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루쉰, 제도권 교육 속에서 보는 작은 희망의 씨앗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구하라! 구해야만 한다.”
루쉰의 『광인일기(狂人日記)』의 마지막 문장이다. 나는 이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 당시, 이 짧지만 굵은 소설에 대하여 몇 가지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꼽았고 그 문장 하나하나에 대하여 주석을 단 바가 있었는데, 이 문장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마 전, 나는 다시금 이 부분을 모종의 이유로 다시 보게 되면서 그 주석을 다시 목격하게 된 것이다.
모종의 이유란 사실은 어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강연을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시작은 의도치 않은 연(聯)으로부터 출발했는데, 당초에 내가 이 대학 1학년의 여름방학 때 계획한 것이란, 모교인 한 중학교에 가볍게 몇십명 정도의 소수 인원들을 모아놓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을 도와주는 자리였는데, 해당 중학교에 계시는 은사님과의 통화를 그 분의 남편분께서 들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복잡한 연으로 인하여 나는 사천의 용남중학교와 용남고등학교에 강연을 갖다 오게 되었다. 15시에 출발해서 21시 30분에 집에 들어왔으니 장장 6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각각 2시간씩 부탁받았고 실제로도 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강연의 총 시간이란 각 2시간씩 총 4시간을 했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 시간이 길어지고 또한 일정의 지체가 조금 있으며1(커피사유 주) 개중에는 코로나라는 시국으로 인하여, 일부 등교로 인해 몇몇 학생들은 집에서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고 학교로 오느라 지연되는 불가피한 경우도 있기는 했다. 내가 강연을 조금 예상 시간보다 넘길 정도로 수다스러운 탓에 총 6시간 30분의 대장정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내가 사천용남중학교에 도착한 것은 15시 30분이었다. 솔직하게 고하자면,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도 내가 다녔던 모 고등학교를 떠올려보면 그보다는 훨씬 시가지에 가까운 곳에 있으며 몇몇 건물들은 최근에 지은 곳이 있어서 괜찮아보이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건물이 조금 도심보다는 교외 부근에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교외 부근에 있는 학교라는 건물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또한 교외 부근에 있던 나의 고등학교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그런 교외 부근에 있는 학교는 뭔가 특별한 아이들이 있던 탓이었다. 정확하게는 어떤 것에 의하여 압도되지 않은, 그리하여 아직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그나마 조금 더 많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바로 그러한 아이들의 존재로부터 약간의 희망을 보는 듯한 순간적인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공상은 결국 시간에 맞춰 가야하는 강연에 대해서는, 특히 그 강연이 16시 정각에 용남중학교의 모 교실에서 시작하고 있고 내가 노트북을 따로 챙겨가서 PPT 파일과 프로젝터 연결을 확인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그다지 쓸모란 없는 것이 사실이므로, 나는 공상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중앙 현관으로 발을 들였다.
나는 그 정도로 환대받아야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배울 것이 한참 많고 부족한 것도 압도적으로 많으며, 특히 나 자신 앞에 펼쳐진 수많은 미지의 영역을 볼 때마다 일종의 현기증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는 학생, 그것도 대학 1학년에 불과할 뿐인데 나 자신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나의 강연이라고 해 보았자, 사실상 내가 느낀 것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바들, 그리고 나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그런 매우 압도적이며 대단한 노력이 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쨌거나 그 중학교의 방문인으로서 「멘토링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의 강연의 담당 교사분에게 매우 감사드려야만 할 환대를 받았다.
그나저나 강연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도착한 시간은 때마침 7교시 수업이 진행중이었으며, 내가 수업을 할 교실에는 한 교사분께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계신 중이었으므로 나는 대략 16시 10분 정도에 강연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담당 교사분의 설명을 들었다. 당초 나는 바로 교실로 들어가서 준비를 하려고 계획했으나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덕분에 교무실로 안내되어 약 20분을 앉아있게 되었다.
준비해간 자료들, 즉 블로그에 써 둔 몇 개의 강연준비록들을 쭉 읽어보면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나는 그 시간 동안 잠시 생각하는 기회를 덕분에 가질 수 있었다. 이 중학생들에게 무엇을 내가 이야기해줄 수 있겠는가? 내가 강연을 해도 되는 것인가? 중학생들에게 나 같은 사람의 강연도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시간은 나에게 그 대답을 허락해주지 못했으므로, 나는 첫 번째 강연을 위하여 교실로 가서 노트북을 피고 준비를 마쳤다.
중학생들은 총 11명이 모였다. 그 중에 몇 명은 과학고등학교 진학에 관심이 높은 3학년 학생들이었으며 실제로 그 학생들이 한 질문도 주로 과학고등학교 안에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과학고등학교나 이공계열 쪽으로 관심이 있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었다.
나는 내가 준비한 이야기를 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본 이런 것도 없었다. 주로 나는 내가 선호하는 발표 방식에 따라, 사실상 혼자서는 처음 책임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강연을 결국 해 냈다. 연단에 서서, 노트북에는 PPT 발표자 화면을 띄워놓고 오직 현재 슬라이드와 다음 슬라이드의 내용들만을 보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나누고 싶었던 것들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문답(問答)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라, 당초에 학생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사전에 안내한 바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그나마 자기 답을 생각해와서 놀랐으며, 또한 학생들이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죽은 학교들보다는 질문을 할 수 있고 그러한 용기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꽤 희망의 일종을 품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학생들의 태도가 가장 압도적으로 잘 드러난 곳은 아무래도 용남고등학교에서의 강연이었으리라.
용남중학교에서의 강연은 생각보다 시간을 조금 더 쓰는 바람에 예정 시간을 조금 넘겨버렸다. 애초 스케줄에도 강연 사이의 간격은 약 30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국 저녁은 아주 간단하게 먹어야 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일종의 희망을 이미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머릿속에는 계속 루쉰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나는 왜 루쉰이 그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있던 나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용남고등학교에서는 내가 사전에 담당 교사분을 통하여 전달했던 4가지 질문들에 대하여 학생들이 꽤 많은 생각들을 해 왔다. 그 중에는 약 4시간 동안 생각을 했다는 친구도 있어 꽤 놀랐는데, 당초에 내가 의도한 것이란 그냥 “생각을 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였지 “여러분의 바쁜 시간을 굳이 쪼개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오세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로 쪽으로 담당하고 계시는 그 담당 교사분께서는 놀랍게도 분명히 그 정도까지 심화될 필요가 없을 나의 4가지 사전 질문에 대하여 심지어는 사전 준비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셨다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교사분의 배려 덕분에 학생들에게서 많은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용남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사전에 던졌던 질문 중에는 “과학(科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강연준비록을 통해서,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과학의 정의를 이용하여 사실 과학이 넓은 범위에서는 학문과 같다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유도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기억해둘만한 그 학생들만의 정의가 있어 몇 가지 옮겨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생각의 마침표. 왜냐하면 우리가 평소에 궁금한 것들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생각들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가설을 세우는 것 그리고 관찰을 통하여 자연의 한 측면을 명확하게 기술하는 것.”
“관찰을 기반으로 한 검증을 통하여 설립된, 그러나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할 수 있는 지식들.”
이들 학생들의 정의도 매우 훌륭했다. 특히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할 수 있다」라는 속성을 제시한 학생에게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생각을 할 줄 하는 학생이 아직은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아직 죽지는 않은 학생이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어서 “학문이란?”과 같은 사전 질문들을 던졌고,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친구들도 있었고, 내가 용남고등학교에서 그 밤에 강연을 진행한 도서관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꽤 넓어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있어서는 강연을 준비한 4일의 시간이 아깝다고 느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완벽히 뿌리뽑은 순간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생각보다 질문이 많았다. “대학교 학식”에 관하여 묻는 사소한 질문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에서의 학습법”, “고등학교에서의 슬럼프 극복법” 등까지 물어보았던 학생들의 질문에 나는 모두 답해야 했었는데, 평소 문답을 좋아하고 논쟁을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인 나는 그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아마 다시금 이날을 생각할 때마다 추억하게 될 것 같았다.
강연은 이렇게 해서 종결되었다. 그런데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희망의 씨앗이 분명히 마음 속에 싹을 틔웠다는 사실을 어느샌가 알아차리게 되었다. 루쉰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구하라! 구해야만 한다.”
나는 문득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으로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하나하나에 그 일들이 하나의 장면들로 나타나서 역시 스쳐 지나갔다. 고등학교에서의 강연에서도 이야기한 나의 입학 초기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그로 인한 긴 슬럼프 기간, 그리고 그 슬럼프를 내가 어떻게 이겨내려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내가 얻었는지.
한편으로는 나는 또한 문득 대한민국이라는 이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도 떠올리게 되었다. 뉴스와 평론과 같은 간접 경험들은 나에게는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이 사회를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회색(gray)일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회, 주의를 기울여서 보면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들은 보통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따라서 잊혀지는 그러한 사회. 그리하여 그 근간, 출발점들은 잊혀지고 오로지 그 출발점에서 한참 뻗어나간, 물론 나름 소중하고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이 과연 모든 학생들을 위한 길인가,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길인가, 진정으로 이것이 교육이란 말인가 –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그러한 사회의 모습들에서 비롯하는 그 회색들을.
나는 한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좌절했다. 그러한 자리에 올라갔을 때 내가 지금과 같은 신념을 계속 가지고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나를 스쳐지나간 것들로부터 사실은 그 말씀이 어느 정도는 틀렸을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고전 100선 읽기 수업에서 『광인일기』 는 루쉰의 혁명에 관한 사상이 성숙하게 된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된 바가 있었다. 그는 그 이전까지는 여러 계몽 서적들을 발간하고 각종 운동들을 벌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북경대학교의 교수로서 연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으로 스스로의 삶을 전환했다는 사실을 나는 또한 그때 알게 된 바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이 그 모든 순간들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머릿속에 연상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광인일기』에서 루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구하라!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는 것에 대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커피사유 주) 개중에는 코로나라는 시국으로 인하여, 일부 등교로 인해 몇몇 학생들은 집에서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고 학교로 오느라 지연되는 불가피한 경우도 있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