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14. 상록수
2025-04-04나는 국회의장의 문장들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행간에 숨은 수많은 역사를, 오늘의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위해 흘렀던 수많은 피들을 생각해본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저 질문, “국가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본다. 늦지 않게 나는 그의 말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여전히 문장들은 이어지고 있음을 떠올려낸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나는 국회의장의 문장들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행간에 숨은 수많은 역사를, 오늘의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위해 흘렀던 수많은 피들을 생각해본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저 질문, “국가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본다. 늦지 않게 나는 그의 말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여전히 문장들은 이어지고 있음을 떠올려낸다.
전례없는 시간, 전례없는 사유, 전례없는 회복. ― 철학적 사유가 〈죽음〉과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지금,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짚어본다. 나는 방금 막 〈우물〉에서 빠져나왔다. 불타고 있는 〈숲〉과 아침을 기다리는 〈초원〉 사이에 자리한, 모든 인간이 가진 그 〈우물〉로부터.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노르웨이의 숲》은 이 문장에 담긴 인간 존재의 근간에 자리한 두 개의 항에 주목한다. 〈죽음〉, 그리고 〈삶〉. 인간은 이 둘의 경계에 놓인 존재이기에 가운데 자리한 〈우물〉 옆에서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마침내는,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인간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타인에 대해서는 또 어떨까? 그러나 우리는 오직 자신과 타인 모두를 타자로써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단절, 즉 〈상실〉은 여기서 시작된다. 철학, 문학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갈 때 항상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과거의 자신도 나 자신이다.”라는 저 당연한 문장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오는 때가 있다. 문장은 불꽃을 만들고, 불꽃은 끌어안으라고 외친다. 나는 니체 · 마그리트 · 바흐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음을 느낀다. 호프스태터가 괴델 · 에셔 · 바흐가 하나로 이어짐을 느꼈듯이. 《하얀 문》을 열 때가 된 것이다.
자신의 심연으로 뛰어든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문이 하나 있다. 인간 정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이 문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무엇을 하든 그 자리에 장엄하게 서 있는 저 잔인한 문에게 나는 〈하얀 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문을 들여다보며 나는 다시금 묻는다. “문을 열 것인가, 열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그의 일부분으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간다. 그는 영원히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이 그를 인간으로 만든다.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저 세계, 저 간극을 어떻게든 봉합하기 위해 비틀거리는 인간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바로 그 간극 위에서 치열하게 질문해온 지난 4년을 회상하게 된다.
지난 시간의 물음은 여전히 이어진다. 맨 처음부터 묻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의적으로 그어진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반대편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말의 의미에 전율하게 된다. 문 앞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운명은 영원하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된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불가해한 단절, ‘문’이 있다. 심연이 그를 들여다봄에도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것을 탐한다. 그렇기에《OMORI》는 우리를 문 앞에 세운다. 문고리를 움켜쥐며 나는 망설인다. 가장 치명적인 물음이 울려퍼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침내 심연이 나에게 묻는다…. “문을 열 것인가?”
반년 전 즈음 보낸 편지다. 처음과 끝이 맞닿는 순간을 인식하노라면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깊어지고 솔직해지곤 한다. 대학의 토양 위에서 처음과 끝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