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의 이해(Understanding Western Philosophy) 문답 #2. 인식론 · 상식적 실재론 · 데카르트의 ‘성찰’에서의 방법적 회의와 상식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
#1.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인식론에서 주로 제기하는 질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철학에서 지식의 제반 사항을 다루는 한 분과를 흔히 인식론이라는 말로 칭한다. 인식론은 ‘우리는 앎을 어떻게 얻는가’와 같은, 앎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종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식론에서는 ‘앎’이나 우리 앞에 실존하는 대상과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주로 질문한다.
- 우리는 앎을 어떻게 얻는가?
- 우리의 앎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은 실존하는가?
-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과 실존하는 사물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 나는 외부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가?
#2. 상식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 상식적 실재론은 어떤 믿음으로 구성되는가?
우리가 흔히 상식적 · 일상적으로 가지는 지각 대상과 실제 사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믿음을 상식적 실재론이라 한다.
상식적 실재론은 흔히 다음의 3가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은 실재로 존재한다.
- 우리가 한 번 지각한 사물은 다시 지각되지 않더라도(보이지 않더라도) 실존한다.
- 우리가 지각한 사물의 성질은 실제 사물의 성질과 동일하다.
#3. 회의주의란 무엇인가? 회의주의에서 가장 현명한 판단 방법은 무엇인가?
회의주의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견해로, 세상에는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의심가능하다는 세계에 대한 견해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 가능한 것으로 보는 회의주의 시각 하에서는 가장 현명한 판단 방법이란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의 중지”이다.
#4. 르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방법적 회의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르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성찰’ (특히 제1장)에서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상식적 실재론을 비판하고자 했다. 여기서 방법적 회의는 데카르트가 상식적 실재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도구적 용도로써 회의주의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상식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방법적 회의를 흔히 데카르트는 ‘썩은 사과 골라내기’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바구니에 있는 사과를 모두 밖으로 꺼낸 다음 온전한 사과만을 골라 다시 담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앎에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부동의 의심불가능한 뿌리를 찾으려고 했다.
#5.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크게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 ‘꿈으로부터의 논증’, ‘사악한 악령 가설을 통한 논증’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했다. 각각은 무엇인가?
#5-1.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 “우리의 감각은 때때로 오류에 빠진다”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은 우리의 감각은 때때로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사물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잘못 지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물의 색상을 잘못 지각하기도 하고, 사물의 형상이나 크기를 잘못 판단하기도 한다.
따라서 르네 데카르트는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온 모든 관념들은 모두 의심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5-2. 꿈으로부터의 논증: “나는 지금 아주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르네 데카르트는 감각으로부터 온 관념들은 모두 의심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위 견해 중에서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관념, 이를테면 “나는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 따위의 관념들에 대해서도 역시 지금 스스로가 아주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의심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지금 나 자신이 이를테면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실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서 의자에 앉아 있는 아주 생생한 꿈을 꾸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 경험에서 근원하는 아주 의심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관념마저도 의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5-3. 사악한 악령 가설로부터의 논증: “사악한 악령이 나 자신에게 잘못된 앎 · 관념을 주입한 것일수도 있다”
르네 데카르트는 감각으로부터 온 관념 말고도 이성을 통하여 얻어진 기존의 앎이나 관념도 모두 의심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악한 악령이 자신을 기만하여 스스로에게 잘못된 앎이나 관념 자체를 주입한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적인 비유는 ‘통속의 뇌’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테면 지금 나 자신이 알고 있는 1+1=2 따위의 지식도 사실 나 자신은 통속에 들어 있는 전극이 꽃힌 뇌에 불과하여, 가해지는 전류에 의하여 1+1=2라는 잘못될 수도 있는 지식이 주입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6.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의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 ‘꿈으로부터의 논증’은 각각 모두 비판에 직면한다. 이들 비판과 이에 대한 재반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6-1.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서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에서 그가 주장한대로, 물론 우리의 감각 관념은 종종 오류를 일으켜 사물을 잘못 지각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도저히 의심 불가능한 관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내가 가끔 사물의 색깔을 잘못 지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예컨대 의자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감각 자체가 의심 가능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의심 불가능해 보인다.
만약 이러한 의심 불가능한 감각 경험 자체마저 무너진다면, 이러한 감각 경험이 결국 앎의 근본이 되며 지식의 근본이 되므로, 지식 자체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며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데카르트의 비판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할 것이다.
#6-2. 꿈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
르네 데카르트의 ‘꿈으로부터의 논증’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반론에 직면할 수 있다.
우선 그 첫째로 만약 계속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상태라면 ‘깨어 있음’과 ‘꿈을 꾸는 상태’는 구분되지 않으므로, 데카르트의 ‘꿈으로부터의 논증’에서 말하는 ‘꿈을 꾸는 상태’ 자체가 정의될 수 없기 때문에 내적 모순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데카르트의 ‘꿈으로부터의 논증’은 항상 꿈을 꾸고 있다는 진술이 아닌, 어떤 경우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는 진술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두 번째로 ‘꿈의 경험과 실제의 경험은 구분가능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예컨대 꿈의 경험은 실제의 경험보다는 과장되고 허황된 측면이 많으므로 둘은 다르고 분명히 구분 가능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여전히 정말 실제 경험과 구분 불가능한 아주 생생한 꿈의 가능성을 완전히 일축하지 못한다는 재반론이 가능하다.
세 번째로 ‘꿈은 비의식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한 의식 활동이라는 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내가 꿈을 꾸고 있나?”라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활동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꿈을 전적으로 비의식적인 상태라고 간주하는데, 실제 꿈에 관한 연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재반론이 가능하다. 실제 꿈에 관한 연구에서는 꿈을 꾸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면서 꿈을 꾸는 ‘투명한 꿈’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비판은 ‘꿈을 전적으로 비의식적인 상태’라고 취급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7. 회의론은 근본적으로 ‘기억’이나 ‘논리’에 대한 회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각각은 어떤 점에서 구체적으로 가해지는 비판인가?
#7-1. ‘기억’에 대한 회의 결여와 비판
회의론자들은 흔히 그들의 논증을 전개할 때 인간의 기억은 신뢰 가능한 것이라는 전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경우 “감각은 종종 오류를 저지른다”와 같은 감각적 환상으로부터의 논증의 경우는 “오류를 저지른 감각 경험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모든 회의론자들의 논증은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단어의 의미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기억 자체도 신뢰할 수 없으며, 회의의 대상이다. 따라서 회의론자들의 논증 자체는 성립할 수 없으며, 동시에 모든 논증 자체의 구성이 불가능해진다.
#7-2. ‘논리’에 대한 회의 결여와 비판
회의론자들은 흔히 그들의 논증을 전개할 때 ‘논리’는 회의에서 면제된 것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실제로 논리 자체도 회의에서는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이 논리 자체를 회의의 대상으로 집어넣으면 논증 자체를 전개할 수 없다.
따라서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기억’이나 ‘논리’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져야 하므로 자기-파괴적인 속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8. 르네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Ayer의 비판은 무엇인가?
르네 데카르트는 위의 모든 방법적 회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러한 회의와 생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회의와 생각을 하는 주체인 ‘나’ 자신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흔히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Cogito, Ergo Sum”이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데, 생각하는 주체인 나 자신의 존재만큼은 의심 불가능한 확실한 것이라는 명제를 Cogito 명제라고 한다.
Ayer는 Cogito 명제는 언어적 구조에 의하여 비롯된 오류로 인해 산출된 잘못된 명제라고 비판하였다. 르네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의 도출 과정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생각이나 회의가 존재한다”라는 것으로 종결되었어야 하지, 그 생각이나 회의의 존재로부터 그 생각이나 회의를 하는 주체의 존재가 반드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오류는 흔히 문장에서 생각한다, 회의한다와 같은 술어 자체가 주체를 동반하여 사용되는 언어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