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운명, 그리고 인간: 히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구절을 나는 반복하고 싶다. 그러므로 선언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신은 죽었다. 인간은 웃음으로써 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증명했기에, 신은 인간에 의해 살해되었다”라고.
너무 오래 전, 그것도 고대 그리스 시절의 사람이라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추정컨대 류트를 뜯었을 것이며 포도주를 음미할 줄 알던 히포클레스라는 사람이 구전 문학을 각색한 비극 《오이디푸스》의 전문(全文)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 생각에는 아마 당연하게도 이 글의 제목처럼 ‘신, 운명, 그리고 인간’에 관한 질문에 천착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밑도 끝도 답도 없는 질문이나 “작품의 마지막, 오이디푸스가 그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찌른 행위는 그가 운명에 대해 반기를 든 증거라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비교적 구체적인 질문들로 대표될 이들 질문들이 근본적으로 유래하는 하나의 질문은 결국, 내가 생각해보기에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쓸 수 있을 마성의 질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 관한 문학 수업에서 진행된 토론에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론자로써 참가하였다. 비록 나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논제였던 〈오이디푸스가 그 끝이 자신의 파멸임을 짐작하면서도 진실을 알고자 한 것은 옳다〉에 반대하는 나의 입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흔히 이런 주장에 대해서, 대중들은 마치 ‘진실 은폐’의 느낌 때문에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큰 반감을 가지곤 하는데, 실제 토론에서도 나는 바로 이 난관에서 고전했기 때문에 청중으로 하여금 ‘논제와 상관없는 근거’를 제시할 뿐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패배를 맛봤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나의 주장에 대한 뒤늦은 변론이라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토론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오이디푸스’의 판단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인 오이디푸스는 ‘살인자’를 찾아 도시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아폴론의 신탁을 듣고 다지고서는 그 의지를 도시 전체에 공표한다. 오이디푸스의 서사는 바로 이러한 오이디푸스가 바로 그 ‘살인자’라는 점을 드러내면서 도시에 역병과 고난을 가져다준 존재는 다름아닌 통치자 그 자신이었다고 독자를 설득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도시에 재앙을 몰고 온 장본인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신탁을 내린 ‘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의 ‘살인자 찾기’ 과정 중에 주요 단서 · 근거로 채택되는 신탁 또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이 아주 애매하다는 사실도 오이디푸스를 변호할 수 있는 유리한 요소이다. 신이 존재하고 사제가 그 말을 똑바로 전달한 결과가 겨우 아주 애매한 내용만을 담고 있을 뿐이라면, 나는 마치 니체마냥 그러한 신이나 사제를 섬길 바에야 그냥 한바탕 웃는 것이 낫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도 강력하게 미쳐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의구심이 들고 나면, 자연스럽게도 “만약 신의 존재가 부정된다면 오이디푸스에 대한 죄 지우기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존의 해석, 그리고 청중들이 오이디푸스에게는 ‘죄가 있다’라고 하는, 적어도 나의 시각에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작중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의 말이 이러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는가? 종교 역사에서 커다란 한 획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17세기 경의 구 · 신교 분리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종교의 부패가 만연한 역사가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근원은 ‘사제’들이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했다. 신과 ‘신탁’, 그리고 사제들의 위엄이야말로, 사제와 통치자들이 당시 도시와 인간 문명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실축시키지 않고서도 백성을 지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통치자였던 오이디푸스는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도시를 구원한 영웅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그러한 그의 지혜에 걸맞지 않게도 광적으로 ‘살인자 찾기’에만 집중하였고,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는, 단순한 지배 도구에 불과했을 ‘신탁’을 따랐다. 그답지 않은 비이성적인 판단을 그는 행했던 것이다.
신과 문명,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질문에 대하여, 나는 만약 신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들이 드리우는 줄을 끊고 신을 마음껏 경멸하는 불경을 저질러 파문되고야 말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괴상하고도 비논리적인 ‘신’을 믿을 바에야, 가장 위선적이고 악랄한 ‘신’들이 만들어내고 강요하며 회유하는 천국과 지옥을 오갈 바에야 그냥 간편하게 지옥으로 가고 말겠다. 나에게 있어 ‘신’은 죽었다. 그들은 그저 지배층, 지배 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기 위한 아주 효과 좋은 사회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마음껏 웃고 경멸하며 신을 살해해야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