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34. 트롤리 딜레마의 변형, 그리고 미묘함

사유 #34. 트롤리 딜레마의 변형, 그리고 미묘함

2021-10-16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트롤리 딜레마, 영화 ‘날씨의 아이’,
그리고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여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나의 딜레마(Dilema)가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가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간다. 필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이 기차 앞으로 두 갈래의 갈림길이 펼쳐져 있다. 왼쪽에는 한 명의 인부가 선로 작업을 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다섯 명의 인부가 선로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딱 한 번, 선로 변경기를 당겨서 그 기차가 도달할 비극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어느 쪽으로 기차가 향하도록 해야 하는가?


솔직히 고하자면 ‘트롤리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위 딜레마가 갑작스럽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건네준 글이 격발점이 되었던 것인데, 그 글은 영화 〈날씨의 아이〉의 감상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위 딜레마가 여러 양태로 변형되어 등장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읽혔다. 물론 곧바로 보일 정도로 명백하게 글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선뜻 그 방아쇠가 되는 그 글을 한 번 쓱 하고 읽어본 직후에, 나는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은 결국은 위 딜레마를 필연적으로 연상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서 자연히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글에서의 영화 〈날씨의 아이〉에 대한 평가의 주된 핵심이란 두 가지였다. 첫째,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 둘째,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가 그것이었다. 글에서는 전자(前者)인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있었고, 후자(後者)인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근래 10월 초의 한반도의 기상과 또한 아열대 작물의 재배가 가능하게 된 것을 제시하면서 두 핵심에 대한 내용을 전개하고 있었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매커니즘 – 즉, 공동체는 갈등으로 인하여 와해될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힘없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 쏟아부어 내부의 긴장과 불만을 해결한다는 매커니즘 – 은 기존에 내가 모르던 하나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기상과 작물 재배의 변화는 현재 내가 대학에서 배워가고 있는 기상계와 관련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각각이 나의 흥미를 잠깐 끌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 읽고 있던 책의 내용 중의 하나가 떠올라버린 나에게 있어 그들이 그 흥미를 더욱 끌 수 있는 시간이란 더 허용될 수는 없음은 명백했다.


글의 내용이 야기하는 흥미를 압도적으로 묵살해버린 존재의 이름은 체사레 베카리아가 쓴 『범죄와 형벌』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근간 중 하나인 형법(刑法)의 기본 정신을 구성하고 있음에도 불행히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인 이 책은 그 덕분에 잘 팔리지도 않아서 얼마 남지도 않았던 물량 중에 어렵게 구한 종류에 속했다. 그러나 어렵게 구한 책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 책은 또 한편으로는 ‘범죄에 대한 형벌을 부과해야 하는 원인’과 ‘사형 철폐’의 논거를 확인해보겠다는 비교적 단순한 이유에서 구입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살필 것들이 많아서 각 장에 상세한 주석을 달아 개인적으로 400여개의 주석을 달아둔 문제의 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토록 많은 주석을 달면서도 최초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마침내 제28장의 ‘사형’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는 모종의 안도감 내지는 자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그 장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나는 모종의 미묘한 감각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비롯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베카리아는 그의 저서 제28장 ‘사형’의 장에서 ‘사형’은 유용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음을 논증하고 있었다. 그가 사형은 이미 역사적 경험들을 통하여 범죄에 대한 억제력으로서 충분히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이 충분히 보여졌으며 또한 범죄에 대한 억제력은 형벌의 강도가 아닌 그 지속도에서 온다는 점을 주장한 것, 즉 사형의 유용하지 않음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점은 나에게 있어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또 다른 논거인 ‘사형’의 비정당성에 대한 논증 부분이 문제의 감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 분명히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제의 원인을 상세히 뜯어보았는데, 이윽고 베카리아가 사형의 정당하지 않음을 서술하고 있는 다음의 기술의 일부가 그의 형벌에 대한 집행 근거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 자체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치 어떤 종류의 딜레마로 빠질 수 밖에 없게끔 유도하는 듯한 이 기본 원리의 이름은 ‘공리주의’라고 알려져 있었다.

인간은 무슨 권리로 그의 이웃을 도살할 수 있는 것인가? 주권과 법의 원천이 되는 권능으로부터 나온 것은 확실히 아니다. 법은 각 사람의 개인적 자유 중 최소한의 몫을 모은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법은 개개인의 특수의사의 총체인 일반의사를 대표한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권능을 타인에게 기꺼이 양도할 자가 세상에 있겠는가? 각인의 자유 가운데 최소한의 몫의 희생 속에 어떻게 모든 가치 중 최대한의 것인 생명 그 자체가 포함된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만일 이 같은 점을 수긍할 수 있다면, 그 원칙이 자살을 금지하는 다른 원칙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자신을 죽일 권리가 없는 이상, 그 권리를 타인이나 일반사회에 양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사형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의 문제가 아니다. 사형은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다. 그 국가가 한 시민의 존재의 파괴를 유용하거나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 벌이는 전쟁인 것이다. 사형이 유용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다면, 나는 인도주의의 대의를 선취하는 셈이다.

한 시민의 죽음이 필요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경우는 다음 두 경우뿐이다. 첫째, 그가 자유를 박탈당하더라도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힘과 조직을 보유하고 있음이 명백한 때이다. 다시 말해 그의 존재 자체가 기존의 정부형태에 위험한 혁명을 야기시킬 수 있다면, 그의 죽음은 불가피할 것이다. 한 국가가 자유를 상실하는가 회복하는가의 기로에 서게 될 때, 무정부상태가 도래하여 무질서가 법을 대체해버릴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음 경우에는 어떤 연유로든 한 시민의 생명을 파괴할 어떤 필요성도 찾아낼 수 없다. 즉 평온한 법의 지배하에 있는 경우, 그 국민의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는 체제하에 있는 경우, 무력과 여론(무력 그 자체보다 훨씬 강력한 여론)으로 무장하여 내부와 외부의 적들에 대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체제인 경우, 집행권이 군주의 수중에 놓여 있는 경우, 돈으로 쾌락은 살 수 있지만 정당한 권위는 살 수 없는 경우가 그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 타인들의 범죄를 억제하는 유일의 방법일 경우이다. 바로 그 쟁점은 사형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한인섭,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박영사, 2006. pp. 111-113.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베카리아는 한 개인과 사회가 양립할 수 없는 경우, 즉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경우일 때에는 개인이 제거될 수밖에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 절에서 사형에 기본적으로 반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제거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일 경우에는 사형이 불가피하다고 논증함으로써, 개인의 희생이 최후의 수단이라면 모두를 위하여서는 감행될 수 있다고 암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사형, 즉 한 개인에 대한 사회의 공식적인 희생 내지 사회계약의 파기에 관한 선포란 곧 한 사람의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폭력의 일종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뒤에서는 이러한 내용과 상충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내용을 제시함으로서 논증 전개에 일종의 미묘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다름 아닌 이 미묘함을 영화 〈날씨의 아이〉에 대한 감상문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의 관점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평가인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영화에서 ‘날씨의 무녀라는 개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희생에 대한 강요를 지적하고 있었고, 두 번째 평가인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에서는 ‘현재의 풍요’를 위한 ‘미래 세대의 삶’의 희생을 지적하고 있었는데, 이 두 평가가 모두 공통적으로 ‘집단’과 ‘개인’ 간의 이익 관계가 충돌하는 경우, 즉 두 경우가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에 대하여 한 쪽의 제거 내지 희생을 강요하도록 하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카리아의 표현을 빌려와 조금 더 자세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집단’이 ‘개인’에게 사회계약에 결코 규명된 바 없고 또한 규명될 수도 없는 희생, 즉 한 개인의 생명과 관련된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논리를 두 평가가 모두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리주의라는, 다수를 위하는 것이 항상 선(善)일 것이라는 믿음 하에, 역시 베카리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단’이 ‘개인’에게 선포한 전쟁이라는 서사가 내가 읽은 이 평가에 따르면 바로 이 영화 〈날씨의 아이〉에 숨어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 언급한 바 대로, 나는 분명히 트롤리 딜레마를 갑자기 떠올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생각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 출발한 미묘함이 누군가가 나에게 건넨 영화 〈날씨의 아이〉에 관한 글에서 증폭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온 순리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의 흐름이, 즉 오늘날 자율주행 자동차에 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면서 교육 과정에도 일부 포함되기도 하는 트롤리 딜레마에 엮인 나의 하나의 사유의 흐름이 또 하나 시사하는 바를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새로운 관점 하나를 제시한다는 것이 아마도 바로 그것이다. 흔히 트롤리 딜레마는 다수와 소수 사이에서 누구를 희생할 것인지의 선택을 강요한다. 마치 그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베카리아 덕분에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단언컨대 우리는 그럴 권리가 없다. 사회계약에 결코 규명된 바 없고 또한 규명될 수도 없는 희생을 우리는 개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또한 그러한 선택을 감히 범함으로써 특정 개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권리도 없다. 그러므로 트롤리 딜레마는 애초부터 선택할 수도 없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에 대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트롤리 딜레마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우리가 무언가 결코 잊으면 안 될 것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것은 혹여 아닌지 의심스럽다.


영화 〈날씨의 아이〉에 관한 글과 베카리아의 미묘한 결합 내지 조합은 또 다른 무언가를 나로 하여금 떠올리게 한다. 트롤리 딜레마와 같이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 누구도 판단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하여 감히 질문을 던지는 어떤 철학적인 예술이 그 속에 품고 있는 선율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에게 있어 그 예술이 던진 질문 자체는 잘못된 것이며 어떤 대답을 해도 틀린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종류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적어도 그 선율은 내가, 그리고 우리가 봉착한 이 최종장, 그리하여 올바르게 대답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이들 종류의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만큼은 가장 최선을 다해 전달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여기 다시 한 번 그 유명하고도 잘 알려진 딜레마가 있으니, 이 도전적 작품 속의 선율과 영화 〈날씨의 아이〉에 관한 평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사이에 형성될 수밖에 없는 미묘한 그 긴장감을 발견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나의 딜레마(Dilema)가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가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간다. 필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이 기차 앞으로 두 갈래의 갈림길이 펼쳐져 있다. 왼쪽에는 한 명의 인부가 선로 작업을 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다섯 명의 인부가 선로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딱 한 번, 선로 변경기를 당겨서 그 기차가 도달할 비극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어느 쪽으로 기차가 향하도록 해야 하는가?


Frostpunk (Expansions) OST – The Inevi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