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리학적으로서의 우울, 그리고 나
일반적으로 분석 주체가 분석가를 찾아오는 경우는 그들의 삶에 위기(윤희중의 ‘실패’)가 닥쳤을 때이다. 그 위기 혹은 실패를 돌파하고 새 출발하기 위해서 분석 주체가 문제의 원인을 알고 싶어할 것이라는 점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기를 원할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분석이 시작된 뒤 그들이 자기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싶다고 말할 때 그들의 무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알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다. 윤희중이 “하여튼 무언가”라고 말할 때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싶지는 않다’는 욕망에 이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알고 싶어하지 않는 주체(윤희중)은 왜 분석가(무진)을 찾는가? 여기에 또하나의 역설이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증상을 치료하는 것 역시도 원하지 않는다. 분석주체가 증상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할 때에도 실상 그들은 자신의 증상으로부터 어떤 만족을 얻고 있다. 그들은 증상을 향유(jouissance)한다. 그들이 분석가를 찾아오는 것은 그 만족 혹은 향유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이고,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것은 단지 증상이 그들에게 다시 예전의 만족을 제공해줄 수 있게 되는 것일 뿐이다. 김승옥이 애초에 던졌던 질문인 “왜 나는 서울에서 실패하면 꼭 고향을 찾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신분석학이 해줄 수 있는 일차적인 대답은 “당신은 서울에서 증상의 향유에 문제가 생겼을 때 무진으로 가는 것이고, 당신이 무진에 가는 것을 통해 원하는 것은 증상의 치료가 아니라 증상이 다시 원활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가 될 것이다.
신형철. “수음하는 오디세우스, 노래하는 세이렌” 中.
나는 최근 들어 몸 전체에 도지는 각종 무기력증과 우울을 이겨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우울과 무기력증이 나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처치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들의 병리학적인 측면을 검토하려는 것인지 정확한 의도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찌하였든 나는 그 노력의 일환으로서 2명의 심리 상담사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 심리 상담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어제 읽은 위 글은 나의 심리 상담의 목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고,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한 한 가지 결정적 질문을 제기하게 만들도록 하는 것 같다. 어쩌면 – 그의 글 속의 내용대로, 분석대상에 속하는 나는 나 자신의 우울이나 무기력증의 효과들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석자를 찾아간 것인가? 우울이나 무기력증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우울과 무기력증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심리상담사들을 찾아가게 된 것인가?
정확한 것은, 그리고 사태와 이 모든 시간들의 원인은 나 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에 봉인되어 있다고 생각되므로, 아마도 영원히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봉인되어 있는 장소를 찾아 도대체 그 원인이 근본적으로는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향유하는 분석주체로서의 나에 대하여, 나는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