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17.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잠시, 멈춤 #17.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2021-05-18 0 By 커피사유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곁들이는 등, 커피, 사유의 글 모음집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의 출처는 ‘본문’ 단락 밑 ‘출처’ 단락에 표시하였습니다.

본문

일러두기

이 포스트에서는 글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부분 발췌하여 인용하고 있음을 사전에 알립니다.

#1

구인광고를 보고 어느날 아침 젊은이 하나가 여름이라 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문간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고독. 그가 바틀비였다.

#2

바로 이런 자세로 나는 앉은 채로 그를 부르면서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 즉 분량이 얼마 안되는 서류를 나와 함께 검토하는 일을 – 신속하게 말했다. 바틀비가 자신의 구석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때 나의 놀라움, 아니 대경실색을 상상해보라.

나는 놀라서 어리벙벙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즉각 떠오른 생각은 내가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바틀비가 내 뜻을 완전히 오해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어조로 그 부탁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똑같이 선명한 어조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종전과 같은 대답이 들렸다.

“그렇게 안 하고 싶다니.” 나는 크게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가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무슨 소리야? 자네 미쳤어? 내가 여기 이 서류를 비교하게 도와달란 말이야 – 이거 받아” 하고는 그 서류를 그를 향해 디밀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꼼짝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여윈 얼굴은 태연했고 어둑한 잿빛 눈은 평온했다. 동요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의 거동에 조금이라도 불안, 분노, 초조, 혹은 불손의 빛이 있었더라면, 다시 말해서 약간이라도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무실에서 사정없이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케로 석고 흉상을 문밖으로 내쫓을 생각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가 필사를 계속하는 동안 잠시 그를 노려보고 서 있다가 내 책상에 다시 돌아와 앉았다. 이건 정말 이상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상책일까? 그러나 나는 일 때문에 바빴다. 그 문제는 당분간 덮어두었다가 나중에 한가할 때 생각하기로 결론지었다. 그래서 다른 방에서 니퍼즈를 불러 신속하게 서류를 검토했다.

#3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바틀비는 네 통의 긴 문서를 완성했다. 그것은 형평법 고등법원에서 일주일 동안 내가 받아낸 증언 네 통의 사본이었다. 그 서류들은 반드시 검토해야 했다. 중요한 소송인만큼 아주 정확한 기록이 절대 필요했다. 사전준비를 다 한 다음 네 통의 사본을 네 명의 직원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내가 원본을 읽을 요량으로 옆방에서 터키, 니퍼즈, 진저 넛을 불렀다. 이에 따라 터키, 니퍼즈, 진저 넛이 각자 손에 서류를 들고 열을 지어 앉았을 때, 나는 이 흥미로운 그룹에 동참하라고 바틀비를 불렀다.

“바틀비! 빨리, 기다리고 있잖아.”

카펫을 깔지 않은 바닥에 천천히 책상다리가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그가 자기 은신처 입구에 나타나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필사본, 필사본 말일세.” 내가 서둘러 말했다. “우린 필사본을 검토할 거야. 자, 여기.” 그러고는 그를 향해 네 번째 사본을 내밀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그는 칸막이 뒤쪽으로 점잖게 사라졌다.

잠시 동안 나는 소금기둥으로 변해, 줄지어 앉은 직원들 맨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칸막이 쪽으로 가서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거절하는 거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당장 무섭게 화를 내고 더이상 말로 하지 않고 그를 내 면전에서 굴욕적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바틀비에게는 묘하게 나의 적의를 가라앉힐 뿐 아니라 놀라운 방법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당황케 하는 면이 있었다. 나는 이치를 따지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검토하려는 건 바로 자네의 필사본이야. 한번의 검토로 네 개의 사본이 모두 처리될 테니까 자네 일을 덜어주는 것이야. 이건 일반적인 관례야. 필경사라면 누구나 자기 필사본을 검토하는 일에 일조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겠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대답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가 플루트 소리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바틀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내가 하는 발언을 구절구절 음미하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불가항력적인 결론을 부정할 수 없는 듯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최우선적인 고려사항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자넨 내 요청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한 거야? 일반적인 관례와 상식에 따라 한 요청을 말이야?”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내 추측이 맞다고 간단히 확인시켜주었다. 그랬다. 그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유례없이 극히 불합리한 방식으로 윽박지름을 당하면 가장 명백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말하자면 그 모든 정의와 이성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 상대방 편을 들고 있다는 추측을 어렴풋하게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현장에 있으면 동요하는 마음을 얼마간 다잡기 위해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게 된다.

“터키.” 나는 말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옳지 않은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선생님.” 터키가 유순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선생님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니퍼즈.” 나는 말했다. “자넨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녀석을 사무실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눈치빠른 독자는 오전이기 때문에 터키의 대답은 공손하고 차분한 어조로 표현된 반면 니퍼즈는 성마른 어조로 대답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혹은 앞서 나온 문장을 빌려 말하면, 니퍼즈의 험악한 심사가 발동중이고 터키의 그것은 꺼진 상태였다.)

“진저 넛.” 아무리 작은 지지표라도 내 편에 올리고 싶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니?”

“선생님, 제 생각에 저 아저씨는 살짝 머리가 돈 것 같아요.” 진저 넛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 동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고.” 칸막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내가 말했다. “나와서 자네 의무를 다하란 말이야.”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주 난감하여 한동안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하지만 또다시 바쁜 업무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다시 이 딜레마에 대한 숙고를 나중에 여가 날 때까지 미루기로 결정했다. 약간 수고스럽기는 했지만 우리는 바틀비 없이 서류 검토작업을 해냈다. 그렇지만 터키가 한두 장 넘길 때마다 이런 식의 진행은 완전히 관례에 어긋난다는 의견을 정중하게 비치는 반면 니퍼즈는 소화불량으로 인한 신경과민으로 의자에서 몸을 비틀어대고 이따금씩 이를 갈면서 칸막이 뒤쪽의 고집불통 멍청이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니퍼즈)로서는 돈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해주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편 바틀비는 자기만의 별난 업무 외에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듯 자기 은신처에 들어앉아 있었다.

#4

나는 문을 닫고 다시 바틀비에게로 갔다. 나는 내 자신의 운명을 재촉하고 싶은 유혹을 한층 더 느꼈다. 다시 반항의 대상이 되기를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결코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바틀비.” 내가 말했다. “진저 넛이 나가고 없어. 자네가 잠깐 우체국에 들려주겠나? (우체국은 걸어서 삼분 거리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나한테 우편물이 와 있는지 알아봐주겠나?”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안 가겠다는 말인가?”

“안 가고 싶습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내 책상으로 돌아왔고 거기 앉아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맹목적인 고집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 말라빠지고 땡전 한푼 없는 놈에게, 내가 고용한 종업원에게 나 자신이 굴욕스럽게 거부당하는 또다른 방법은 없을까? 무엇을 더 시키면 완벽하게 합리적인 일인데도 녀석이 틀림없이 거부할까?

“바틀비!”

대답이 없었다.

“바틀비.” 좀더 큰 소리였다.

대답이 없었다.

“바틀비.” 나는 포효했다.

세 번 주문을 외어 유령을 불러내는 마법에 응하듯 흡사 유령처럼 바틀비가 자기 은신처의 입구에 나타났다.

“옆방에 가서 니퍼즈한테 내가 부른다고 말해줘.”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는 공손히 천천히 말하고는 가만히 사라졌다.

“좋았어. 바틀비.” 나는 엄정하고 침착한 어조로 조용히 말함으로써 당장이라도 어떤 끔찍한 보복을 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내비쳤다. 그 순간에는 그런 유의 보복을 할 생각이 얼마쯤 있었다. 그러나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대체로 오늘은 심적인 당혹과 고민으로 상당히 고통을 당했으니 이만 모자를 쓰고 퇴근길에 오르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고, 들뜬 호기심으로 가득 찬 채 드디어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나는 열쇠를 꽂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틀비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고 칸막이 뒤쪽까지 들여다보았으나 그는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사무실 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니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바틀비가 내 사무실에서 먹고 입고 잠을 잤으며, 그것도 접시며 거울이며 침대도 없이 그렇게 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낡아빠진 소파의 쿠션에는 야윈 몸을 뉘였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책상 아래에는 똘똘 말아놓은 담요 한장이, 텅 빈 난로의 받침대 아래에는 검은 구두약 통과 구둣솔이, 의자 위에는 비누와 누더기 타월과 함께 양철 대야가, 신문지 속에는 생강빵 부스러기와 치즈 한조각이 있었다. 그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틀비가 이곳을 집으로 삼아 혼자서 독신생활을 해온 것이 부념ㅇ하구나. 그러자 즉각 바틀비의 의지가지없는 비참한 외로움이 여기서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의 가난고 가난이지만, 그의 고독은 얼마나 끔찍한가! 생각해보라. 일요일이면 월 가는 페트라처럼 인적이 끊기고, 매일 밤이면 텅 비어버린다. 이 건물 역시 평일에는 일과 활기로 법석대다가 해질 녘에는 완전히 공허한 울림을 주고 일요일 내내 버려진다. 그런데 바틀비는 여기에 거처를 마련하고 한때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곳에서 시름에 잠김 무고한 마리우스의 쇠락한 모습 같다고나 할까!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껏 나는 감미로운 슬픔밖에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어두운 우수로 끌어들였다. 형재애의 우수!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화사한 비단옷의 생기찬 얼굴들을 기억했다. 나들이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미시씨피 강 같은 브로드웨이를 백조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들을 나는 창백한 필경사와 대조했다. 우리는 세상이 명랑하다고 여기지만 불행은 멀찌감찌 숨어 있어서 우리가 불행이 없다고 여길 뿐이다. 이런 슬픈 공상들 – 분명 병들고 어리석은 두뇌가 낳은 망상들 – 은 바틀비의 기행과 관련된 좀더 특별한 다른 생각들로 이어졌다. 이상한 발견의 예감이 내 주위에 맴돌았다. 내게 그 필경사의 창백한 형체는 낯선 자들이 무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떨리는 수의에 감긴 채 입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6

이런 모든 사안을 곰곰 되새기고 그것을 그가 내 사무실을 자신의 변함없는 거처이자 집으로 삼고 있었다는 조금 전에 발견한 사실과 결합하면서 그의 병적인 우울증까지 염두에 두자, 요컨대 이 모든 사안에 두루 생각이 미치자 내게 슬그머니 신중해야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첫번째 감정은 순수한 우울과 진지하기 그지없는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 바틀비의 절망적인 고독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바로 그 우울감이 공포로, 연민의 반발로 바뀌었다. 비참한 모습을 생각하거나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최상의 애정이 우러나오지만, 특별한 경우 그 정도를 넘어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며, 너무 섬뜩한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란 어김없이 인간 마음의 타고난 이기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차라리 과도한 기질적 질환은 치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에게 연민은 고통이 아닌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그런 연민으로는 효과적인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지각이 마침내 생기면 상식에 따라 영혼은 연민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날 아침 목격한 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필경사가 선천적인 불치병의 희생자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육신에 자선을 베풀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육신이 아니다. 아픔을 겪는 것은 그의 영혼인데, 그 영혼에는 내 손이 미치지 않는다.

#7

다시금 나는 어찌해야 할지 되새기면서 앉아 있었다. 바틀비의 행동에 모멸감을 느꼈고 그를 해고하기로 이미 결심하고서 사무실에 들어섰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뭔가 미신적인 것이 심장을 두드려 나로 하여금 그 결심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고, 만약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이 사람에게 감히 쓰라린 말을 한마디만 벙긋하면 나를 나쁜 놈이라고 비난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그의 칸막이 뒤쪽으로 내 의자를 친근하게 끌어다 앉으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바틀비. 그렇다면 자네 이력을 밝히는 건 신경쓰지 말게. 하지만 친구로서 간청하건대 가능한 한 이 사무실의 관례에 따라주길 바라. 내일이나 모레나 서류 검토를 돕겠다고 지금 말해줘. 간단히 말해서 하루이틀 후에는 자네가 좀 합리적으로 될 거라고 지금 말해줘. 그렇게 하겠다고 해줘. 바틀비.”

“현재로선 좀 합리적으로 안되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송장처럼 창백한 그의 답변이었다.

바로 그때 접문이 열리더니 니퍼즈가 다가왔다. 그는 보통때보다 심한 소화불량으로 유별나게 밤잠을 설친 탓에 고통스러운 듯했다. 그는 바틀비의 마지막 말을 엿들은 것이다.

“뭐, 안 하고 싶다고?” 니퍼즈가 이를 갈아대듯 말했다. “제가 선생님이라면 녀석이 하고 싶도록 만들겠어요.” 그가 나에게 말했다. “저는 녀석이 하고 싶게 만들테고, 하고 싶은 것을 주겠어요. 고집불통의 나귀 같은 녀석! 선생님, 이번에 녀석이 안 하고 싶은 건 대체 뭔가요?”

바틀비는 손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니퍼즈 씨.” 내가 말했다. “당신은 당분간 물러나 있었으면 싶어.”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 나는 이 ‘싶다’라는 단어를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도 무심결에 사용하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바틀비와 접촉함으로써 내가 정신적인 면에서 이미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몸이 떨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어떤 이상증세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우려는 나로 하여금 즉결조치를 취하도록 결정하는 효과가 없지 않았다.

니퍼즈가 아주 심술궂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나가자 터키가 온화하고 공손하게 다가왔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선생님.” 그가 말했다. “어제 내가 여기 바틀비 생각을 해봤는데요, 만약 그가 매일 좋은 맥주 1리터 정도만 마시고 싶어하기만 하면 버릇을 고쳐서 자기 서류 검토작업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자네 역시 그 단어에 전염되었군.” 내가 약간 흥분하며 말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선생님, 무슨 단어 말씀입니까?” 하고 터키가 물으면서 칸막이 뒤의 좁아터진 공간으로 공손히 밀고 들어왔고 그 바람에 나는 바틀비를 떠미는 꼴이 되었다. “무슨 단어 말씀입니까, 선생님?”

“여기에 혼자 있고 싶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데 기분이 상한 듯 바틀비가 말했다.

“터기, 저게 그 단어야.” 내가 말했다. “바로 저거라고.”

“아. ‘싶다’라는 단어? 아 맞아요 – 이상한 단어지요. 나 자신은 그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드렸듯이 만약 그가 마시고 싶어하기만 한다면 -“

“터키.” 내가 말을 끊었다. “자넨 제발 물러나게.”

“내가 물러났으면 싶으시다면, 아 물론이죠, 선생님.”

터키가 물러나기 위해 접문을 열었을 때 니퍼즈가 자기 책상에서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내가 어떤 서류를 푸른 종이와 하얀 종이 중 어느쪽에 필사했으면 싶은지 물었다. 그는 ‘싶다’라는 단어를 조금도 짓궃은 억양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단어가 그의 입에서 무심결에 나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나 자신과 직원들의 머리는 아닐지라도 입을 이미 상당 정도 변질시킨 이 미친 사람을 확실히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즉시 해고를 공표하지 않는 것이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8

또 며칠이 지나갔다. 바틀비의 눈이 나아졌는지 어떤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외관성 어느 모로 보나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아졌는지 묻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더 이상 필사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끈질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마침내 그는 필사를 영원히 그만두었음을 알려주었다.

“뭐라고!” 내가 소리쳤다. “자네 눈이 완치되면 – 전에 없이 좋아지면 – 그때도 필사를 하지 않을 건가?”

“필사를 포기했어요” 하고 대답하고는 그는 슬그머니 옆으로 빠졌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내 사무실의 붙박이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아니 – 그게 가능하다면 – 그는 전보다 더욱더 붙박이가 되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무실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가 왜 거기 남아 있어야 하는가? 그는 이제 목걸이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짊어지자니 괴로운 연자맷돌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딱했다. 그 때문에 이따금 내가 거북해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진실은 아니다. 그가 친척이나 친구 이름을 하나라도 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당장 편지를 써서 이 불쌍한 친구를 어디든 편한 은신처로 데려가달라고 신신당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인 듯, 온 우주에서 완전히 혼자인 듯했다. 대서양 한가운데 떠 있는 난파선의 잔해 조각이랄까. 하지만 결국에는 내 업무와 관련된 필요사항이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더 시급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점잖게 바틀비에게 6일 내에 무조건 사무실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 사이에 다른 거처를 구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쪽에서 이사갈 채비를 시작하면 내가 다른 거처를 구하는 일을 돕겠다고도 제안했다. “그리고 바틀비, 자네가 마침내 나를 떠날 때 완전히 빈털터리로 가게 하지는 않겠네. 이 시간부터 6일 이내라는 것을 명심하게”라고 덧붙였다.

그 기간이 만료되어 내가 칸막이 뒤를 들여다보니, 이런! 바틀비가 거기 있었다.

나는 외투 단추를 꼭 잠그고 몸의 균형을 잡고 천천히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건드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됐어. 자네는 이곳을 떠나야 해. 딱하긴 하네만, 여기 돈이 있어. 하지만 자넨 가야 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그가 여전히 내게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자넨 가야 한다니까.

그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그당시 나는 이 사람이 늘 보여주는 정직성에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부주의하게 바닥에 떨어뜨린 6페니나 1실링짜리를 내게 자주 돌려주었다. 나는 그런 푼돈의 문제에서는 매우 칠칠지 못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다음에 나온 조처는 터무니없게 여길 일이 아니다.

“바틀비.” 내가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지불할 급료가 12달러인데, 여기 32달러가 있네. 여분의 20달러는 자네 것이야. 이거 받을 텐가?” 하고 나는 그를 향해 지폐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돈은 여기에다 놓아둘게” 하고 돈을 책상 위에 놓고 문진으로 눌러두었다. 그런 다음 모자와 지팡이를 가지고 문으로 간 나는 차분하게 돌아서서 이렇게 덧붙였다. “바틀비, 이 사무실에서 자네 물건을 옮긴 다음에 자네는 물론 문을 잠가야 하겠지 – 자네 외에 모든 사람들이 그때는 퇴근했을 테니까 – 그런데 미안하지만 자네 열쇠를 문 앞의 깔개 아래에 살짝 넣어놓으면 내가 아침에 찾을 수 있겠어. 난 다시는 자네를 보지 못할 거야. 그러니 잘 가게. 이제부터 자네의 새 거처에서 내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편지로 꼭 알려주게. 바틀비, 안녕, 잘 가게.”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폐허가 된 사원의 마지막 기둥처럼 그는 그가 아니라면 텅 비었을 방의 한복판에 말없이 고독하게 서 있었다.

#9

생각에 잠겨 집으로 걸어가다보니 내 속의 허영심이 동정심을 눌렀다. 바틀비를 제거하는 나 자신의 고수다운 처리솜씨를 무척 대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걸 고수답다고 일컫는데, 냉정한 사유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내 일처리 방식의 미덕은 그 완벽한 조용함에 있는 듯했다. 천박하게 윽박지른다든지 어떤 식이든 허세를 부린다든지 성질내고 소리지르며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바틀비에게 거지 같은 짐을 싸가지고 당장 나가라며 격한 명령을 마구 내뱉는 일은 없었다. 그런 종류의 일은 전혀 없었다. 바틀비에게 큰 소리로 떠나라고 명령하지 않고 – 하수라면 그랬을 테지만 – 나는 그가 떠나야 하는 근거를 가정했고 그 가정 위에 내가 할 말들을 모두 구축했다. 내 일처리 방식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 더욱 매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깨어나자마자 나는 의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잠자는 사이에 허영의 기운이 빠져버린 것이다. 사람이 가장 냉정하고 현명해지는 시간 중 하나는 아침에 깨어난 직후이다. 내 일처리 방식은 변함없이 현명해 보였으나 오로지 이론상으로만 그랬다.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 것으로 판명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바틀비가 떠날 것이라는 가정은 참으로 절묘한 생각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 가정은 나의 가정일 뿐 바틀비의 가정은 전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그가 나를 떠날 것이라고 내가 가정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하고 싶으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그는 가정대로 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10

“바틀비.” 사무실로 들어서며 나는 조용하고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심히 불쾌해. 바틀비, 내 마음이 아프다고. 자네를 훨씬 좋게 보았는데. 자네가 신사다운 됨됨이를 지니고 있어서 어떤 미묘한 곤경에 처해 있어도 약간의 암시면,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가정이면 족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나 내가 잘못 본 것 같아. 아니,” 나는 진정으로 놀라면서 내가 전날 저녁에 놓아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돈을 가리키며 “아직 돈에 손도 대지 않았군”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떠날 건가, 안 떠날 건가?” 나는 불끈 화를 내면서 그에게 바싹 다가가서 다그쳤다.

“당신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가 ‘‘이라는 단어에 부드러운 강세를 넣으며 대답했다.

“도대체 자네가 무슨 권리로 여기 머물겠다는 건가? 집세라도 내는가? 세금이라도 내는가? 아니면 이 사무실이 자네 건가?”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필사할 각오가 된 건가? 눈은 나았어? 오늘 아침에 간단한 서류 하나를 필사해주겠나? 아니면 몇구절 대조 검토하는 것을 돕겠어? 아니면 우체국에 잠깐 다녀오겠어? 한마디로 이 사무실을 떠나지 않겠다는 자네의 거절에 그럴듯한 구실이 될 만한 어떤 일이라도 하겠어?”

그는 말없이 자기 은신처로 물러났다.

#11

그러나 아담처럼 원초적인 이 노여움이라는 놈이 내 속에서 솟아올라 바틀비와 관련하여 나를 유혹할 때 나는 그놈을 꽉 붙잡아 내동댕이쳤다. 어떻게 그랬느냐고? 글쎄, 그냥 신성한 금지명령, 즉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를 사랑하라”라는 구절을 상기했을 뿐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 나를 구한 것이다. 고매한 사상이라는 점을 접어두더라도 자선은 종종 대단히 현명하고 신중한 원리로 작동하며, 자선을 베푸는 사람에게 근사한 안전장치가 된다. 사람들은 질투 때문에 살인죄를 범해왔다. 또 노여움 때문에, 증오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교만한 마음 때문에도 범해왔다. 하지만 다정한 자선 때문에 악마의 소행인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고상한 동기를 거론할 것도 없이, 단순히 자기이익을 위해서라도 모든 사람은, 특히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자선과 박애를 행할 만하다. 어쨌거나 지금 이 문제의 경우에 나는 바틀비의 행위를 호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필경사에 대한 나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불쌍한 녀석, 불쌍한 녀석! 하고 나는 생각했다. 녀석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며, 게다가 녀석은 어려운 시절을 겪었으니 잘 대해줘야지.

#12

이런 빗발치는 말들에 대경실색하여 나는 뒤로 물러났고 새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싶었다. 바틀비가 어느 누구와 상관없듯이 나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줄기차게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바틀비와 관련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사람이라며 나를 심하게 문책했다. 게다가 (그곳에 와 있는 한 사람이 어렴풋이 위협했듯이) 신문에 나올까 두려웠던 나는 그 문제를 숙고했고, 만약 그 변호사가 내게 자기 (그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바틀비와 은밀한 면담을 갖도록 주선해준다면 그날 오후 그들이 불평한 그 골칫거리 존재를 그들로부터 떼어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말했다.

예전의 사무실 계단을 올라가니 바틀비가 층계참의 계단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바틀비,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난간에 앉아 있어요.” 그가 유순하게 대답했다.

나는 몸짓으로 그를 그 변호사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고, 그러자 변호사는 우리를 남겨두고 나갔다.

“바틀비.” 내가 말했다. “사무실에서 해고된 뒤 건물 현관을 계속 점유함으로써 자네가 나한테 크나큰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대답이 없었다.

“이제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어. 자네가 무슨 조치를 취하든지 아니면 자네에게 무슨 조치가 취해지든지. 그런데 어떤 종류의 일에 종사하고 싶나? 어딘가에 취직해서 다시 필사일을 하고 싶나?”

“아니요, 나는 어떤 변화도 안 겪고 싶습니다.”

“포목상 점원 일은 어떤가?”

“그 일은 너무 틀어박혀 있어서요. 싫어요. 점원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까다로운 것은 아니에요.”

“너무 틀어박혀 있다니,” 하고 내가 소리쳤다. “아니 자네는 계속 틀어박혀 있잖아!”

“점원 자리는 안 택하고 싶습니다.” 그는 마치 그 작은 사안을 즉각 매듭지으려는 듯이 대꾸했다.

“바텐더 일은 자네 마음에 맞을 것 같나? 그 일은 눈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아.”

“그 일은 전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내가 까다로운 것은 아니에요.”

그가 이례적으로 말을 많이 해서 나는 고무되었다. 나는 다시 공략했다.

“좋아. 그렇다면 상인들 대신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수금하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러면 건강이 나아질 거야.”

“아니요.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대화로써 젊은 신사를 즐겁게 해주는 말동무 자격으로 유럽에 가는 것은 어떻겠어, 그건 자네 마음에 들겠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 일에는 조금도 확실한 면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붙박이 일이 좋아요. 하지만 내가 까다로운 것은 아니에요.”

“그럼 붙박여 있어.” 나는 여기서 참을성을 잃고 소리쳤고, 나와 그 사이의 그 모든 분통 터지는 접촉 중에서 처음으로 상당히 화를 냈다. “밤이 되기 전에 자네가 이 건물에서 나가지 않으면, 내가 이 건물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 아니, 바로 내가 떠- 떠- 떠나야만 한다고!” 나는 요지부동의 그를 순응시키려면 어떤 위협으로 겁줘야 할지 알지 못해서 상당히 어정쩡하게 말을 맺었다. 더이상의 노력을 모두 단념하고 다급하게 그를 떠나려 했는데 그때 최종적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전에 한번도 품어보지 않은 생각은 아니었다.

“바틀비.” 그런 흥분되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내가 말했다. “지금 나랑 함께 집으로 – 내 사무실이 아니라 내 숙소로 – 가지 않겠나? 그리고 거기 머물면서 우리가 한가한 때에 함께 자네 문제를 편리하게 조정하여 처리할 수 없을까? 자, 지금, 당장 함께 가자고.”

“아니요. 지금은 어떤 변화도 안 겪고 싶습니다.”

#13

사무실에 다시 나왔을 때 건물 주인한테서 온 쪽지가 내 책상에 보란듯이 놓여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쪽지를 펼쳤다. 읽어보니 쪽지를 쓴 이가 경찰에 사람을 보내어 바틀비를 부랑자로 툼즈 구치소에 잡아가게 했다는 것을 내게 통지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내가 누구보다 바틀비에 대해 알고 있으니 툼즈에 출두해서 사실을 적절하게 진술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기별은 내게 상반되는 효과를 끼쳤다. 처음에 나는 분개했으나 마침내는 찬동하다시피 했다. 건물 주인은 열성적이고 성질이 급해서 나라면 결코 택하지 않았을 그런 일처리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방편으로서는 그런 특이한 상황에서 그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듯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불쌍한 필경사는 자신이 툼즈로 호송된다는 말을 듣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그 특유의 창백하고 무감한 방식으로 묵묵히 따랐다.

인정 많고 호기심어린 구경꾼 몇몇이 일행에 가담했고 바틀비와 팔짱을 낀 경관 중의 하나가 앞장서는 가운데 그 말없는 행렬은 정오의 떠들썩한 통행로의 그 모든 소음과 열기와 환희를 헤치며 줄지어 나아갔다.

쪽지를 받은 바로 그날 나는 툼즈에,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법무청사에 갔다. 담당 교도관을 찾아서 방문한 목적을 진술하니 내가 묘사한 인물이 정말 안에 있다고 통고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관리에게 바틀비가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괴짜일지라도 진짜로 정직한 사람이며 대단히 불쌍한 사람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아는 바를 모두 털어놓았으며 그를 가두어놓되 가능한 한 관대하게 대우하다가 뭔가 덜 가혹한 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제안하면서 말을 맺었다. 사실은 덜 가혹한 조치가 어떤 것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든 다른 대책을 취할 수 없다면 구빈원에서 그를 맡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면회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4

필경사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묵묵히 따랐다. 그리고 사식업자의 이름을 묻고 그와 함께 바틀비에게 다가갔다.

“바틀비, 이 사람은 커틀릿스 씨야. 자네한테 매우 유용한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당신의 하인입니다, 나리. 당신 하인이에요.” 앞치마 차림의 사식업자가 깊이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여기가 마음에 들기 바랍니다, 나리. 좋은 뜰에 – 서늘한 방들이 있으니 – 여기서 한동안 우리와 함께 머무셨으면 합니다 – 기분좋게 지내십시오. 제 아내와 제가 나리의 식사를 아내의 내실에서 시중들어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식사를 안 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돌리며 바틀비가 말했다. “내 속에 맞지 않을 겁니다. 나는 정찬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안뜰의 맞은편으로 서서히 이동해서 막힌 벽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놀라서 나를 노려보며 사식업자가 말했다. “저 사람 좀 이상하네요?”

“정신이 약간 나간 것 같아요.” 나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15

그로부텨 며칠 뒤 나는 다시 툼즈 구치소의 출입을 허락받아 바틀비를 찾으러 복도를 죽 돌아다녔으나 그를 찾지 못했다.

“그가 조금 전에 감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소.” 한 교도관이 말했다. “어쩌면 안뜰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거요.”

그래서 나는 그쪽으로 갔다.

“그 말없는 사람을 찾고 있소?” 또다른 교도관이 내 곁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저쪽에 누워 있소. 저쪽 안뜰에 잠들어 있소. 눕는 것을 본지 이십분도 안되었소.”

안뜰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곳은 일반 죄수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주위를 에워싼 엄청나게 두꺼운 벽들은 모든 소음을 막아주었다. 이집트 양식의 석조물들이 그 침울함으로 나를 짓눌렀다. 그러나 발아래에 부드러운 잔디가 틈새를 비집고 자라났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피라미드 속에서 새들이 쪼개진 틈새에 떨어뜨린 잔디씨앗이 어떤 이상한 마법에 의해 싹이 튼 것 같았다.

나는 벽의 아랫부분에 묘하게 움츠린 자세로 있는 소진된 모습의 바틀비를 보았다. 무릎을 웅크리고 차가운 돌에 머리를 갖다댄 채 모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그에게 바싹 다가가서 몸을 구부렸고 그의 침침한 눈이 감겨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뭔가가 그를 만져보라고 재촉했다. 그의 손을 만지는 순간 저릿저릿한 전율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가 척추를 타고 발까지 내려갔다.

그때 사식업자의 둥근 얼굴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식사가 준비되었어요. 그는 오늘도 식사를 안할 건가요? 아니면 식사도 않고 사는 사람입니까?”

“식사를 하지 않고 살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는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어라! 잠들었네요?”

“제왕과 만조백관과 함께 잠들었소.” 내가 중얼거렸다.

#16

이 이야기를 더 진행할 필요가 거의 없어 보인다. 불쌍한 바틀비의 매장과 관련된 얼마 안되는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와 헤어지기 전에, 이런 말은 하고 싶다. 이 짧은 이야기로 말미암아 바틀비가 누구인지 그리고 본 화자가 그를 알기 전에 그가 어떤 종류의 삶을 영위했는지 호기심이 생길 만큼 독자가 흥미를 갖게 되었다면 나 역시 그런 호기심을 충분히 갖고 있되 전혀 충족시킬 수 없다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라고. 다만 여기서 필경사의 죽음 후 몇개월 만에 내 귀에 들어온 한가지 사소한 소문을 밝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 소문의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지도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모호한 소문이 애처롭기 그지없긴 해도 내게 얼마간 흥미로운 암시도 없지 않은만큼 다른 몇몇 사람의 경우에도 알고 보면 마찬가질 수 있겠으니,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그 소문은 이렇다. 즉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의 말단 직원이었는데, 행정부의 물갈이로 갑자기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곰곰이 생각할 때면 나를 사로잡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배달 불능 편지라니! 죽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천성적으로 혹은 불운에 대해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이 배달 불능 편지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분류해서 태우는 것보다 그 창백한 절망을 깊게 하는 데 더 안성맞춤인 일이 있을까? 그 편지들은 매년 대량으로 소각되었다. 때때로 창백한 직원은 접힌 편지지 속에서 반지를 꺼내는데, 반지의 임자가 되어야 했을 그 손가락은 어쩌면 무덤 속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또한 자선헌금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보낸 지폐 한장을 꺼내지만 그 돈이 구제할 사람은 이제 먹을 수도 배고픔을 느낄 수도 없다. 그리고 뒤늦게 용서를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절망하면서 죽었고, 희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구제되지 못한 재난에 질식당해 죽어버린 것이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한 것이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추가 인용 (2021. 5. 24. ‘문학과 철학의 대화’ 수업 이후)

#1′

“안 갔어!” 한참 만에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불가해한 필경사가 내게 행사하고 내가 아무리 안달해도 완전히 피할 수 없는 불가의한 권위에 다시 복종하면서,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그 구역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이 금시초문의 황당한 일을 당하여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실제로 완력을 행사해서 그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심한 욕을 해서 그를 몰아내는 방법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을 불러들이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나에 대해 송장 같은 승리를 누리게 두는 것, 이 또한 나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면 내가 이 문제에서 가정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을까? 그래, 전에 내가 미래를 내다보며 바틀비가 떠날 거라고 가정했듯이 이제 과거를 돌아보며 그가 이미 떠났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가정을 정당하게 실행하는 일환으로 황급히 사무실에 뛰어들어가, 바틀비가 마치 공기인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 척하면서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거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단연 정곡을 찌르는 듯했다. 바틀비도 이런 식으로 가정의 원칙을 적용당하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계획이 성공할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나는 다시 한번 그를 상대로 철저히 문제를 따지기로 결심했다.

#2′

바틀비에게 큰 소리로 떠나라고 명령하지 않고 – 하수라면 그랬을 테지만 – 나는 그가 떠나야 하는 근거를 가정했고 그 가정 위에 내가 할 말들을 모두 구축했다. 내 일처리 방식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 더욱 매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깨어나자마자 나는 의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잠자는 사이에 허영의 기운이 빠져버린 것이다. 사람이 가장 냉정해지고 현명해지는 시간 중 하나는 아침에 깨어난 직후이다. 내 일처리 방식은 변함없이 현명해 보였으나 오로지 이론상으로만 그랬다.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 것으로 판명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바틀비가 떠날 것이라는 가정은 참으로 절묘한 생각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 가정은 나의 가정일 뿐 바틀비의 가정은 전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그가 나를 떠날 것이라고 내가 가정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하고 싶으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그는 가정대로 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3′

수동적 저항만큼 성실한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없다. 만약 그런 저항을 당한 사람이 몰인정하지 않은 기질이고 또 저항하는 사람이 수동성의 면에서 전혀 악의가 없다면, 그렇다면 전자는 기분이 좋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명되는 것을 자신의 상상력으로는 관대하게 해석하려고 애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확히 그런 식으로 나는 바틀비와 그의 습성을 주시했다. 불쌍한 녀석! 하고 나는 생각했다. 녀석은 해를 끼칠 뜻은 없어. 오만하게 굴려는 의도는 없는 게 분명해. 녀석의 얼굴을 보면 녀석의 기행이 본의가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드러나지. 녀석은 내게 유용해. 난 녀석과 잘 지낼 수 있어. 만일 녀석을 내쫓는다면 십중팔구 녀석은 나보다 까다로운 고용주한테 걸려들어 거친 대접을 받고 아마 비참하게 쫓겨나 굶어죽게 될 거야. 그래. 여기서 나는 감미로운 자기긍정을 값싸게 손에 넣을 수 있어. 바틀비와 정답게 지내며 녀석의 기묘한 고집을 너그럽게 봐주더라도 내게는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는 반면 언젠가는 양심의 감미로운 양식이 될 만한 것을 내 영혼에 비축하게 되는 거야. 그러나 내가 변함없이 이런 기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바틀비의 수동성이 가끔 나를 짜증나게 했다. 나는 그와 새로운 적대관계로 맞섬으로써 그에게서 내 화에 상응하는 어떤 불같은 화를 촉발시키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사실은 차라리 윈저 비누 조각을 손가락 마디로 쳐서 불을 지피려고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출처

허먼 멜빌 et al. (2010). 필경사 바틀비 –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 미국편 (한기욱 역). 창비. pp. 49-102.

주석

현재 이 글을 읽고 난 뒤에 드는 몇 가지 생각이 있다. 대체로 그러한 생각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틀비가 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거부’라는 태도와 매우 밀접해 있는 것들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 ‘거부’의 의미를 밝히려는 시도라고도 갈음해둘 수 있겠으나, 다만 아직 이들을 기록해두는 때에 이 글에 대한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의 강의가 끝나지 않은 것도 있으며 아직 나의 생각이 몇몇 작품의 내용과 모순되는 점도 있으므로, 주석이나 견해 표현을 잠깐 보류해두기로 한다.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여기 밑에 비로소 주석을 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