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2. 상식이라는 단어와 예속적 계약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작성한 글에 대한 주석과 그에 대한 답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석과 답글 사이의 동형성 혹은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이 글의 경우는 필자의 친구 중 한명이 Facebook에 남긴 다음의 글귀를 읽고, 그것에 대한 주석 및 답글의 성격으로 필자가 생각한 것을 기록해두기 위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그러나 답글의 성격이라는 것 상, 답글을 유발시킨 당초의 글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답글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므로, 여기에 나는 그 친구의 양해를 구하고 그의 원문을 나의 주석 겸 답글 앞에 둔다.
또한 나는 또 한번 그 친구의 양해를 구하여, 그 친구의 원문에 대하여 나의 부족한 생각을 주석의 형태로 달아두기로 했다. 또한 그 친구의 원문을 되도록 유지하고 싶었으나 그러한 원문의 뜻이 일부 매끄럽지 못하게 읽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을 이 글을 읽는 다른 독자분들을 배려하여 매끄럽게 읽어질 수 있도록 괄호를 동반한 몇 가지 단어들을 덧붙여 자연스럽게 다듬었음도 밝혀둔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나의 원문 속의 주석은 끝에 제시되는 답글에서 종합된 문장으로 정리될 것임을 역시 여기 서두에서 밝힌다.
원문(原文). 「대다수가 특정 논리가 참이라고 믿는다면, 그 논리는 참인가?」
가끔 궁금한 것이 생긴다. 그리고 대부분은 해결되지만 가끔은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궁금증들도 남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상식이잖아’ 또는 ‘당연하잖아’라는 말로 답이 된다고 하는 궁금증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한 증명 같은 것 말이다.1(커피사유 주) 그래도 아직까지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은 희망적으로 들린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는, 여전히 자신들에게 제시되는 정보에 대하여 일련의 반발의 감정을 느껴, 그 정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에 기반한 의문의 제기는 결국 어떤 지적 탐구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학문을 하는 모든 이들의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러한 기본 자세를 가진 이들을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 같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다. 아마 누구든 간에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해서 아주 간단한 논리, 납득 가능한 풀이를 보여줬다면 넘겼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가끔 떠오르긴 하겠지만, 그런 논리도 같이 떠오르면서 다시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리라.
하지만 여집합의 유일성이나 「1+1=2」인 이유 등등, 가끔 가다 보면 ‘상식’에 기댄 법칙들이 있다. 덧셈의 경우에는 그래도 페아노 공리라는 눈가리고 아웅으로 느껴지는 증명이라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한 것은 아직도 보지 못했다.2(커피사유 주)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일반적으로 「상식」에 기댈 것을 요구하는 어떤 지식 혹은 요소들이란 보통은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을 떠올릴 것, 그리고 그러한 경험에 그 이론 혹은 지식이 모순되지 않으므로 합리적이라고 믿어도 된다는 설득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러한 귀납적 추론의 오류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하게도 그러한 설득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누군가가 제한하고 있는 것인지…….
한때 이에 관해서 주변인들에게 물었었다. 대부분이 (대답한 것은) “유일하지 않다면 그 예는 무엇인가?” 이다(였다). 나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찾지 못한 것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로 연결되지는 않는다.3(커피사유 주) 이론이 경험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 이론이 실용적으로는 쓸모가 있음을 입증할 뿐이지,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며칠 전의 선배와 나 자신의 의견 교환을 생각하여 보면, 어쩌면 진리라는 것은 미리 정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과 역사를 통해 탄생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반례는 없다’를 보여야 그 법칙이 참이다. 적어도 수학에서는 말이다.4(커피사유 주) 그러나 호프스테터의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서 저자가 말했듯, 그러한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 체계 밖에서 그 체계를 사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야 할 것이다.
가끔은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런 궁금증을 가진 이유는 ‘가르쳐 주지 않아서’인가, ‘가르쳐 주었지만 배우지 않아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당연하지만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인가.
첫(번째 것)과 둘(두번째 것)은 매우 대립되며,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둘 중 하나로 판별하기 쉽다. 전자라면 매우 합당한 궁금증이고, 후자라면 수업 시간에 자놓고 뒷북치는 격이다. 하지만, 두 경우 다 그러한 납득 가능한 증명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성립된다. 문제는 세 번째일 때다. 이런 경우(는) 그런 것으로 한다는 일종의 전제이다(전제로 여겨진다). 차라리, 페아노 공리계처럼 「덧셈은 다음 연산으로 정의된다」는 방식으로 (그) 근간과 엮어버리면 문제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삼단논리(삼단논법)의 명확한 예 (중의 하나)인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전제는 큰 문제다. 그저 빈 땅에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고는 이 건물은 안전하다고 하는 격이다. 그래서 적어도 수학에서는, 이런 기둥들에 대해 수리논리학이라는 검증 도구로 몇 번씩 두드려보고(두드려보는데), (그 결과 발견되는) 금이 가거나 비틀린 곳에서 다시 수리를 한다. ‘어떻게든지’ 말이다. 가끔 그 과정에서 페아노처럼 눈가리고 아웅 같은 논리도 나오지만, 결국 어떻게든 문제를 봉합하긴 한다.
허나 다음 궁금증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다. 여집합의 유일성, 덧셈의 교환법칙 성립. 다른 궁금증들은 지금 딱히 떠오르진 않는다.5(커피사유 주) 어쩌면, 그러한 논의가 여전히 형식으로 세계를 모두 설명하기를 원하는 수학자들의 강력한 욕망에 의거하여 여전히 진행 중인데, 우리가 모르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나는) 주로 ‘일반적으로 그렇다’라는 말로 많이 들었다. 또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라는 소리도 나온다(나오기도 한다).
전에 상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대략 이러하다.)
… 자연의 많은 부분들은 통계적으로 정규분포도를 따른다. 가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일반적으로 우린 「상식」을 ‘대다수의 사람이 공유하는 기반적인 생각’을(으로) 말한다. 그리고 대다수를(대다수는) 99% 정도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99.9% 까지도. 그리고 확통(고등학교 교육과정의 「확률과 통계」)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3의 범위 안이다. 물론 통계적으로 표본이 클수록 밖에 존재하는 예시들도 많아진다. 하지만 이들은 대다수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수이며, 상식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다….
어딘가에서 발췌한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약주를 간혹 하실 때에 하시는 말씀 중 하나이다.6(커피사유 주) 이 부분은 원문 그대로 옮기기에는 조금 부적절해보여서 같은 의미의 대체안으로 옮긴다. 한 5 ~ 6번은 들은거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생각하지만, 99.9%의 사람이 동의한다는 것과 진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7(커피사유 주) 이 부분은 어쩌면 사회적인 영역까지 확장한다면 요즘 나의 탐구 대상 중의 하나인 「민의(民意)가 항상 옳지는 않음」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을 듯 하다. 만약 그저 ‘동의’한다면 그것이 진실인가? 더 비꼬자면,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의 믿음’이 어떤 논리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로 들 수 있는가?8(커피사유 주) 예전에 정확히 출처가 기억나지는 않는 책에서 보았던 것 같은 이야기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떤 원숭이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원숭이는 문득 어떤 과일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학설로 확립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원숭이는 많은 원숭이들을 모아 두고는, 사과를 높게 들고는 이것은 바나나라고 주장했고, 모든 원숭이가 동의를 표했기에 그는 그것을 바나나라는 자신의 이론을 확립했다. 그러나 어느 날, 다른 원숭이 한 마리가 사과는 사과지 바나나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과를 바나나라고 부르는 이론을 만든 그 원숭이는 대중의 믿음에 근거하여 그 새로운 주장을 펼친 원숭이를 공격했다.
아니다.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진실은 해를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눈을 감고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런 부류일 것이다.9(커피사유 주)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이 친구와 나 자신의 견해 차이가 조금은 드러나는 것 같다. 이 친구는 진리 혹은 진실이란 고정되어 있으며 미리 정의되어 있는 것이라, 인간의 임무란 혜안(慧眼)을 통하여 이러한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것이고, 나의 견해란 미리 정의되어 있는 진리 혹은 진실은 없으며, 오로지 진리 혹은 진실이란 인간의 논쟁과 사고의 열려있음을 통하여 도출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가장 확실해보이는 어떤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봤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을 ‘대다수의 믿음’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대다수의 믿음’의 힘은)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하는데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 뜻은, 상식이라 함은, 계승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시간과 상관없이 (그러한 상식이라는 것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3밖의 생각이 영향력이 꽤 강해서 오랜 시간 후에는 그 생각이 상식이 될 수도 있지만, 가까운 시간대를 따지면 결국 99.9%의 생각은 90%의 생각으로 변하는 것 이상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10(커피사유 주) 그러나 가까운 200년 안의 시간대에서 중세 종교관이 철폐되고 사회계약론에 근거한 각종 형법 등의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생각은 어떠한 계기로 인해 주류와 비주류가 바뀌는 경우가 가까운 시간대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주류와 비주류의 전환이 인간의 불행함을 크게 개선해놓지는 못했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의 영향을 이 주석을 쓰는 행위에서까지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 즉 (제)3의 생각이 퍼지는 것(은), 상식의 입장에선 (그러한 생각이) 전염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런 것을 (상식 그가) 방지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교육’이다.11(커피사유 주) 여기서 ‘교육’이 ‘제도권 교육’을 가리킨다면 나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교육’을 가리킨다고 하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참된 교육’은 애초에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으며, 오직 피교육자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정보를 제시하고 그로서 정보 중에 가장 믿음직할 만한 것을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방법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특정 논리가 진실임이 ‘상식’이라고 (간주되도록) 만드는 방법은, 이 논리가 진실이라고 믿게 만든 다음, 그걸 믿는 사람을 통해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가르치는 사람의 영향력에 따라 좌우된다. (하지만)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서도 좌우된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지만12(커피사유 주) 그러나 그러한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여전히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실증에 합치되지 않는 믿음은 모두 무용(無用)한 것이다는 큰 믿음에 의하여 이제는 어느 정도 보완될 수 있어 보인다., 이것도 결국 무언가를 믿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 주관이 성립되었을 때만 나타나며, 그런 주관이 성립되기 전에는 주변의 의견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13(커피사유 주) 사실 이러한 관찰에 입각하여 우리는 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하나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안타깝게도 ‘제도권 교육’은 평가를 요구하므로,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생각하는 힘’이란 그 앞에 ‘제도권 교육 시스템에서 제시하는 방법대로’라는 전위수식언(前位修飾言)이 붙기 마련이다. 이런 주관이 성립되지 않은 집단 – 주로 유아 / 어린이 집단 – 에게 특정 논리는 진실이라는 교육이라는(교육의) 명목에서의 설파가 결국 99.9%의 대다수를 유지시키게 된다고 생각한다.14(커피사유 주) 교육은 결국 이전 세대의 어떠한 경험과 깨달음의 일대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장의 기능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활용되느냐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다음 진보 방향을 결정하기 마련이므로 매우 중대한 시스템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이 획일화 혹은 그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를 계속 유지하기를 고집하는 경우,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회의 다음 진보 방향이란 역방향, 즉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의 반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는 (비단) 수학에서만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에서 (내가) 든 생각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다. 물론 (나는) 사회학이나 경제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어떤 경향을 보인다’, ‘통계적으로 그렇다’라는 (대다수는 그렇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한다’라는 일반적인 말이다(말을 사용한다). (이들은) 그저 관찰을 통해 그 예들을 정규분포도처럼 모았을 뿐이다. 이들은 여집합의 유일성처럼 (예외는 없다)고 주장하진 않는다.15(커피사유 주) 이 점이 지금 이공계열 교육에서의 큰 한계점이고, 동시에 대학에서 이공계열 학생들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큰 이유이다. 왜냐하면 명확성과 논리를 통해 모든 것이 확실해보이는 수학 및 과학의 체계는 그것에 대한 맹신을 필연적으로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학 쪽에서도) (예외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법칙을 고등학교 때 보았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다.16(커피사유 주) 지금 그러한 「인본주의」의 태동 과정에 해당하는 18세기 프랑스 그리고 그 주변 유럽에서의 사상을 취미삼아 공부하고 있는 나의 얕은 지식을 조심스럽게 활용하면, 아마도 지금 우리의 교육과정에서 「인본주의」가 절대적이고 예외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태동 역사와 그 이전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나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본주의」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아주 좋은 방패이고,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도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누군가는 상관없이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물론 「인본주의」는 좋은 사상이다. 그것은 부정할 생각이 없다. 다만 예외는 없다라는 논리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사회 시간에 느꼈다. 정확히는, 보편윤리에서. (보편윤리를 다룰 때 말이다.)
사회(교과)에서는 – 적어도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과목에서는 – 보편윤리는 시대와 상관없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이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특정 시공간과 인종에서 존재하는 특수 윤리로 존재한다고 한다. – 이는 정의이므로 건드릴 것이 없다.
문제는 보편윤리의 예시로 (사회 시간에서는) 인본주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이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듣지도 못했다. 당시의 나는 ‘그 윤리가 보편적인지 특수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바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본주의도 그저 21세기에 만연한 특수윤리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라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그 의문의 이유로(근거로) ‘인본주의가 보편적이라면, 그 인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권은 프랑스 혁명 이후로 제안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편적이라는 의미가 혹시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 라는 암묵적 정의를 포함하는가?’였다(를 들었다).17(커피사유 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보편윤리와 특수윤리에 대하여 앞의 정의를 지속적으로 차용하고자 하는 경우, 보편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윤리는 특수 윤리이며, 보편윤리는 모든 진리와 사상은 필연적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한 답변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시대든 간에 형태와 적용 범위는 달랐을지언정 인권 자체는 보장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말은 (마치) ‘사람에게는 언제나 인권이 보장되었다. 단지 어떤 개체가 사람인지의 문제였다’이다(라고 들렸다). (그래서인지) 그때 당시에도 순간 당황했다. ‘언제부터 사람이라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명칭을 지니는 종족 외의 정의를 지녔지’라는 생각과 함께(말이다).
지금도 어이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이해는 한다(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 선생님은) 교사로서, 먹고 살려면 국가가 제시한 방향(교육 과정)을 따라야 한다(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인(公人)은 정치적 입장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가진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18(커피사유 주) 나는 일전에 고등학교 때 TED 강연에서 한 번 비판한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적 중립성’의 강요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생각은 변한 것이 없어서, 교육 현장에서 교사에게 강요되는 것은 사실 ‘정치적 중립성’이 아니라 ‘정치적 편향성’,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여러 정보를 제시하여 그것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여전하다. (아마도) 내 주장은 그저 그(러한) 방향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무시되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에는) 인본주의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인권을 천부권(天付權)이라 하며,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편윤리로 고정한다. (마침내는) 이에 대한 것을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더욱 공고히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은 교육을 통해 ‘상식’으로 포장된다.19(커피사유 주) 그러나 나의 생각은 이러한 과정은 「인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사실 인본주의의 원리에 반하는 근대의 교육 과정 혹은 그러한 방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불가침의 고유한 가치와 자유를 지닌 것을 인정하며, 사회는 그러한 사람들의 최대한 많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계약으로 구성되었다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잡설이 길었지만, 결론은 그렇다. (나는 그저) 위에서 제시한 여러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로 얻고 싶을 뿐이다. 물론 ‘상식적으로’라는 논리를 제외한 채로(말이다). 페아노 공리처럼 어떻게는 끼워 맞추어도 된다. 하지만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한 밴 다이어그램을 이용한 증명(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은 거절한다. 이미 (나는) 밴 다이어그램은 증명의 도구로서는 부적합하다는 말을 들었다. 듣기 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이를 이용한 것이 옳은 증명이 아니란 것을 안다.
p.s. 그리고 글을 끝마친 지금, 약간의 걱정이 생긴다. 지평론(지구평평설)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을지는 모르지만, 이들처럼 (분명히) 과학적 사실 – 언제든지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사실 – 을 거부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내 우려는 위의 내 논리 – 상식은 항상 진실은 아니다 – 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도 어쩔 수 없다.20(커피사유 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거나 혹은 어떠한 광신적 믿음의 교리로서 이러한 가설들을 신봉하니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관찰하고 그들을 설득할 방법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우려는, 내 논리가 이러한 사람들과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한다는 외형적 특징만으로, 이런 사람들과 동일한 부류로 분류되는 것이다.21(커피사유 주)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의 진보 과정을 생각해보면 대체로 기존의 당연했던 것들에 의문을 품고 이것을 통찰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광인(狂人)이라는 수식언이 붙었다. 나 또한 주변에서 여전히 그런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걱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그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하여 일종의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속단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역사적 자료로 보면 대체로 무언가 변화의 원동력 혹은 시발점이 되는 어떤 사상을 제시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두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답문(答文). 「상식이라는 단어와 예속적 계약에 대하여」
요즘 들어 어떤 의심이 든다. 이 의심은 나로 하여금 내가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거부하고, 이것들을 모두 논증과 검증, 그리고 탐구의 대상으로 올려놓게 한다. 그러나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면, 대체로 돌아오는 대답이란 보통은 「왜 그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사느냐」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이 단순하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이 단순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하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란 보통은 가벼운 냉소일 뿐이어서, 나는 내가 병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세상이 병들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때가 많다.
역사 속에서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루쉰의 경우만 고려해봐도 알 수 있듯 광인(狂人)으로 취급받았다. 그러한 광인(狂人)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사회의 낙인이란 때로는 무시무시해서, 중세 시대에는 죄 없는 한 개인을 마법을 쓰는 악인으로 둔갑시켜 화마(火魔)를 통해 그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지금은 중세 시대와는 달리 이른바 「마녀 재판」이란 일어나지 않는다고, 따라서 지금 사회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며 보다 진보했다는 주장이 많지만 그러나 여전히 변한 것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는 어떤 직관의 속삭임은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질서나 금지에 대한 반발적인 감정으로부터 출발하는 분석과 통찰, 그리고 이의의 제기란 한 사회를 변혁시키는 원동력이자 진보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여 이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보통 체제의 운영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므로 이러한 이의 제기를 저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계몽 사상이 태동하던 18세기의 프랑스도 다를 것이 없어서, 계몽사상가들에 대한 유럽 수도원의 공격은 처음에는 논박의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나중에는 논리적인 공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되자 이를 깨끗이 승복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심성을 문제삼거나, 혹은 대중의 맹신을 역이용하여 다수의 논리로 그러한 소수 의견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렀던 바가 있다. 나는 문득 이 지점에 이르러 18세기의 프랑스가 현재에도 어떠한 형태로 재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들었지만, 그것은 아마 나의 착각이었으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질서의 유지를 명목으로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이의 제기를 차단하고자 하는 부류들은 이제는 자신들의 편리함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그러한 이의의 제기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열의를 올리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러한 착각의 연장선이었으리라. 추정컨대 그들의 속셈이란 다음 세대의 양육 과정에 그들의 야심에 찬 손아귀를 뻗어, 마치 그들의 논리가 일종의 복음이라도 되는 듯양 아직 판단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세대에 교리로서 전파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판단의 능력을 아예 그러한 세대들이 가질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만 같다. 그들은 어떤 생존과 직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무기로 하여, 마치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란 죽음이냐 아니면 복종이냐라는 사실상 노예 계약과 다를 바가 없을 계약 속으로 누군가를 끝없이 밀어넣는 훌륭한 시스템을 아무래도 개발한 것만 같다.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이의의 제기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아주 신속한 지름길로 간주되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대부분의 개인들은 결국 그 노예 계약과 다를 바 없는 부당한 계약에 따라 그들의 영혼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런 망상에 문득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식」이라는 이름 하에 강요되는 계약이란 결국은 사회를 천천히 잠식하더니 이제는 모두를 마비시켜 어떤 사방이 막힌 철방 속으로 던져 넣고 그 방을 밀폐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소리치는 어떤 목소리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중은 그러한 목소리가 오히려 그러한 철방 속에 마비되어 죽어 있는 것이라며 입을 모았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죽어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목소리는 아마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목소리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수없이 들어보았던 바로 그러한 서사에 따라서, 목소리는 중세의 그 끔찍했던 기억과 같은 형태의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망상 속에서도 여전히 짐작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나 또한 그러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나는 문득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중세의 그러한 화형과 같은 끔찍한 신체형을 받는 것이란 이미 18세기의 유럽에서 출발한 바로 그 사상에 의하여 폐지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나, 그러한 끔찍한 형벌이 이제는 아마도 형태를 바꾸어 위장한 형태로서 나에게 점점 다가올 것이라는 그러한 불안감은 여전했다.
나는 문득 그렇게 미쳐 죽어가던 수많은 역사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격리되기 위하여 끌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소리친 것은 어떤 광기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광기에 대항하기 위한 절규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 모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반하는 것들임을 나는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아마도 마침내 정신병의 일종에 걸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커피사유 주) 그래도 아직까지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은 희망적으로 들린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는, 여전히 자신들에게 제시되는 정보에 대하여 일련의 반발의 감정을 느껴, 그 정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에 기반한 의문의 제기는 결국 어떤 지적 탐구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학문을 하는 모든 이들의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러한 기본 자세를 가진 이들을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 같다.
- 2(커피사유 주)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일반적으로 「상식」에 기댈 것을 요구하는 어떤 지식 혹은 요소들이란 보통은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을 떠올릴 것, 그리고 그러한 경험에 그 이론 혹은 지식이 모순되지 않으므로 합리적이라고 믿어도 된다는 설득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러한 귀납적 추론의 오류의 가능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하게도 그러한 설득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누군가가 제한하고 있는 것인지…….
- 3(커피사유 주) 이론이 경험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 이론이 실용적으로는 쓸모가 있음을 입증할 뿐이지,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며칠 전의 선배와 나 자신의 의견 교환을 생각하여 보면, 어쩌면 진리라는 것은 미리 정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과 역사를 통해 탄생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 4(커피사유 주) 그러나 호프스테터의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서 저자가 말했듯, 그러한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 체계 밖에서 그 체계를 사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야 할 것이다.
- 5(커피사유 주) 어쩌면, 그러한 논의가 여전히 형식으로 세계를 모두 설명하기를 원하는 수학자들의 강력한 욕망에 의거하여 여전히 진행 중인데, 우리가 모르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6(커피사유 주) 이 부분은 원문 그대로 옮기기에는 조금 부적절해보여서 같은 의미의 대체안으로 옮긴다.
- 7(커피사유 주) 이 부분은 어쩌면 사회적인 영역까지 확장한다면 요즘 나의 탐구 대상 중의 하나인 「민의(民意)가 항상 옳지는 않음」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을 듯 하다.
- 8(커피사유 주) 예전에 정확히 출처가 기억나지는 않는 책에서 보았던 것 같은 이야기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떤 원숭이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원숭이는 문득 어떤 과일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학설로 확립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원숭이는 많은 원숭이들을 모아 두고는, 사과를 높게 들고는 이것은 바나나라고 주장했고, 모든 원숭이가 동의를 표했기에 그는 그것을 바나나라는 자신의 이론을 확립했다. 그러나 어느 날, 다른 원숭이 한 마리가 사과는 사과지 바나나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과를 바나나라고 부르는 이론을 만든 그 원숭이는 대중의 믿음에 근거하여 그 새로운 주장을 펼친 원숭이를 공격했다.
- 9(커피사유 주)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이 친구와 나 자신의 견해 차이가 조금은 드러나는 것 같다. 이 친구는 진리 혹은 진실이란 고정되어 있으며 미리 정의되어 있는 것이라, 인간의 임무란 혜안(慧眼)을 통하여 이러한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것이고, 나의 견해란 미리 정의되어 있는 진리 혹은 진실은 없으며, 오로지 진리 혹은 진실이란 인간의 논쟁과 사고의 열려있음을 통하여 도출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가장 확실해보이는 어떤 것이라는 견해이다.
- 10(커피사유 주) 그러나 가까운 200년 안의 시간대에서 중세 종교관이 철폐되고 사회계약론에 근거한 각종 형법 등의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생각은 어떠한 계기로 인해 주류와 비주류가 바뀌는 경우가 가까운 시간대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주류와 비주류의 전환이 인간의 불행함을 크게 개선해놓지는 못했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의 영향을 이 주석을 쓰는 행위에서까지 받고 있는 모양이다.
- 11(커피사유 주) 여기서 ‘교육’이 ‘제도권 교육’을 가리킨다면 나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교육’을 가리킨다고 하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참된 교육’은 애초에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으며, 오직 피교육자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정보를 제시하고 그로서 정보 중에 가장 믿음직할 만한 것을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방법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 12(커피사유 주) 그러나 그러한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여전히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실증에 합치되지 않는 믿음은 모두 무용(無用)한 것이다는 큰 믿음에 의하여 이제는 어느 정도 보완될 수 있어 보인다.
- 13(커피사유 주) 사실 이러한 관찰에 입각하여 우리는 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하나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안타깝게도 ‘제도권 교육’은 평가를 요구하므로,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생각하는 힘’이란 그 앞에 ‘제도권 교육 시스템에서 제시하는 방법대로’라는 전위수식언(前位修飾言)이 붙기 마련이다.
- 14(커피사유 주) 교육은 결국 이전 세대의 어떠한 경험과 깨달음의 일대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장의 기능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활용되느냐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다음 진보 방향을 결정하기 마련이므로 매우 중대한 시스템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이 획일화 혹은 그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를 계속 유지하기를 고집하는 경우,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회의 다음 진보 방향이란 역방향, 즉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의 반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 15(커피사유 주) 이 점이 지금 이공계열 교육에서의 큰 한계점이고, 동시에 대학에서 이공계열 학생들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큰 이유이다. 왜냐하면 명확성과 논리를 통해 모든 것이 확실해보이는 수학 및 과학의 체계는 그것에 대한 맹신을 필연적으로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 16(커피사유 주) 지금 그러한 「인본주의」의 태동 과정에 해당하는 18세기 프랑스 그리고 그 주변 유럽에서의 사상을 취미삼아 공부하고 있는 나의 얕은 지식을 조심스럽게 활용하면, 아마도 지금 우리의 교육과정에서 「인본주의」가 절대적이고 예외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태동 역사와 그 이전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17(커피사유 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보편윤리와 특수윤리에 대하여 앞의 정의를 지속적으로 차용하고자 하는 경우, 보편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윤리는 특수 윤리이며, 보편윤리는 모든 진리와 사상은 필연적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 18(커피사유 주) 나는 일전에 고등학교 때 TED 강연에서 한 번 비판한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적 중립성’의 강요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생각은 변한 것이 없어서, 교육 현장에서 교사에게 강요되는 것은 사실 ‘정치적 중립성’이 아니라 ‘정치적 편향성’,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여러 정보를 제시하여 그것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여전하다.
- 19(커피사유 주) 그러나 나의 생각은 이러한 과정은 「인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사실 인본주의의 원리에 반하는 근대의 교육 과정 혹은 그러한 방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불가침의 고유한 가치와 자유를 지닌 것을 인정하며, 사회는 그러한 사람들의 최대한 많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계약으로 구성되었다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커피사유 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거나 혹은 어떠한 광신적 믿음의 교리로서 이러한 가설들을 신봉하니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관찰하고 그들을 설득할 방법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 21(커피사유 주)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의 진보 과정을 생각해보면 대체로 기존의 당연했던 것들에 의문을 품고 이것을 통찰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광인(狂人)이라는 수식언이 붙었다. 나 또한 주변에서 여전히 그런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걱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그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하여 일종의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속단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역사적 자료로 보면 대체로 무언가 변화의 원동력 혹은 시발점이 되는 어떤 사상을 제시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