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27.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모든 사람은 불가변의 그릇을 가지는가,
선생님의 추상
“… 선생님,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여쭈자 식탁 위, 초밥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흠칫 놀라신 눈치셨다.
“… 아니, 바뀔 수 없지.”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곧 그러한 기색을 온데간데없이 훌훌 털어 버리시고 이렇게 단언하셨다.
“… 그렇군요.”
그리고 그 말은 이 며칠 전의 나를 교단에서 한 때 가르치셨던 중학교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계속 기억에 남아 되풀이되는 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선생님께 그릇의 크기가 바뀔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기 전에 먼저 이렇게 질문을 드려야만 했다. 그릇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후회하고 있는 지금에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선생님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가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 예상되는 대답을 도출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대답이란 그릇은 일단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채워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을 도출하던 중에 나는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물」을 떠올렸다. 그는 그 글에서 “텅 빔이 그릇의 잡아 담는 힘”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쭈어 볼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억 속의 선생님께 다시 여쭈어보았다. 그렇다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 그릇이 ‘텅 비어 있음’을 지시합니까?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이란 통상 우리가 지칭하는 일상적 용어에서의 그릇은 아닐 것이므로 반드시 이 그릇의 ‘채워질 수 있음’이라는 속성이 ‘텅 비어 있음’이라는 속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억 속의 선생님께서 지금 대답을 해 주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릇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를 당시 나는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께서 ‘그릇’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하셨을 때, 나는 무언가 꺼림칙함을 직감적으로 느꼈으나 차마 그러한 견해 차이를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앞에서 밝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맥락으로부터 ‘그릇’이라는 추상의 의미를 추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의미가 점차 밝혀짐에 따라 점차 그 직감적인 거부감이 즉각적으로 점차 고조되는 내적 긴장을 해결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릇은 크기가 바뀔 수 없다. 즉, 그릇은 선천적(先天的)이다.”
“그릇을 채우는 자는 그 그릇의 크기에 맞게 그릇을 채워주어야 한다.”
… 선생님께 그릇이란 지난 수십 년의 교단에서의 세월을 견뎌 오시면서 정립된 하나의 추상이었을까? 아니면 하나의 가치관이었을까, 결심이었을까? 어쩌면 처음에 교단에 올라서시던 시절의 선생님께서는 ‘모든 사람은 선천적인 그릇을 가진다’라는 지금의 명제에 동의하시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지금의,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많은 것을 알아야 할, 그리하여 스스로의 앞에 놓인 그 압도적인 광활함에 늘 주눅이 들어버리곤 하는 나 자신이 그러하듯 말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텅 빔이 그릇의 담아 잡는 힘”이라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분명 일상적인 그릇에 관하여 고찰해서 이러한 말을 도출했겠지만, 분명히 이 말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 그 ‘그릇’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비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담아 잡으려고’ 한다. 비어 있는 것을 채우려는 욕구는 과연 ‘진공을 싫어하는 자연’만큼이나 매우 당연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릇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그릇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욕구는 언젠가는 분명히 중단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그릇이 점차 채워짐에 따라 그 그릇을 가진 자는 포만감을 느낄 것이며, 그릇이 다 채워진다면 그는 그릇을 채우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그릇을 더 채우려고 한다면 그릇이 넘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릇에 채워질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광활하고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없고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나에게는 ‘나 자신의 그릇이 존재하고, 그러한 그릇의 크기는 변할 수 없다’라는 명제는 일종의 공포스러운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사실상 매우 긴 시간을 투자해도 내가 그 모든 채울 수 있는 것들을 다 그릇에 담아 갈 수 없을 뿐더러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음이 명백하다는 것이 아마 이러한 불안감의 이유일 것이다. ‘그릇은 유한하고, 그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 이러한 선언이 명백한 참으로 밝혀진다면 오늘날의 많은 시도들, 이를테면 그러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더 많은 발견과 발명을 탐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노력들이란 이미 결정된 것이며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그렇게 이미 선택된 누군가를, 더 큰 그릇을 가진 자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그릇을 탐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릇의 크기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하는가?
…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수십 년 동안의 교단에서의 관찰에 근거하셔서, 귀납적인 추론으로 ‘그릇’이라는 추상을 확립하셨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릇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그릇의 크기는 불가변(不可變)이라고. 그러나 나는 오래된 논리적 반증 기법 중 하나를 다시금 회상할 수 밖에 없으며, 그 기법 때문에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싶다. 그 기법의 이름은 ‘반례(反例)’인데, 선생님의 귀납적 결론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로서는 그러한 반례적인 인간이, 즉 자신의 그릇을 부술 수 있으며 새로운 그릇을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이, 또는 그릇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나에게는, 나 자신이 그러한 반례적인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있고, 다른 가슴 한 켠에는 그러한 반례적인 인간들의 집합이 모든 인간들의 집합이 아닐까라는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선생님,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여쭈자 식탁 위, 초밥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흠칫 놀라신 눈치셨다.
“… 아니, 바뀔 수 없지.”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곧 그러한 기색을 온데간데없이 훌훌 털어 버리시고 이렇게 단언하셨다.
“… 그렇군요.”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