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커피사유

낮에는 학구열과 호기심이 넘치는 학자, 밤에는 실리적인 프로그래머, 새벽에는 새벽만의 또렷한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블로거. 별난 사람, 커피사유입니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By 커피사유 2026-09-13 0

장기 출장에서 이상의 문집을 샀다. 지금으로서는 그 유명한 《날개》의 대목들이 마음에 든다. 《날개》는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유명하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그리고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문장들이란. 또는 나에게 가장 깊게 와닿는 문장들이란. 그들은 마지막 부분의 앞쪽에서 펼쳐진 절반의 날개로써 다음과 같이 비상하고 있다. […]

우물

By 커피사유 2026-09-01 0

[…]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 […] 처음으로 ‘비참’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

Between Two Worlds

By 커피사유 2026-08-31 0

심경이 복잡하다. 탓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탓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가 무엇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무엇에 분노했는지, 무엇을 격렬하게 거부헀는지를 되짚어본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반쯤 강요되었던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긴 했지만, 나는 문제는 그 밑에 차곡차곡 쌓여 농후하고 되기막하게 되어버린 인식의 괴리 내지는 좌절된 이해일 것임을 안다. […]

탐서일지 #40.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II

By 커피사유 2026-06-29 0

추파(秋波). 가을 추(秋)에 물결 파(波). 김애란은 《두근두근 내 인생》 작가의 말에 “이 노래가 씨앗이 될지, 휘파람이 될지, 모르는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오래전 부르고 싶어한 이름과 닮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두 계절 사이에 물들어 그 사이에 애매하게 서 있는 결 위에서, 나는 감히 써본다. “당신께 / 당신의 문장을 / 돌려드린다”라고.

문답록 #7. 사건, 증상, 주체로서의 〈단소 살인마〉

By 커피사유 2026-06-25 0

서사적 비평과 철학적 비평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사람들에게 비정상적, 반사회적, 정신병적인 인물로 조롱되는 ‘단소 살인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소 살인마〉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몰상식한 인간 이하의 존재의 난동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단소 살인마〉는 저항하는 인간의 비극이거나, 우리에게 가장 외밀하기에 인간적인 작품일지도 모른다.

탐서일지 #39.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I

By 커피사유 2026-06-20 0

문장들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는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문장들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비극이 그려내야 할 인간의 본질을 매우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설레어하다, 초조해하다, 우울해하다, 나중엔 지금 나가면 얼마나 민망할까 싶어 그냥 거기 그대로 있게” 되는 장롱 속 인간 말이다.

다수결 이전에 대한 충실성

By 커피사유 2026-06-08 0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면 승패가 있는 경기를 벌이게 된다. 그 결과가 내게 중요하다면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내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같은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잘못 짚거나 빗나갔다고 여겨지는 것만 챙겨 듣고, 내가 동의할 수도 있는 부분들은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러고 나서 상대방의 완고함을 부각시키면서 나의 우월한 해결책을 주장한다. […]

탐서일지 #38.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II

By 커피사유 2026-06-08 0

‘지나칠 정도로 파아란 하늘로 모든 곳이 남김 없이 뒤덮여 있다’는 말을 라캉 철학의 용어들을 빌려와 바꾼다면 아마 다음의 번역문이 탄생할 것이다: ‘실재계가 상징계로 지나칠 정도로 남김없이 뒤덮여 있다’. 증상(Symptôme)의 가장자리는 일상의 평범한 시선을 비트는 때만 비로소 눈에 드러난다. 《자몽살구클럽》은 그 전형적인 예시다.

탐서일지 #37. 한로로, 『자몽살구클럽』 I

By 커피사유 2026-05-31 0

캔버스가 지나치게 많은 물감으로 뒤덮여 그 배후에 숨은 회색빛 바탕을 아예 덮어버린다면, 그건 실패한 채색이다. 《자몽살구클럽》은 ‘자살의 문제’라는 첫 약속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도 단순한 채색을 가진다. 모든 초상들이 너무나도 파아랗다. 지나칠 정도로 파아란 하늘로 모든 곳이 남김 없이 뒤덮여 있다.

몸이 결락되어 있는 글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By 커피사유 2026-04-24 0

글쓰기는 몸쓰기라고 믿는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마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데는 상상의 가공이 불가피하지만 그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몸의 경험에서 나온다. 좋은 글에는 근육의 수고로움과 몸이 흘린 땀방울, 몸에 연결된 감정과 기분의 골이 낱낱이 드러난다. 몸이 결락되어 있는 글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피로 써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