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를 보는 시간
… 어느 순간 생각이 나서 뒤를 돌아보면, 나도 잘 모르던 사이에 아득히 멀어져버리고야 만 과거의 시간들이 나를 섬뜩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회상이란 때로는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고 느껴지는 시간에 대한 한탄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잠시의 추억이나 과거의 감정선을 재연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어서, 이러한 순간들마다 나는 대체로 한탄과 추억에 반반씩 젖은 참으로 형언하기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이 드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이 없는데, 아마도 나의 일상이 바쁜 탓일 것이다. 대학의 2학기에서 내가 배운 내용을 노트에 잘 정리하고 과제를 해결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복습에 들어가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시간이 꽤 부족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나의 평일 하루 일과란 일어나서 강의를 듣고 복습을 하고 정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과제를 수행하는 행위들로 가득 찬 과제의 집합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하루가 매번 반복되고 있으니 어찌 시간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러한 상황 와중에도 나는 나 자신에게 도착하는 자기소개서 검토에 관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기적인 심성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개인 행위의 동기 원천을 그 개인이 행위를 통하여 얻는 손익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은 왜 이러한 ‘손해’로 보이는 행위를 거절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나 자신의 이러한 행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반드시 나의 이론이 수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소개서 검토’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이익’이 있는 경우를 고려해볼 만하다.
자기소개서를 검토하는 행위, 즉 ‘자소서를 보는 시간’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선적으로는 그 시간에 수행해야 하는 다른 과업들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이 점에서는 분명히 나 자신의 ‘손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자소서를 보는 것’에는 그러한 과업들을 수행하지 못하는 손해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어떤 ‘이익’이 존재한다. 그러한 이익은 나 자신의 정서와 기억, 그리고 가치관에 아마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문득 지난 해의 이 즈음의 시기에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던 나 자신을 떠올려본다. 그 시절의 나는 노트북 앞에 깜빡거리던 커서와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회의감과 어지러움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어떠한 문서 안에 나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그 태초의 질문에 대한 일시적인 대답이라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일 것인데, 나는 이제 그 일시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할 상황이 아닌 일시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할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1년 먼저 대학에 와 버렸다는 이유로 아직 고등학교 3학년인 친구들의 자기소개서를 검토해주면서, 나는 그 친구들이 자기 자신과 주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단서들의 종합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일시적인 대답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나는 자기소개서에 대한 나 자신의 굳은 신념, 즉 ‘자기소개서’라는 문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규명’을 반드시 일시적인 답이라고 할지라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므로 친구들의 문서가 그 대답을 구성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시적인 대답을 구성하도록 조금씩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대체로 그러한 노력은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잘 수용되고 있는 편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의 노력이 수용되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러한 검토, 즉 스스로의 삶을 기술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삶의 기술을 들여다보는 입장이 되어버린 나 자신과 그 친구들의 삶의 기술 사이의 관계이다.
아이러니함. 바로 이것이 그 두 요소를 이어주는 하나의 단어이다. 1년 전의 나는 지금의 친구들이 처한 상황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자기소개서 문항의 의도와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점점 수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한 정부 당국의 태도에 불안해하는 그러한 상황,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앞에 놓인 불확실함에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러한 친구들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예전부터 예견되어 오던 바로 그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바로 예견되던 상황이 닥치면 무덤덤하다기 보다는 무언가 색다른 감정이 든다는 것이 바로 이것인가, 싶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선 상에서, 나는 누군가의 삶을 그가 기술한 문서를 통해 확인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나는 그러한 이야기에서 나 자신의 자화상, 그리고 걸어온 길들과 아득해지고 있는 기억들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