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수월 #2. 《OMORI》, 제1주차 ‘서장’ 모임 질문지
2025-02-11《OMORI》는 의도적으로 침묵함으로써 말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과학과 논리, 이성이 강조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장엄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OMORI》가 그러하듯, 나 역시 의도적으로 침묵하고자 한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OMORI》는 의도적으로 침묵함으로써 말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과학과 논리, 이성이 강조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장엄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OMORI》가 그러하듯, 나 역시 의도적으로 침묵하고자 한다.
비록 작은 창 속에 펼쳐진 여러 층위의 세계였지만 나는 기꺼이 뛰어들었고, 주인공을 따라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다시 한 번 인간 정신의 취약성을 깊게 음미했다. 게임 《OMORI》를 통해 내 정신이 어떻게 ‘심연’을 돌아다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조각들, 이들을 이제 하나씩 풀어낼 때가 되었다.
끝없는 사유 그리고 관찰은 마음과 현실 두 층위에서 뿌리 깊은 부조리를 발굴해낸다. 철학의 힘은 개인이 치명적인 물음에 노출되도록 해서 그를 위태롭게 만드는 데 있다. 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각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물음으로 된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금지에 대한 이의가 제기됨을 목격한다. 아래로 내려가서 보았을 때, 이것은 ‘문을 열고 나가는’ 과정이며 스스로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만나는 과정이다. 〈페미니즘〉은 금지가 목표하는 일원성과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 철학은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덕수궁 속에서 발견된 것이란 모두 격동기였던 것이다. 고종의 격동기, 그리고 나의 격동기.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려다보기 힘든 눈보라 속에서 나아가는 존재. 그 눈보라에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고 하지만 다시 일어나기도 하면서, 비틀거리지만 천천히 걸어나가는 존재. 삶이 그런 것이다. 인간이 그런 것이다.
니체가 도덕의 절대성에, 마르크스는 경제질서의 절대성에, 프로이트가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졌다면, 페미니즘은 ‘젠더(gender)’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으로 평가할 수 있어 보인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의심없이 전제해왔던 명제들에 대한 재고를 권유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페미니즘의 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더라도 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반목을 거두어야 하며 의견을 듣고 최대한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운명에 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여기서 그 진가를 온전히 발휘한다. “우리가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 속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검은색(玄). 실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바로 그것과의 조우. 심연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사다리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있다.
오래 전 보낸 편지다. 글은 때로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담는데 제격이다. 우리의 삶, 그 중간에 가는 길이 잠깐 달라져도 글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법이다.
아주 슬픈 날이다.
오늘의 참사는 단순히 ‘운이 없었다’라는 말로 단정될 수 없다. 모든 죽음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는 법이다. 시스템과 매뉴얼들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구조상의 위험들이 무엇이었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같은 죽음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