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19.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 1 –

잠시, 멈춤 #19.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 1 –

2021-05-30 0 By 커피사유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곁들이는 등, 커피, 사유의 글 모음집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의 출처는 ‘본문’ 단락 가장 밑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본문

이 포스트에서는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중 필자가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만을 부분 발췌하여 인용함을 서두에 밝힙니다.

#1

“저… 양 한 마리를 그려주세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게 되면 누구나 상황에 순응하기 마련이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것이라 여기면서도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꺼냈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것은 지리학, 역사, 산수와 문법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 조그마한 녀석에게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양 한 마리를 그려줘요.”

양이라곤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자주 그리던 두 가지 그림 중 하나를 그려주었다. 보아구렁이의 겉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아니에요. 나는 뱃속에 코끼리가 든 보아구렁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거든요. 나한테 필요한 것은 양이라고요. 양을 그려주세요.”

그래서 나는 양을 그렸다. 그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 이 양은 벌써 병이 들었는걸요. 다른 양을 그려주세요.”

나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

“이건, 양이 아니라 염소네요. 뿔이 있잖아요.”

나는 또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역시 퇴짜를 맞았다.

“너무 늙었네요. 난 오래 살 수 있는 양을 갖고 싶어요.”

이제, 내 인내심도 바닥이다. 고장난 엔진을 분해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려놓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어.”

나는 내 어린 심판관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음.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에요! 이 양에게는 풀을 많이 줘야 하나요? 내가 사는 곳은 모든 것이 아주 작거든요.”

“거기 있는 것으로 충분할거야. 너에게 준 건 아주 작은 양이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음… 그렇게 작은 것은 아닌데요. 보세요, 잠이 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2

나는 어린 왕자가 떠나온 별이 소행성 B612호라고 생각한다. 1909년 터키 천문학자가 이 소행성을 망원경으로 딱 한 번 관측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국제 천문학회에서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훌륭하게 증명해보았는데, 터키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천문학자는 1920년 멋진 옷을 입고 그의 발견을 다시 설명했다. 이번에는 모두 그의 보고를 받아들였다.

내가 소행성 B612호에 대하여 이렇게 자세히 알고, 또 적어둔 이유는 어른들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만약 여러분이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매우 예쁜 집을 봤어요 –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차라리, 2만 달러짜리 집을 봤어요 – 라고 말하는게 낫다. 어린 왕자는 매력적이었고, 웃었으며 양 한 마리를 가지고 싶어 했어.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야 – 라고 말한들, 어른들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소행성 B612호에서 왔어 – 라고 말한다면 어른들은 이내 수긍할 것이다.

내 친구가 양을 데리고 떠난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그를 묘사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 내가 그를 잊는다면, 나 역시 숫자 이외의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어른들처럼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림 물감 한 상자와 연필을 샀다. 여섯 살 이후로 그 어떤 그림도 그려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나이에 다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잘 될지 모르겠다. 다만, 최선을 다해 그려보겠다.

#3

닷새 째 되는 날, 어린 왕자의 비밀을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곰곰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가 물었다.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면 꽃도 먹겠네요?”

“응, 양은 닥치는 대로 먹지.”

“가시가 있는 꽃도요?”

“응. 가시가 있는 꽃도 먹고 말구.”

“그럼, 가시는 있으나 마나겠네요.”

그때 나는, 엔진에 꽉 조여 있는 나사를 빼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행기의 고장이 심각해보였고, 먹을 물까지 떨어지고 있어 불안했다.

“가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어린 왕자는 일단 질문을 시작하면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나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가시는 말이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꽃들이 공연히 심술 부리는 거야.”

어린 왕자는 원망스럽다는 듯 나에게 쏘아붙였다.

“그렇지 않아요. 꽃들은 연약하고 순진해요. 꽃들은 가능한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거라고요.”

그 순간에도 나는 이 나사가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망치로 부숴버려야지 –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아저씨는 정말로 꽃들이…….”

“그만, 그만해. 나는 그냥 되는 대로 대답했을 뿐이야. 봐, 나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아?”

“중요한 일이라뇨?”

그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망치를 손에 들고, 손가락은 검은 기름투성이인채, 흉측스러운 물체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내 모습을.

“아저씨는… 어른들처럼 말하는군요. 아저씨는… 모든 걸 뒤섞고 있어요. 모든 걸 혼동하고 있다고요.”

그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얼굴이 붉은 신사가 사는 별을 알아요. 그는 꽃향기를 맡아본 적도 없고, 별을 바라본 적도 없고, 누구를 사랑해본 일도 없어요. 오로지 숫자만 더하면서 살았죠. 아저씨처럼, 나는 중요한 일로 바빠! – 그러면서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는 사람이 아니에요. 버섯이에요, 버섯이라고요!”

어린 왕자는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백만년 전부터 꽃들은 가시를 만들어왔어요. 양도 수백만년 전부터 꽃을 먹어왔고요. 그런데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시를 꽃들이 왜 만들어내었는지 이해하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건, 얼굴이 붉은 신사가 하는 계산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내 꽃을… 어느 날, 작은 양이 무심코 먹어버릴 수 있다는게,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요?”

어린 왕자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만약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수백만 개의 별에 자라고 있는 단 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거에요. 그 사람은, 내 꽃은 어딘가에 있겠지 – 하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양이 그 꽃을 먹어버린다면, 모든 별들이 어두워질 거에요. 그런데도,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요?”

어린 왕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흐느끼느라 목이 메였던 것이다. 밤이었다. 나는 손에서 연장을 놓았다. 지금 이 순간 망치나 나사, 갈증이나 죽음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어떤 별, 어떤 행성, 나의 별, 이 지구 위에 내가 위로해야 할 어린 왕자가 있었다. 나는 두 팔로 그를 부둥켜안고 조용히 달래면서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꽃은 위험하지 않아. 너의 양에게 씌울 입마개를 그려줄게. 네 꽃을 둘러쌀 울타리도 그려줄 거야.”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출처

세계 단편 소설 40 中 “어린 왕자”. 앙트한 생텍쥐페리. 리베르 출판사.

주석

기말고사를 맞이하여 문득 서울로 상경하는 김에, 나는 문득 오디오북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의 발차 시각이 오후 2시이기도 해서, 약 4시간에 걸쳐 올라가는 길에 잠이 들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문득 그래도 상경(上京)의 시간을 조금 더 의미있게, 그리고 그 동안 덧없이 게을렀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동시에 의지를 다지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디오북을 듣게 되었는데, 나의 선택은 다름아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유튜브에서 ‘따듯한 목소리 현준’이라는 사람이 낭독한 2시간 가량의 어린왕자 오디오북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므로, 나는 그 오디오북을 휴대전화에 담아 틀었다.

https://youtu.be/xnPB6niAA40
따듯한 목소리 현준. 어린 왕자 오디오북 (2 hours)

그러나 나는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무언가 적어두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이는 문장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 왕자는 예전에도 읽고 또 읽어본 적이 있었으며, 또한 지금 다시금 – 아마 10번도 넘게 다시금 문장들을 되짚어보고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는 느낌을 또 다시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들어가면서 뭔가 잠시 멈추어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적어두느라 2시간동안 솔직하게 오디오북을 다 듣기는 커녕, 30분 가량의 1/4 정도의 분량 밖에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적어둔 위의 문장들을 보았을 때에, 나 자신이 최근 대학에 입학한 이후 일정에 쫓겨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앞으로의 3번 더 이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내가 무엇을 놓쳤는가를 다시 확인해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근래 들어 나는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굳이 이 오디오북을 듣지 않아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 공허한 느낌 때문에 나는 종종 일을 시작할 의욕이나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렇게 미루어진 일들은 이제 나의 발목을 조금씩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무엇을 내가 잊어버리고 있는가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해줄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나는 어디론가 혼자 혹은 누구 한 명과 같이 먼 곳, 이를테면 해외나 바다 등으로 조용한 배낭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이 한창인 지금 그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생텍쥐페리의 이야기가 지금 나 자신이 무언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발견하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약 1/4의 분량을 들은 나에게 드는 생각이란 나도 ‘어른처럼’ 숫자만 더하고 빼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의 눈 앞의 과제와 당위에 쫓겨가면서 숫자를 빼고 더하며, 레포트 위에 글자를 빼고 더하는 것이 최근이 일상이었기에 나는 어쩌면 내 안에 잠재된 어린 왕자가 이제 그만해 – 하며 나를 가로 막아, 당장의 엔진에서 나사를 빼야 하는 비행사인 나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하는 순간적인 연상이 지금 나를 스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하므로 나는 생텍쥐페리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잊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잊어버렸기에, 무엇이 결손된 자이기에 나는 왜 무기력해지는가, 그리고 어린 왕자가 나에게 속삭이는 듯한 그 희미한 목소리의 정확하게 발음된 문장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지, 나에게는 당장 당면한 기말고사가 더욱 급한 과제로 다가온다. 일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겠지만, 잘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싶음이 중요한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