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죽음, 인간

2022-03-02 0 By 커피사유

솔직히 말해서 어제 오후에 기숙사 게시판에 붙어있던 안내문 하나를 보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기회가 제공되지 못해서 억눌려 있던 욕구가 터져나왔을 뿐이다.

그러면 그 “터져나온 욕구란 무엇이냐”라고 누군가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을 다음의 사진으로 대신하려 한다.

서울대학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SNUPO) 제58회 정기연주회 포스터와 티켓.

클래식에 대하여 그리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이제 막 발을 담가보기 시작한 초보에 불과하지만 욕구만큼은 강력했던 나는, 너무 오랫동안 관현악을 즐기지 못한 욕구가 마침내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기대를 품었기 때문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저녁에는 대학의 오전이나 오후 강의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고 정리하는 것이 주된 일과임에도 불구하고 뒤로 미뤄두고서 저녁을 일찍 먹고 문화관으로 갔다.

3곡이 연주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C. Saint-Saens, Danse Macabre, Op. 40 [카미유 생상스, 죽음의 무도]」, 「F.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펠릭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그리고 「G. Mahler, Symphony No. 1 in D major “Titan”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제1번 “거인” 라장조]」가 바로 나의 결핍된 욕구를 채워줄 대상이었다.


3천원을 주고 산 팜플렛의 곡의 설명에는 연주회의 위 세 곡이 〈시대, 나라, 작풍 어느 하나에서도 서로 닮았다고 하기 어려운 세 작곡가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라고 한다. 닮았다고 하기 어려운 세 작곡가의 작품이 그렇다면 왜 하나의 연주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곧바로 이어지는 설명은 오늘 나의 감상 경험과도 사실상 일치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이 없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이질성이 도드라지는 가운데에도 묘한 연결을 찾아볼 수 있는 이 모양새는 공교롭게도 연주회의 메인 디시인 말러의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솔직히 첫 번째 곡보다는 두 번째로 연주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주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1번 라장조, “거인”〉에 주목이 갔다. 멘델스존의 곡은 바이올린 독주 선율과 관현악의 대립으로 구성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팜플렛의 설명 〈개인과 집단의 대립〉에서 나아가 세상을 대면하는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가하면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은 제1악장에서는 뻐꾸기 소리에 이끌려 ‘자연 속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대담하게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다가 해소되지 않던 음 하나가 갑자기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펑 – 하고 터지는 느낌을 주었고, 이은 제2악장에서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황홀한, 그러나 조금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랜틀러’라는 독일계 민속 춤곡이 이어지며, 제3악장에서는 장례 행렬과 집시 풍, 그리고 가곡 사이의 어딘가를 통과하는 독창적인 모호함이, 제4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몰아치는 죽음에 대한 공포1팜플렛에는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에 나오는 지옥의 삼연음 추락 모티브와 리스트가 작품 전반에 걸쳐 즐겨 썼던 “십자가 모티프”가 산발한다고 설명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와 그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추락과 나아감,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웅장하고 당당한 승리로 마무리되는데, 나는 여기서 “죽음”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대면하는 나 자신을 담은 듯한 멘델스존의 곡,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듯한 밀러의 곡. 이 두 곡에 대한 평가를 나는 이렇게 내리고 나자 그렇게 감명깊지는 못했지만 같은 연주회에 서곡으로 포함된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까지, 이 연주회에서 다루어지는 3개의 서로 제각각인 곡들이 어떤 부분에서 공통적인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만 같다.

결국 세 곡 모두 “죽음과 인간”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유한한 수명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집단이나 사회와 대립하기도 하고 협조하기도 한다. 인간은 뻐꾸기 소리와 같은 일종의 모티프에 이끌려 때론 조심스럽게, 때론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자신의 억눌렸던 욕구가 어느새 펑 터지는 것도 겪어보고, 황홀한 상상과 경험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최종 안식처, 최종 종착지는 죽음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첫 번째 곡의 제목 〈죽음의 무도〉이야말로 이 귀중한 연주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음악은 나에게 질문과 가치를 남겨주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죽음”이라는 잊으면 안 될 인간의 기본적인 운명을.


2022. 3. 3. 추가.

음악적 감상에 젖은 감성이 여전히 남아있는 채로 일어나서 오늘 할 일들을 정리하다가, 어제 연주회 중간 20분 인터미션 intermission에서 「F.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에 대해서 내가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메모한 것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여 여기에 달아둔다.

특히. F.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개인과 집단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에서 나는 정곡을 찔린 것 같다. 바이올린 독주 선율에서 나는 나를 읽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곡에서 바이올린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합주부〉의 존재를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두 선율 사이의 갈등은? 곡의 제3악장처럼 나의 서사도 궁극적인 갈등 해소에 도달할 수 있는가? 나에게, 제1악장은 얼마나 길게 있을 것인가?

2022. 3. 2. 연주회 메모.

2022. 3. 17. 추가.

3월 2일의 연주회 이후로 〈F.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되었다. 특히 나는 바이올린 독주 선율과 오케스트라 합주 선율의 뚜렷한 교환과 대비가 두드러지는 제1악장을 가장 좋아하게 되어 버렸는데, 오늘 선형대수학 독학을 처음 시작한 이후 최근 지속되는 기분 준위의 제1상태(바닥상태) 때문인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여기에 달아둔다.

나는 최근 들어 내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이지만 어찌되었든 귀책 사유가 나에게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 나의 서사에서 〈F.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의 제1악장을 끝내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변명이란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비용이 제1악장을 유지시키는 비용보다 더 크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자기합리화의 결과이므로 한 번은 의심과 검증을 거쳐야 할 영역의 것이다. 어쩌면 3월 3일에 추가한 3월 2일자의 메모에서 “나에게, 제1악장은 얼마나 길게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 자신에 달려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22. 3. 17. 첨언.

주석 및 참고문헌

  • 1
    팜플렛에는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에 나오는 지옥의 삼연음 추락 모티브와 리스트가 작품 전반에 걸쳐 즐겨 썼던 “십자가 모티프”가 산발한다고 설명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