부터 제2성찰은 회의적 방법으로써 “Cogito, Ergo Sum.”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3장부터는 이 기본적 ‘나’ 자신이라는 참을 토대로 주변의 모든 것과 ‘신’을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신’을 증명이라는 그의 주제가 나의 ‘불가지론적’, 혹은 어떻게 보면 더욱 ‘무신론적’에 가까운 나의 사상과 어느 정도 충돌하는 면이 있으므로 다소 불쾌하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일전에 1편에서 제2성찰을 읽어나가는 와중에, 나 자신이 이러한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된 것도, 나 자신이 오감을 통해 읽은 경험들에 의한 것이므로 회의적 방법으로는 모두 의심스러운 것들이라 치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오늘 제3성찰부터도 결국 나는 열린 마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의 형식은 지난 탐서일지 #4. 성찰 – 1 –과 같다. 기존 분류의 방식이 아닌 차례대로 무언가 문과 답을 달거나 주석을 달고 싶은 부분에서 멈추어 이 부분들을 기록하는 형태로 그 형식을 나는 정했으며, 여기서도 이를 따른다.
이제, 마저 이 책을 읽어나갈 차례이다.
문과 답, 주석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부: 그는 실존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에 많은 것들을 아주 확실하고 명백한 양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들이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것들이었는가? 말하자면 땅, 하늘, 별들 그리고 그 밖에 내가 감각으로 포착했던 모든 것. 그런데 이것들에 관하여 내가 맑게 지각한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바로 그런 것들에 대한 관념들 곧 생각들이 내 정신에 떠올랐다는 사실. 그러나 바로 지금도 내가 이 관념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긍정했고, 믿는 버릇 때문에 맑게 지각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렇게 지각한 것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즉 내 바깥에 어떤 사물들이 있다. 이것들의 관념은 이것들로부터 왔으며 이것들과 완전히 닮았다,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나는 오류를 범했다. 아니, 내가 옳게 판단했다 하더라도 이는 결코 내 지각 능력에 따라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그러나 대수학이나 기하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무언가 아주 단순하고 쉬운 것, 예컨대 둘과 셋이 서로 합하면 다섯이다, 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을 고찰했을 때, 나는 과연 이것들을 참이라고 긍정할 만큼 충분히 분명하게 직관했던가? 사실 이것들을 의심해야 한다고 나중에 판단했던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어쩌면 어떤 신이 더없이 명백해 보이는 것들에 관해서도 속고 마는 본성을 나에게 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너라 신의 전능함에 관한 선입견이 나에게 떠오를 때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바라기만 했다면, 내가 정신의 눈으로써 있는 힘껏 명백하게 직관했다고 여기는 것들에서조차 오류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쯤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내가 더없이 맑게 지각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돌아볼 때마다, 나는 이것들에 완전히 설득되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만다. “누구든 나를 속일 수 있는 자가 나를 속인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으리라. 내가 있다는 것이 지금 참이라면, 그는 내가 결코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 참으로 만들지도 않으리라. 둘과 셋이 서로 합한 것을 다섯보다 크거나 작게 만들지도 않으리라. 이와 비슷한, 내가 명백한 모순으로 인식하는 것들을 만들지도 않으리라.” 그리고 확실히 나한테는 어떤 신을 사기꾼으로 여길 까닭이 없고(또한 내가 어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이러한 의견에 좌우되는 의심의 근거란 아주 빈약한 것이고, 내가 말하는 식대로라면, 형이상학적이다. 기회가 난 김에 이것까지 제거하려면, 나는 신이 있는지, 있다면 사기꾼일수도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한, 나는 결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완전히 확신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66-68p.
솔직히 이 두 문단을 처음 읽고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오류를 범한 부분이 과연 무엇이며, 이것들이 왜 그에게 ‘신에 대한 고찰’의 필요를 느끼게 하였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3번 넘게 다시금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름의 이해를 획득한 것 같다. 혹시나 뒤에 나 자신이 다시 읽을 경우를 대비하여,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남긴다.
그는 외부 세계와 내적 세계 사이의 인식론부터 논하기 시작한다. 그는 오래 전에 많은 것들을 확실하다고 받아들였지만, 그의 제1, 2성찰을 통하여 이것들에 대한 의심이 커진다. 하지만 그는 외부 세계에 관하여 그가 ‘맑게 인식한’ 것들, 즉 이들 외부 세계로부터 연상되는 관념들을 떠올린다. 그는 외부 세계에 관해 인식하는 과정에서 그가 관념들을 떠올렸으며, 그 관념들마저 지금 나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둘 다 ‘생각하는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으므로 참이라고 확인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일련의 반론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관념 중 하나는 사람의 관념은 전적으로 외부 세계와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취득되어,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아이 때에는 아무 관념도 가지지 않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외부 세계와의 오감적 상호 작용이 누적되고, 이것이 미메시스 능력으로 하여 내적 세계로 이데아화(?) 되면서 관념을 취득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 마저도 지금 나 자신이 스스로 자연히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이므로 이것 또한 의심이 가능하다. 또한 나 자신이 과거를 알기 위한 방법이란, 나 자신의 불명확한 기억 – 즉, 외부 세계와의 상호 작용에 대한 경험에 의존하거나, 혹은 현재의 외부 세계의 기록에 의존하는 방법 뿐인데, 둘 다 외부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심스럽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으며, 데카르트의 기술처럼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란 지금 그러한 관념들이 ‘생각하는 나’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그 ‘관념을 떠올리는 과정’에는 사실 숨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내가 범한 오류처럼) 이러한 관념들이 외부 세계로부터 나에게 ‘유입되었다’라는 것이 착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외부 세계가 나의 관념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 모두 외부 세계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덧없이 맑게 지각하는 이러한 ‘관념’들에 대해서도 의심이 필요한 것인가? 만약 외부 세계와의 상호 작용이 일체 없었고, 지금 내가 인지하는 모든 외적 세계가 사실은 꾸며진 것이고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면, 내가 가진 ‘관념’들은 외부 세계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주어졌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자연적으로 태동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설명보다는 누군가가 나에게 주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그럴 듯 해보인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하여 데카르트는 ‘신’일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만약 외부 세계와의 상호 작용이 모두 거짓이라면, 그러한 거짓 세계를 의도하는 어떤 존재, ‘신’이 나에게 관념을 주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이 그에게 ‘거짓된 관념’을 주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더없이 맑게 인지하는 것들’을 되돌아보면, 그는 신이 그에게 ‘거짓된 관념’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애써 긍정하고 싶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신이 과연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부터 알 수 없으며, 그 이전에 신과 같이 자신의 ‘내적 관념’을 유발한 존재의 여부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관념에 관해 말하자면, 관념은 다른 것과의 연관 없이 그 자체로만 고찰할 때 본디부터 거짓된 것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상상하는 것이 산양이든 키메라든, 하나를 상상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상상하는 것 못지않게 참이다. 또한 의지나 정념 자체에는 두려워할 만한 거짓이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아무리 잘못된 것을, 심지어 아무 데도 없는 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이 때문에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이 참이 아닐 수는 없다. 다음으로 남은 것은 판단 뿐이다. 판단할 때 나는 잘못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판단에서 발견되는 중대하면서도 가장 흔한 오류는 내가 지닌 관념이 내 밖에 놓인 어떤 사물과 닮았다고, 즉 동형적이라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내가 관념 자체를 내 생각의 어떤 양태로서 고찰하고 다른 어떤 것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아마도 관념이 나에게 실수할 만한 문젯거리를 제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런 관념들 가운데 몇몇은 타고난 것이고, 몇몇은 얻은 것이며, 몇몇은 나 자신이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사물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이 무엇인지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알기로 나 자신의 본성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얻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지금까지 내가 판단해온 바에 따르면, 내가 지금 어떤 소리를 듣고 태양을 바라보며 열을 느낀다는 것은 내 밖에 놓여 있는 어떤 사물에서 비롯된다. 끝으로 세이렌이나 히포그리프스 따위는 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심지어 모든 관념을 얻은 것이라고, 아니면 타고난 것이라고, 아니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아직 관념의 참된 기원을 훤히 궤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내 바깥에 실존하는 사물로부터 얻은 것으로 여겨지는 관념에 관하여 탐구해야 한다. 나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인해 관념이 실존하는 사물과 닮았다고 믿게 되는가? 물론 알다시피 나는 자연으로부터 그렇게 배웠다. 나아가 나는 그 관념이 내 의지에, 따라서 나 자신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본의 아니게 자주 떠오른다. 예컨대 나는 지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열기를 느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이 감각, 즉 열의 관념을 나와는 다른 것, 즉 내 곁에 있는 불의 열기로부터 얻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이 열기가 뭔가 다른 종류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닮은꼴을 나에게 전해준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제 이런 근거들이 충분히 견고한지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나는 자연으로부터 그렇게 배웠다’는 말은, 뭔가 제멋대로인 충동에 따라 내가 그것을 믿는 쪽으로 이끌렸다는 것이지, 어떤 자연의 빛에 따라 그것의 참됨이 내게 밝혀졌다는 뜻이 아니다. 이 두가지는 많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빛이 나에게 밝혀주는 것들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예컨대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있다는 것이 귀결된다는 것,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 왜냐하면 이 빛만큼 신뢰할만한 능력도, 이 빛이 밝혀주는 것들이 참이 아니라고 가르칠 만한 능력도,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충동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좋은 쪽을 선택하려는데 이것 때문에 나쁜 쪽으로 쏠리게 된다고 이미 예전에 종종 판단했다. 왜 다른 경우에도 이것을 계속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다음으로, 이 관념들이 아무리 내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내 바깥에 있는 사물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방금 말한 저 충동은 내가 지니고 있기는 해도, 알다시피 내 의지와는 별개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어쩌면 아직 나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다른 능력, 곧 이러한 관념들의 생산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들이 내가 잠자는 동안 바깥 것의 도움 없이 내 안에서 형성되는 일은 지금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관념이 설령 나와는 다른 사물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이 관념은 그 사물과 닮아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이 둘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나는 태양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관념을 내 안에서 발견한다. 한 관념은 이른바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대부분 내가 얻은 것이라고 간주한 것에 속하고, 이로써 태양은 내게 아주 작게 나타난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천문학적 근거에 따라 추려낸 것, 즉 내가 타고난 개념들로부터 끌어낸 것이거나, 아니면 어찌어찌 다른 방식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이며, 이로써 태양은 지구보다 몇 곱절이나 더 큰 것으로 제시된다. 물론 둘 다 내 밖에 실존하는 그 태양과 닮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성은 태양에서 직접 흘러나왔다고 여겨지는 관념이 태양과 가장 닮지 않았다고 설득한다.
이 모든 점들이 충분히 증명하는바, 나는 지금까지 확실한 판단이 아니라 그저 어떤 눈먼 충동에 따라, 나와는 다른 어떤 것이 실존하며 이것이 자신의 관념 곧 그림을 감각 기관 아니면 뭔가 다른 방식을 통해 나에게 전해준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69-72p.
앞 부분에서 내가 이해한 바가 맞았다는 신호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울리는 듯 했다. 물론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가 의도하고 있는 바를 그나마 어느 정도의 선에서는 제대로 파악한 것 같았다. 그는 ‘관념’들이 바깥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다. 보통 우리는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 어떤 ‘관념’이 일어나는 경험을 통해 그 관념들이 외부로부터 기원한다고 판단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이러한 ‘외부로부터 기원한다고 판단’하는 우리의 행위 자체는, 어떤 자연의 빛이 아닌 우리의 자체적 충동에 의한 판단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논박한다. 즉, ‘자연으로부터 그렇게 배웠다’라는 말 자체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외부 세계로부터 취득한 관념’들에 대한 논리가 무너진다. 두 번째로, 이러한 관념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적으로 외부 세계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일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바깥의 사물로부터 관념이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충동’이지, 의지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외부로부터 유입받은것’이라고 주장하는 ‘덧없이 명백하게 인지되는’ 관념들조차, 사실은 외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형성된 것, 혹은 이미 내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가능성을 연다. 마지막으로, 그는 외적으로 유발된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 관념이 필연적으로 ‘외적’과 닮을 필요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가 예시로 든 태양의 경우는 모두 외적으로 유발된 어떤 관찰이나 경험,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결부되어 나온 것이다. 두 가지의 태양 모두는 둘 다 실제 태양과 닮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굳이 외적으로 유발된 ‘작은 태양’과 그보다는 큰 ‘천문학적인 태양’이라는 두 관념이 실제와 일치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전적인 근거가 분명히 없다. 그러므로 ‘외적 유입으로 형성된 관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철회하여야만 한다고 그는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위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데카르트가 서로 다르고 대비되는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는 ‘충동’과 ‘의지’를 대비 구도에 놓고, ‘충동’은 신뢰할 수 없으며 ‘의지’는 비교적 신뢰 가능한 범주 위에 올려두는 듯 하는데, 둘 모두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두 ‘믿음’의 범주에 포함된다. 어떤 믿음은 신뢰할 수 없으며 어떤 믿음은 신뢰할 수 있다는 논증이 무언가 모순적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덧없이 명백하다’고 믿을 수 있으며, 전적으로 ‘충동’이 아니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의지’라는 믿음의 범주라고 생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이 정의 문장 자체가 순환적이라 모순적이겠지만)는 일단은 받아들일 만 하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에 대한 전적인 의심의 자세를 변경하여, ‘의지’라는 하위 종류의 믿음은 신뢰해보고, ‘충동’이라는 하위 종류의 믿음은 신뢰하지 않기로 해야 한다. 물론 그 둘이 구분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주 32: 자연적 충동과 자연의 빛의 구분은 데카르트의 한 편지에 잘 대비되어 있다. “나는 본능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지니고 있고 순수하게 지성적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빛 곧 정신의 직관이지요. 주장컨대 오직 여기에만 우리는 신뢰를 보내야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동물이라는 조건에서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 육체를 보존하고 육체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자연의 특정한 충동입니다. 이런 것을 언제나 따라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데카르트가 메르센에게, 1639년 10월 16일>, AT II, 599쪽.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관념들을 전해준 사물들이 내 밖에 실존하는지를 탐구하는 또 다른 길이 떠오른다. 물론 이런 관념들이 생각의 특정한 양태들이라는 점에 한해서 보자면, 나는 이것들 사이의 차이를 모르며, 또 보다시피 이것들은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나한테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 관념은 이 사물을, 저 관념은 저 사물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이것들은 서로 크게 다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실체를 보여주는 관념은 단순히 양태 곧 우연적 속성을 재현하는 관념보다 확실히 더 큰 무엇이고, 내가 말하는 식대로라면,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담고 있다. 또한 내가 어떤 관념을 통해 어떤 최고의 신, 즉 영원한 자, 무한한 자, 모든 것을 아는 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의 창조자를 인식한다면, 이러한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가리키는 관념보다 확실히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담고 있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72-73p.
우선 이 부분을 읽고 가장 먼저 연상되는 부분은 일전에 서울대학교 <문학과 철학의 대화> 수업에서 강우성 교수님께서 설명하셨던 3단계로의 이데아 체계에 대한 것이다.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경험 세계에서의 사물들을 담은 현상 세계가 있고, 이것의 일부, 즉 우연적 속성이 집합되어 있는 인위적 세계가 있다. 그리고 현상 세계보다 더 큰 어떤 신적인 세계 – 혹은 현상 세계의 상위 개념으로서, 현상 세계는 단지 이들의 사영으로서 나타나게 하는 이데아적 세계가 있다.
표상적 실재성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관련된 주석이 있었다. 주석에서는 표상적 실재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다른 설명과, 이와 대비되는 관념인 형상적 실재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주 34: 데카르트의 저술에서 실재성 개념은 관념의 문제와 관련하여 형상적, 표상적(대상적 / 재현적) 등과 같은 형용사로 한정되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의 정의나 해설은 <성찰>의 본문 밖에서 제시된다. 예컨대 <반론과 답변> 중 두 번째 대답에서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은 “어떤 사물이 관념 속에 있는 한에서 이 관념에 의해 재현된 그 사물의 본질”로서 정의된다(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양진호 옮김(책세상, 2010), 26쪽에서 재인용). 형상적 실재성은 본문에서도 반복되듯이(이 책 74쪽 이하) 어떤 관념의 대상이 현실적으로, 있는 그래도 지니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위 기술은 플라톤의 3단계적 <이데아론>과 연관짓는다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양태 혹은 우연적 속성을 보여주는 관념이란 것은 ‘인위적 세계’에 결부된 관념이고, 실체를 보여주는 관념이라는 것은 ‘현상 세계’에 결부된 관념이다. 따라서 ‘현상 세계’에 결부된 어떤 관념이 지시하는 의미(표상적 실재성)는 자명히 ‘인위적 세계’에 결부된 관념이 지시하는 의미보다는 더 큰 의미를 지시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현상 세계’에 결부된 관념은 ‘인위적 세계’에 결부된 관념보다 크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현상 세계’에 결부된 관념보다 상위의 세계인 ‘이데아적 세계’에 결부된 관념의 존재를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데카르트의 경우는 ‘이데아적 세계’라기 보다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들을 창조한 자의 세계를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층위 구조 상은 유사하다.
그런데 작용 원인 및 총체적 원인은 적어도 이것의 결과가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는 이미 자연의 빛에 따라 명증하다. 묻건대, 결과는 원인으로부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자신의 실재성을 얻겠는가? 만일 원인이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그 결과에 제공하겠는가? 이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는 어떤 것도 생길 수 없으며 더 완전한 것, 곧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 있는 것은 덜 완전한 것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 또한 이는 현실적 즉 형상적 실재성을 담고 있는 결과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표상적 실재성만이 고려되는 관념의 경우에도 명백히 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돌이 전에는 있지 않다가 이제 막 있기 시작한다고 해 보자. 이런 일은 돌에 들어 있는 (실재성) 전체가 형상대로(있는 그대로) 아니면 우월하게 담겨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산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 전에 열기를 갖고 있지 않았던 어떤 대상이 열기를 띠기 시작하는 일은, 완전성의 등급에서 볼 때 적어도 그 열기와 똑같은 어떤 것(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그 밖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열기나 돌의 관념이 내게 있다는 것도, 이 관념들이 적어도 내가 열기나 돌에 담겨 있다고 파악하는 만큼의 실재성을 담고 있는 어떤 원인에 의해 내게 놓여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 원인(=열기와 돌)이 자신의 현실적, 곧 형상적 실재성에 관하여 나의 (돌이나 열기에 대한) 관념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때문에 이 원인이 (나의 관념보다) 더 적은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 생각의 양태로서의 관념은 내 생각으로부터 얻은 형상적 실재성 이외에 다른 어떤 형상적 실재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 관념의 본성이다. 그런데 이 관념은 다름 아닌 열기나 돌의 표상적 실재성을 담고 있는바, 이는 그 관념이 담고 있는 표상적 실재성과 적어도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는 원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어떤 관념이 그것의 원인에 담겨 있지 않던 것을 갖고 있고, 따라서 이것을 얻은 곳이 없다고 해보자. 사물이 관념을 통해 지성 속에서 대상으로 존립하는 이 존재 방식이 아무리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아무것도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아무 데서도 비롯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내가 관념들 속에서 고려하는 실재성은 단지 표상적인 것이므로 이 실재성이 관념의 원인 속에 형상대로(있는 그대로) 들어 있을 것까지는 없고 그저 표상적으로(=표상하는 바대로) 들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 이 존재의 표상적 양태가 바로 관념의 본성과 일치하는 만큼, 존재의 형상적 양태는 관념의 원인, 적어도 최초 주요 원인의 본성과 일치한다. 그리고 혹시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 생길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이렇게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며, 결국 어떤 첫 번째 관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념의 원인은 어떤 원형과 같고, 여기에는 관념에 단지 표상적으로 들어 있는 모든 실재성이 형상대로 담겨 있다. 그러므로 내가 자연의 빛에 따라 통찰하는바, 내가 지닌 관념은 마치 그림과 같아서 사물로부터 얻은 완전성을 쉽게 잃을 수는 있어도, 그보다 더 크거나 완전한 것을 담을 수는 없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73-75p.
주 35: 총체적 원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말 그대로 한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 충족해야 할 원인들의 총체를 뜻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볼러는 이것을 충족 이유로 옮겼다. … (이하 생략)
어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과성을 생각해보면, 결과에 해당하는 관념에 결부된 세계의 층위보다 원인에 해당하는 관념에 결부된 세계의 층위가 더 크거나 같아야 한다. 더 작은 집합의 명제로부터 더 큰 집합의 명제들을 일반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집합론과 명제론 생각해보기) 즉, 완전한 것은 이보다 덜 완전한 것으로부터 도출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이는 굳이 현실적(형상적) 실재성의 논의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추상적인 층위인 표상적 실재성의 논의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돌의 인지라는 결과는 어떤 인지의 원인이 그 돌의 속성에 해당하는 모든 관념들을 꼭 맞게 만족시키거나(형상대로) 아니면 그 관념들을 모두 만족시키고 남아(우월하게)야만 비로소 가능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나아가 어떤 관념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관념 존재의 인지)은, 돌의 인지를 유발한 원인과 같은 층위의 어떤 원인 – 즉, 돌에 담겨있다고 파악하는 것 만큼의 실재성을 담고 있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인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결과에 해당하는 ‘돌’과 ‘열기’에 대한 나의 관념에 대하여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원인에 해당하는 것에 결부된 ‘세계’가 나 자신의 관념에 결부된 ‘세계’보다 더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도 이들 관념을 도출시킨 원인은 관념에 결부된 ‘세계’ 이상의 범주에 해당할 것임을 앞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좀 더 설명해보자면, 내가 이를테면 ‘돌’이라는 관념을 연상하였다고 생각하였을 때, 이 관념을 연상시킨 외부의 자극은 ‘돌’이라는 관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속성들이 어떤 원인들로 인하여 꼭 맞게, 혹은 넘치게 충족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이라는 관념을 나에게 연상시킨 원인은 ‘돌’이라는 표상적 의미 이상의 범주에 속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후 기술의 첫 번째 최고 층위의 관념이라고 함은, 세계를 인지하는 나 본인에 속한 최고 층위의 개념으로서,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 관념은 하위의 것을 결과로 낳을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것을 결과로 나을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인지 한계는 이 최고 층위의 관념이 된다. 즉, 이 관념보다 큰 것을 나 스스로는 담을 수 없다.
그런데 몸 있는 것에 대한 관념에 관해 말하자면, 여기서는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여제 밀랍의 관념을 검토했던 식으로 이 관념을 더 정확히 들여다보고 낱낱이 검토하면, 나는 거기서 아주 적은 것들만을 맑고 또렷하게 지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크기, 즉 길이, 넓이, 깊이로 펼쳐져 있음, 이 펼쳐짐을 한정함으로써 생기는 형태, 여러 형태의 것들이 제각각 차지하는 위치, 이 위치의 변화나 운동 정도이며, 여기에 실체, 지속 및 수를 덧붙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밖의 것들, 예컨대 빛깔과 색깔, 소리, 냄새, 맛, 뜨거움과 차가움, 다른 촉각적 성질들을 나에게 너무 헛갈리고 흐릿하게 생각되며, 이 때문에 나는 이것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즉 내가 이것들로부터 얻은 관념이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인지 아니면 헛것에 대한 관념인지조차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본래적 의미에서의 오류, 즉 형식상의 오류는 조금 전에 말했듯이 오직 판단에서 발견되지만, 이와는 달리 어떤 관념이 헛것을 마치 사물인 양 표상하는 경우에는 이 관념에서 내용상의 오류가 발견된다. 예컨대 내가 뜨거움과 차가움으로부터 얻은 관념들은 거의 맑지도 또렷하지도 않아서, 이것들로부터는 차가움이 뜨거움의 결여인지 아니면 뜨거움이 차가움의 결여인지, 혹은 둘 다 실재적인 성질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지를 배울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나 무릇 관념이란 사물의 관념이다. 따라서 차가움이 뜨거움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라면, 차가움을 마치 실재적이고 긍정적인 무엇인 양 나에게 재현하는 관념을 그릇된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나머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제3성찰. 신에 대하여. 76-77p.
이상은 데카르트가 구분하는 ‘외부로부터 기원한 관념’의 경우는 2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즉, 외부로부터 기원한 관념의 경우는 어떻게든 오감을 통해 인지되는 수 밖에 없다. 그를 통해서 인지되는 관념들이란, 예컨대 밀랍의 경우는 일차적으로 그것의 빛깔과 색깔, 소리, 냄새, 맛, 뜨거움과 차가움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일차적 관념은 이성을 통과하지 않고 오로지 감각에 의하여 나온 것이므로, 데카르트는 이것이 본인 ‘이성’ 혹은 ‘의지’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관념이므로 비교적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듯 하다. 즉, 이들 관념들은 거의 맑지도 또렷하지도 않아서, 이것들로부터는 실재적 성질의 유무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관념이 이성의 관문을 통과하였다면, 그를 통해 탄생하는 크기, 길이, 넓이, 위치, 운동, 실체, 지속, 수와 같은 관념들의 경우는 비교적 일련의 시련을 거친 관념들이므로 보다 신뢰할 수는 있다는 것 같다.
확실히 이 그릇된 관념들을 지은 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탓할 것 없다. 다시 말해 만일 이것들이 거짓이라면, 즉 어떤 사물도 재현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 즉 이것들은 내 본성이 뭔가 모자라고 전적으로 완전하지만은 않다는 바로 그 이유로 내 안에 있다. 이는 자연의 빛이 내게 알려주는 바이다. 반면에 만일 이것들이 참이라면, 이것들은 내가 헛것과 구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적은 실재성을 내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시피 나 자신한테서 비롯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몸을 가진 것에 관한 맑고 또렷한 관념 가운데 몇몇, 즉 실체, 지속성, 수 및 이와 유사한 것은 나 자신의 관념에서 끌어낼 수 있는 듯 하다. 예컨대 내가 돌을 실체라고, 즉 그 자체로 실존하기에 알맞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도 실체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생각하는 것이고 펼쳐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두 개념은 막대한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실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다시, 나는 지금 있다는 것을 지각하고 전에 얼마간 있었음을 되새긴다. 또한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들이 여럿임을 인식한다. 여기서 나는 지속성과 수의 관념을 얻으며 다음부터는 이것을 다른 모든 사물에 적용할 수 있다. 반면에 몸을 가진 것의 관념을 이루고 있는 나머지는 펼쳐져 있음, 형태, 위치 및 운동이 전부다. 그런데 나는 다름 아닌 생각하는 것이므로 이것들을 단지 형상대로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실체의 특정한 양태들일 뿐이지만 나는 실체이기 때문에, 알다시피 나는 이것들을 우월하게 포함할 수 있다.
제3성찰. 신에 대하여. 78-79p.
데카르트는 이러한 ‘헛갈리는, 의심 가능한’ 1차적 감각에서 기원한 관념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에게서부터 기원한다고 논증한다. 만약 이것들이 그 어떤 사물도 재현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그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단지 스스로에게서 내적으로 기원하였으며, 단지 이것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어떤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이들은 그 재현이 아닌 내가 혼동하고 있는 다른 내적인 관념들과 유사하여 혼동이 지속되도록, 사물의 극히 일부인 실재성을 보여주므로 이것 역시 나 자신으로부터 오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나 자신의 내적 과정이 여기에 개입되지 아니하였다면, 사물은 온전히 그 실재성 전체로써 인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완전한 세계를 내가 인지하는 내적 과정이 개입되었을 때 세계가 불완전하게 인지됨)
또한 그는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2차적 관념들의 일부도 스스로에게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물과 스스로의 실체를 둘 다 인지할 때, 사물, 즉 몸을 가진 것의 관념을 이루고 있는 펼쳐져 있음, 형태, 위치, 및 운동 등의 정보는 실체의 특정한 양태들이라서, 확실한 실체인 스스로에게 포함될 수 있다. (스스로가 확실한 실체라는 것은 제2성찰에서 논증한 바 있음)
이제 남은 것은 신에 대한 관념뿐이며, 이 관념 속에 나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지가 고찰되어야 한다. 신이란 무한하고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한 실체를 말한다. 또한 이러한 실체는 나 자신을 창조했고, 다른 무언가가 실존한다면 실존하는 그 모든 것 역시 창조했다. 이 모두는 보다시피 나 자신한테서는 비롯될 수 없는 것들이며, 이는 곰곰이 생각할수록 더욱더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이상으로부터 신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실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실체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무한 실체의 관념은 정말이지 무한한 실체로부터만 비롯될 것이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79p.
결국 데카르트는 모든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관념의 종류에 대한 탐색을 마치고 마침내 남은 신에 대한 관념을 탐색한다. 앞서 천사, 악마와 같은 관념들은 몸 있는 것의 관념과 신에 대한 관념의 조합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하였고, 몸 있는 것의 관념들은 결국 자신으로부터 기원함을 보였다. 이제 신에 대한 관념의 차례인데, 신의 경우는 무한한 관념에 해당하므로, 불완전하고 유한한 자신의 관념으로부터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보다 항상 더 크므로, 유한한 자신의 관념은 무한한 신의 관념보다 결코 우위에 있거나 이를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관념’이 아닌 무한한 ‘신의 관념’이 존재하며, 이 관념은 필히 유한한 본인으로부터는 창조될 수 없으므로 무한한 실체인 신으로부터 창조될 수 밖에 없다.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서의 필연적 신의 존재 입증)
그러나 이상의 데카르트의 논증의 경우 나 자신은 데카르트가 결과적으로 ‘어떤 관념’에 대해서는 ‘원인’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빛’이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것을 독자에게 설득하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독자의 ‘직감’에 호소하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원인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상당히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또한 그러하므로 결과의 실재성은 반드시 원인의 실재성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라는 ‘자연의 빛’이라는 것도 결코 의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논증’을 내가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는 일부 관념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여 ‘자연의 빛’이라는 공리로 깔아 두면서, 전적으로 이 공리들을 의심하지 않기로 하자고 독자의 직관에게 호소한 다음, 이 잘 짜여진 공리들로부터 ‘신의 논증’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 틀의 형태를 쓴 속임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이러한 비판이 나 자신의 ‘신의 존재’라는 명제에 관한 강한 반감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이제는, 조금 전 뜨거움, 차가움, 기타 등등의 관념에 대해서 말할 때처럼, 신에 대한 관념도 어쩌면 내용상의 오류이며 따라서 어디에서도 올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신에 대한 관념은 가장 맑고 또렷하여, 여느 관념보다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담고 있으며, 그 자체로 이보다 참된 것도 없고, 이만큼 오류의 의혹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없다. 이르건대, 이 최고로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자의 관념이 가장 참된 관념이다. 그런 존재자는 실존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지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존재자의 관념이 앞에서 말한 차가움의 관념처럼 나에게 아무런 실재적인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고까지 지어낼 수는 없다. 나아가 이 관념은 가장 맑고 또렷하다. 다시 말해 내가 실재적이고 참된 것으로서, 또 어떤 완전성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맑고 또렷하게 지각하는 모든 것이 전부 이 관념에 들어 있다. 무한한 것을 파악할 수 없다든가, 또는 신 안에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아니 심지어 생각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한한 까닭에 나에게 파악되지 않는다. 내가 바로 이것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내가 맑게 지각하는 모든 것이자 어떤 완전성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심지어 어쩌다 내가 모르는 무수한 것들까지 신 안에 형상대로 아니면 우월하게 들어 있다고 판단한다면, 내가 그로부터 얻은 관념은 내가 지닌 모든 관념들 가운데 가장 참된, 가장 맑고 또렷한 관념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80-81p.
물론 그가 말하는 것처럼 완전하고 무한함에 대한 관념은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하다. 이것은 여느 관념보다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담고 있으며, 가장 그럴 듯 해보이므로 가장 참에 가까울 것 같기도 하다. 오류의 의혹이 발견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최고로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자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참된 관념에 가까울 것 같기는 하다. 데카르트는 그 ‘존재자’의 실존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있어도, 이 ‘존재자’에 대한 관념은 실재적인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존재자’에 대한 관념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존재자의 관념’은 가장 맑고 또렷하여, 불확실하고 회의가 가능한 세계에 대하여 일련의 해답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관념 중에, 신의 형상 안에, ‘존재자의 관념’ 안에 형상대로 아니면 우월하게 들어 있는 모든 관념들은 가장 맑고 또렷하여 가장 참된 관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로부터 ‘존재자’의 관념의 필연성에 관해서는 동일한 비판이 가능하다. 물론 그 ‘존재자’를 도입하는 것이 인과론적 관점이나 기타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나와 ‘완전함’의 세계로 이끌게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편리한 선택이고 직관적으로 그럴 듯 해보이는 선택이지만, ‘직관’이 항상 옳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거할 때에, 즉 ‘의지’가 긍정하는 모든 것을 ‘참’이라고 긍정할 수 없는 까닭으로 나는 이것을 전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는 듯 하다.
이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고찰하기만 하면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주의를 늦추어 감각적인 것의 그림에 정신의 눈이 흐려질 때, 나는 왜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참으로 더 완전한 존재자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지를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니 이어서 이 관념을 지니고 있는 나 자신이 이런 존재자가 실존하지 않아도 실존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보자.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물론 나 자신으로부터, 아니면 어버이한테서, 아니면 무엇이 되었든 신보다 덜 완전한 것들에서 왔을 것이다. 그보다 더 완전한 것도, 똑같이 완전한 것도 생각하거나 지어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나 자신으로부터 왔다면, 나는 의심하지도, 바라지도, 뭔가 모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모든 완전성을 내게 주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 사실 나에게는 이것들 가운데 몇몇 관념이 있을 뿐이다. 또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나, 곧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실체가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알다시피 이 실체의 우연적 속성에 지다지 않는, 뭔지 모를 많은 것들에 대한 인식보다 훨씬 더 획득하기가 어렵다. 나아가 만일 내가 더 큰 것을 나 자신에게서 얻었다면, 확실히 나는 더 쉽게 얻어지는 것들은 물론이고 내가 신의 관념에 담겨 있다고 지각하는 것들까지 일절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다시피 하기에 더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하기 더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나는 거기서 내 능력의 한계를 경험했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것은 나에게 확실히 더 어려워 보였을 것이다.
또한 내가 지금 있는 것처럼 항상 있었으며, 그래서 내 실존의 작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논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삶의 모든 시간은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낱낱의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 기대어 있지 않으며, 어떤 원인이 나를 이를테면 다시 이 순간에 창조하지 않는다면, 즉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방금 전에 실존했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실존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시간의 본성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명백한바, 무엇이든 낱낱의 순간을 지속하는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에 드는 힘과 작용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드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는 것 가운데 하나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분되지 않고)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분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를 조금 뒤에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다름 아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 엄밀히 말해서 나는 지금 나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것만을 다루기 때문에, 만일 그런 힘이 나한테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며, 또한 바로 이 사실로부터 내가 나와는 다른 어떤 존재자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더없이 명백하게 인식한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82-84p.
여기서 데카르트 그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자신은 어디로부터 근원하였는가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근원하였거나, 혹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자로부터 근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자신으로부터 자신은 근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자신이 자신의 창조자이라면, 자신은 분명히 스스로를 덧없이 완벽하게 창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굳이 의심하고, 무언가 불확실한 것들에 시달릴 필요가 없이 완전하게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불완전하다. 또한 스스로는 스스로를 지속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어떤 외적 요인이 있다는 결론이 자연히 내려진다. 따라서 스스로부터 자신은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관점에 모두 동의하지 않고, 사실은 스스로는 그 어디로부터 근원하지도 않고 단지 존재할 뿐이라는 시각이 가능한데, 이 경우에도 논거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즉, 각각의 시간선상의 순간들이 독립적이고 어떠한 인과관계도 그 사이에 가지지 아니한다면, 당연히 과거에 존재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지금 나 자신의 존재성을 이끌어낼 수 없으며, 이 경우는 결국 다시 혼돈에 빠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에 압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직관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으로서, 사실은 우리 스스로는 그 어디로부터 근원하지도 않고 단지 존재한다는 시각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인과 관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자연 철학자는 무언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데카르트가 가정한 것처럼, 나 자신이 감각하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회의적 방침과 나 자신이 평소 고수하는 ‘스스로가 믿어 오던 것도 (=데카르트의 ‘의지로 하여 자연의 빛처럼 주장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거짓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두 가지의 觀을 조합하면 결국 나는 존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참’에 대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좌절시킨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부정하면서 스스로 믿으려 하는 것을 선택하여 믿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으므로, 거기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할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좌절에 맞설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이렇게 지어내서도 안 된다. 많은 부분적 원인들이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다. 이 원인에서는 신에게 귀속되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받았고, 저 원인에서는 다른 완전성의 관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완전성은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에 모두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단일성, 단순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 말로 내가 신 안에 들어 있다고 파악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완전성 가운데 단일성의 관념은 내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을 얻게 된 어떤 원인이 없었다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이 나로 하여금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었더라면, 이것들이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85-56p.
이 부분은 나에게 있어 데카르트가 그의 논거를 전적으로 ‘유일신’ 사상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긴 그가 활동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중세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분쟁이 있기는 했으나 양쪽 모두 유일신이고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신에 대한 ‘단일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 말로 그의 절대적 신에 대한 믿음을 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신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단일성’을 가질 이유가 없으므로, 나는 불행히도 이 논거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마치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이를테면 도장을 찍어놓듯이, 신이 나를 창조할 때 내 안에 그 관념을 넣어주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도장이 바로 그 작품일 수도 있다. 오히려 신이 나를 창조했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덕에, 내가 어찌어찌 신의 그림 및 닮은꼴로 만들어졌다는 것, 또 나 자신을 지각하는 것과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신의 관념이 담긴 이 닮은꼴을 지각한다는 것은 상당히 믿을 만한 사실이 된다. 즉, 정신의 눈이 나 자신을 향해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불완전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며, 점점 더 큰 것과 좋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인식하는 한편, 내가 의존해 있는 자는 이 더 큰 것 모두를 한정 없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무한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것은 신이라는 것까지 인식한다. 또 이 논증 전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즉 만일 신이 참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렇게 ‘나는 있다’ (곧 ‘나는 신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본성을 지닌 자로서 실존할 수 없다. 이르건대, 나는 신의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신은 내가 (완전히) 품을 수 없지만 생각으로써 어느 정도 다가갈 수는 있는 모든 완전성들을 지니고 있다. 또 그는 어떤 결함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신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밝혀졌다. 다시 말해 모든 사기와 속임은 어떤 결함에 달려 있다. 이는 자연의 빛에 따라 명백하다.
제3성찰. 신에 관하여. 87-88p.
위 논증 전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즉 만일 신이 참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나는 있다’ (곧 ‘나는 신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본성을 지닌 자로서 실존할 수 있다. ‘신의 관념’은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의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열린 내용일 뿐이다. 또한 만일 ‘신의 관념’을 심어준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모든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때에 원인은 결과 그 이상의 범주의 것에 해당한다는 것은 오류이다. 더 작은 것에서도 더 큰 것이 탄생할 수 있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이 탄생할 수 없는 질서에서는, ‘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후기
나는 성찰에 관하여 남은 4개의 장을 한꺼번에 읽으려고 했으나, 제3장만의 내용으로도 너무 오래 걸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나는 결국 한 번 끊고, 다시 제4장부터 다시 도전해야 할 성 싶다. 서둘러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고 나는 더 바빠질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