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새 글 알림 중단 공지
2024-10-25안녕하세요, 커피사유입니다. 최근 이메일 새 글 알림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Automatic사의 Jetpack 뉴스레터 서비스가 잦은 오류를 일으킴에 따라, 부득이 뉴스레터… Continue reading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안녕하세요, 커피사유입니다. 최근 이메일 새 글 알림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Automatic사의 Jetpack 뉴스레터 서비스가 잦은 오류를 일으킴에 따라, 부득이 뉴스레터… Continue reading
안녕하세요, 커피사유입니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약 4년 정도를 써 왔던 기존 stevenoh0908.kro.kr 도메인에서 stevenoh0908.pe.kr 도메인으로 블로그 주소를 이전함을 알려드립니다. 당초 사용해왔던… Continue reading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무슨 사랑을 말하는가?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초인의 사랑을 말한다. 책을 마무리하며 나는 단 한 가지의 질문만을 남겨두게 된다.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진정으로 철학적이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질문.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 존재가 처한 가장 심오하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부조리, 그것은 쿤데라에게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립으로, 나에게는 혼돈과 질서의 대립으로 간주된다.
니체, 알베르 카뮈, 질 들뢰즈 그리고 밀란 쿤데라. 혹자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유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키치〉라는 가장 인간적인 결과물 앞에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여정이 중간 기착지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와 니체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키치의 문을 열고 나를 바깥으로 잡아 이끌었다.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내가 왔던 길을 내려다보면 가슴 한켠에서 울려퍼지는 소리가 생기곤 한다. 이것은 그 소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 우연이 가져다준 알베르 카뮈의 이 문장은 나 자신의 ‘악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대학 위에서 대학을 부정하는 지난 4년의 시간을 되돌아볼 때, 나는 뫼르소 · 니체 · 오사무 세 사람이 여전히 형태를 바꾸어 반복되고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선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Man muss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ären zu können.”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똑같이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온전히 느끼기 때문이다: “Veritas Morbus Mea.”
실로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 음악은 그 주제 앞에 장엄한 전주가 흘러나오는 법이다. 지금 돌이켜볼 때 나에게도 삶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깨달음 앞에 일종의 ‘전주’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개가 치고 모든 것이 새롭게 정의되기 바로 직전의 양태, 이 기록은 그런 기록이다.
수많은 이들은 니체가 사용한 ‘강자’, ‘약자’, ‘지배’라는 용어에 천착하여 그를 오독한다. 니체가 ‘강자’ 그리고 ‘약자’로 가치를 나눌 때 그것은 ‘선’과 ‘악’으로 나눌 때와는 전혀 다른 질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