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데카당으로서의 자유, ‘살아있는 것’의 〈힘에의 의지〉
1. 서론
아래의 모든 내용은 최근 몇 주 동안 내가 내 고질적인 우울증(기분 제1준위 상태의 장기간 지속)을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니체’를 읽으면서 스스로가 항상 마음을 다잡고 학문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을 나름대로 구축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혹시 내가 정신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여 보아야 할 것으로부터 눈을 돌렸거나 길을 잃은 경우를 대비하여 스스로를 다시 고양시킬 수 있도록 알기 쉽고 비교적 단시간 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혹여 나의 정신이 마침내 극단적인 우울증으로 인해 엉망이 되거나, 스스로의 존재 의의에 대하여 망각하는 경우, 이 글을 읽고서 필히 있어야 할 그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바이다.
2.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제2단락
아래의 발췌문에 나는 데카당1‘데카당’은 니체 생존 당시 유럽에서 전개된 기존의 도덕이나 관습을 타파하는 타락한 문학 · 예술적 사조를 말하는 용어이지만, 나는 ‘데카당’의 니체의 용법대로 현실과 그 고통에서 도피하는 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나는 또한 ‘반(反)-데카당’을 니체가 그렇게 강조한 현실과 그 고통에 직면하고 맞서 싸우는 자로 받아들인다.과 반(反)-데카당으로서의 니체라는 부제를 붙인다.
내가 데카당이라는 사실은 별도로 하고,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한 나의 증거는 다른 무엇보다 내가 불행한 사태에 대해 항상 적합한 수단을 본능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 데카당은 그 자체로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수단을 선택하는 반면에 말이다. 나는 총체로서는 건강했으나, 특정한 각도로서나 특수한 면에서는 데카당이었다. 절대적인 고독을 그리고 습관적인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을 지향하는 에너지, 나 자신을 더 이상 보살피거나, 나 자신에게 봉사하게 하거나, 나 자신을 치료받게 하지 말라는 압력 ― 이것이 그 당시 내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 본능이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나는 내 자신을 떠맡아, 내 스스로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 : 그럴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 모든 생리학자가 인정할 것이지만 ― 사람들은 근본적으로는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전형적인 병든 존재는 건강해질 수 없고, 자기 스스로 건강하게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 전형적인 건강한 존재가 그 반대인 반면에 말이다. 그에게는 심지어 병들어 있는 것이 삶을 위한, 더 풍부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이다. 그래서 내게는 현재가 사실상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시기로 여겨지는 것이다 :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삶을, 말하자면 새롭게 발견했다. 나는 모든 좋은 것과,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맛볼 수 없을 사소한 것들까지 맛보았다 ― 내 건강에서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는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다음의 사실을 주목해보라 : 내 생명력이 가장 낮았던 그해는 바로 내가 염세주의자임을 그만두었던 때였다 : 나의 자기 재건 본능이 내게 비참과 낙담의 철학을 금지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떤 점에서 우리가 제대로 잘되어 있다는 것 Wohlgerathenheit 을 알아차리는 것인가! 제대로 잘된 인간은 우리의 감각에 좋은 일을 한다는 점 : 그의 육체와 정신이 천성적으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동시에 좋은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알아차린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을 맛있게 느낀다 ; 자신에게 유익한 것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의 만족감과 기쁨은 중지해버린다. 그는 해로운 것에 대한 치유책을 알아맞힐 수 있다. 그는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안다 ;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는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모아서, 자기만의 합계를 낸다 : 그가 선택의 원칙이고, 그는 많은 것을 버려버린다. 그가 교제하는 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지역이든 그는 언제나 자기의 사회 안에 처해 있다 : 선택하면서, 용인하면서, 신뢰하면서 그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자극에 서서히 반응한다. 오랫동안의 신중함과 의욕된 긍지가 그를 그렇게 양육시켰다 ―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극을 검사해보지, 그것을 마중나가지 않는다. 그는 ‘불행’도 ‘죄’도 믿지 않는다 :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 조절하며, 잊어버릴 줄도 안다 ― 그에게는 모든 것이 최대한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는 충분히 강하다. ― 자,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다 :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진술한 것이니.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 · 우상의 황혼 · 안티크리스트 · 이 사람을 보라 · 디오니소스 송가 · 니체 대 바그너》,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334-335쪽.
#2. 2022학년도 제1학기 《서양철학의 고전》 레포트 2: 니체의 사상과 논의
아래의 글은 나 자신이 2022. 3. 28.에 금 2022학년도 제1학기의 《서양철학의 고전》 강좌에서 ‘니체’에 관하여 제출한 레포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1.
그러나 앞서 살펴본 니체 철학의 개념들과 ‘힘에의 의지’와의 관계를 살펴볼 때, 니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강조한 것이란 ‘권력 및 폭력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니체가 강조한 것은 자기초극으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능동적 니힐리즘’은 ‘힘에의 의지’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가치와 규범이 우리를 고양 · 강화시켜주면 유지 또는 도입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하는 움직임, 즉 인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한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 ‘군주도덕’에서 니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 탄력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처해나가고 극복하는 인간’이다. 인간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직면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니체의 〈영원회귀사상과 운명애〉였다. 니체 철학의 전반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폭력성’과 ‘지배’가 아니며,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숙할 때, 주어지는 삶의 고통을 극복해 내었을 때의 ‘고양’과 ‘강화’이다. 니체는 신체적 폭력이나 잔혹함을 포함하는 방식, 즉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발현되는 것으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강조하지 않았다. 니체가 강조한 것은 스스로를 극복하는 형태로서의 ‘힘에의 의지’였다.
니체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당대 유럽 전역이 물들어 있었던 삶에 대한 염세주의적인 태도라는 점도 니체의 철학을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연결지어 이해하려는 시도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니체는 삶에 대한 의미와 인간의 모든 욕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염세주의의 반대로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니체의 〈예술 철학〉은 그리스 비극의 ‘염세주의에 대한 극복’이라는 측면에 집중하고 있으며, 〈영원회귀사상과 운명애〉는 자신의 삶이 끝없이 반복되는 염세주의적인 상황 속에서도 반-데카당스적인 움직임, 즉 모든 고통과 무의미를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인간에 집중하고 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염세주의에 대한 극복을 위해 제시된 것이지, 나약함에 대한 비판으로서 또는 권력 추구에 대한 예찬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파시즘과 나치즘에서의 대외적 침략 정책과 무력 추구 등은 니체 철학에 의하여 합리화될 수는 없다. 니체 철학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자기 극복’이라는 점, 그리고 니체 철학은 ‘염세주의에 대한 대항’으로서 제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힘에의 의지’는 ‘다른 존재를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의지’라기보다는 ‘삶의 고통과 무의미함 앞에서도 삶 그 자체를 긍정하면서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루카치 등이 가졌던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이어진 니체 철학’이라는 관점은 따라서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2.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니체 철학은 그 대표적인 개념인 ‘힘에의 의지’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뉘앙스 때문에 평등 · 인류애와 같은 오늘날의 도덕적 관념과 상호 충돌하거나 ‘물리적 힘과 충돌을 갈망하는 의지’로 읽히면서 수많은 오해를 낳았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기반을 이루는 사상으로서 니체 철학을 조명하는 시각은 그러한 오해 중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니체 철학은 타인에 대한 정복과 폭력을 주장하는 파시즘과 나치즘을 결코 합리화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히려 니체 철학이 담고 있는 내용이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회의주의적 관점, 즉 염세주의와 허무에 대한 니체만의 대답이자 처방, 즉 ‘자기초극’이다. ‘힘에의 의지’로 대표되는 니체 철학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그의 고찰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고통을 극복하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힘의 철학’이라기보다는 ‘극복의 철학’이다.
연구총서 #4. 니체의 사상과 논의 中
#3. 〈사유 #44. 변화와 의미〉: 존재 의의에 관한 5가지 테제
아래의 글은 나 자신이 2022. 3. 22.에 블로그에 쓴 〈사유 #44. 변화와 의미〉의 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1.
사물의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언제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의미 있다고 표현하는가? 의미 있음이란 무엇인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사물들이 실존하는 현실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현실과 합치되지 않는 상상이 도처에 가득한 관념론적 철학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진실은 실존하는 세계에 있지 실존하지 않는 상상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사물이 의미 있다고 표현되는 때는 해당 사물이 그 사물을 평가하는 자에게 있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거나 변화를 일으킬 때이다. 연필, 공책과 같은 사용을 요구하는 사물들은 그들의 사용자들이 바로 평가자들이며, 그 평가자들을 욕구나 필요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이 실현된 상태로 변화시키므로 ‘사용 가치’, 즉 의미를 가진다. 도서와 예술과 같이 당장에 욕구나 필요를 실현시켜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은 그들의 평가자들인 사용자들이 새로운 영역이나 사상에 눈을 뜨게 해 주거나, 세계에 존재하는 특정 영역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평가자들의 정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기 때문에, 혹은 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반면 사물이 의미 없다고 표현되는 때는 해당 사물이 그 사물의 평가자에게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능력이 결여된 것으로 판단되는 때이다. 문학 작품을 비평하면서 어떤 삼류 작품이 의미가 없다고 표현하는 때는 그 작품이 독자로 하여금 새롭거나 신선한 것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고 판단될 때, 즉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끔 독자를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판명되었을 때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어떤 행위나 운동이 의미 없다고 평가하는 때는 그 행위나 운동으로 인해 그 어떠한 사회 · 인간 역사의 변화도 초래되지 않은 때이다.
#3.
사물의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이 그 사물이 가지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 또는 그 사물이 일으키는 변화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우리의 관찰 결과라면, 즉 ― 현실에 대한 관찰이 변화야말로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는 근본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면 ― 사물이란 ‘일정한 형태를 갖춘 모든 물질적 존재 · 대상’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한 인간, 즉 개인의 의미, 개인의 실존 의의는 그 개인이 의미를 평가하는 자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지 또는 그 개인이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달려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실존 의의의 평가에 관심을 가지는 거의 유일한 이란 다름 아닌 개인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 대한 실존 의의의 존재 여부는 이제 그 사람이 스스로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 또는 그 자신이 스스로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4.
변화란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가 같지 않다는 개념의 함축이기 때문에, 만약 개인의 실존 의의 ― 모든 사람의 실존은 ‘살아있음’으로도 표현되고 ‘살아있음’은 흔히 ‘삶’으로도 지칭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는 개인의 삶의 의미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의의 ― 가 스스로가 자신에 대하여 내리는 변화의 능력 또는 변화 행위의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에 달려 있다면, 한 개인의 삶이 의미를 가진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란 그 개인이 어제의 자기 자신과 오늘의 자기 자신이 같지 않음을 느끼거나 인지하는 때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개인, 즉 어제와 동일하다고 스스로를 규정짓는 개인은 스스로의 실존 의의가 없다고 볼 것이며, 오직 어제의 자신에 비해 오늘의 자신은 무언가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변화하는 개인만이 스스로의 실존 의의가 존재함을 명확히 인지할 것이다.
#5.
지금까지의 개인은 스스로의 실존 의의를 결과로부터 찾으려고 했다. 개인은 자신의 일생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게 될 것, 그리고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기다리는 것. 그러한 가장 나중에 오는 것으로써 스스로의 실존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존하는 사물에 대한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의 정체란 변화에 대한 인지에 다름 아니다.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의미는 변화하는 자신 그 자체에서, 지금 있는 것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사유 #44. 변화와 의미〉 전문.
4. 〈사유 #45. 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의 일부
아래의 글은 나 자신이 2022. 4. 2.에 블로그에 쓴 〈사유 #45. 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 중 일부를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1.
니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너의 삶이라면, 너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약 2년 전부터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다듬어왔다.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 대답은 니체가 도출한 대답과 유사한 것 같다. 그러나 니체의 대답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 반면, 나의 대답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2.
니체의 대답은 〈영원회귀사상과 운명애〉로 요약할 수 있다. “영원히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똑같은 삶을 산다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영원회귀〉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이나 체념에 쉽게 빠져들곤 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 즉 〈운명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또는 바람직한 인간 ― 즉 〈초인〉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들마저도 긍정하며 스스로의 성장에 이용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매 순간마다 인간 스스로를 엄습하는 것이 고통이지만, 이 고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고통 뒤에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결과’ ― 이를테면 ‘유토피아’니 ‘내세’와 같은 하나의 ‘소망’ ― 을 기준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고통 자체, 그리고 그 고통이 가져다주는 스스로의 변화를 긍정하면서 삶의 매 순간에서 존재의 충만과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며, 이 태도 속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의 의미라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즉 ― 니체는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 보일 수 있는 인간 삶의 의미를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찾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를 보았던 이들은 삶의 종국적인 결과는 죽음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상실되며 체념이 만개하는 염세주의적인 관점으로 빠져들지만, ‘과정’을 보았던 니체는 삶의 매 순간이 가져다주는 ‘변화’, 즉 자신의 ‘살아있음’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강조해온 것이다.
#3.
‘살아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언제 우리는 사물이나 존재가 ‘살아있다’고 말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변화’의 유무가 어떤 존재가 살아있다고 표현하기 위한 조건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흔히 어떤 대상이 ‘죽어있다’라는 표현을 우리는 그 대상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거나 변화하지 못할 때에 사용한다. 이를테면 죽은 꽃과 살아있는 꽃을 판가름하는 핵심은 다름 아닌 그 꽃이 다음 해에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는가 없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꽃이 이듬해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그 뒤로도 계속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꽃이 ‘죽어있다’고 결론짓고 또한 그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만약 꽃이 이듬해에 꽃을 피우며, 겨울을 지낸 이후 다시 꽃을 피우게 도니다면 우리는 꽃은 ‘살아있다’고 표현한다. ‘변화의 유무’야말로 ‘살아있음’을 정의하는 핵심에 다름 아닌 것이다. … (후략) …
#4.
… (전략) …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수행하는 다음과 같은 행위의 총합이다: 대학이라는 땅 위에서 끊임없이 각종 논문 · 글 그리고 교과서를 읽으며 이해를 시도하는 행위, 교수의 강의를 듣고 생각하는 행위,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행위. 이러한 모든 행위, 호기심 · 무지 · 무능이 나에게 선사하는 강력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에 강하게 추동됨으로써 스스로의 안에 강한 저항 또는 열정의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 때 실행하게 되는 그러한 모든 행위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모든 생각들의 전개 ― 이것들이야말로 나의 몸부림이자 비틀거림인 것이다. … (후략) …
〈사유 #45. 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 中.
5. 〈열등감〉의 일부
아래의 글은 나 자신이 2022. 4. 6.에 블로그에 쓴 〈열등감〉 중 일부를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3.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이제 나와 나가 아닌 것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나는 나가 아닌 것에 좌우되거나 이들을 목격하면서 스스로의 무능이나 무지를 목격한다. 그것들은 나를 강력히 추동한다. 나아가야 한다 ― 이것이 그들의 강력한, 그리고 단 하나의 요구이다.
#4.
무능과 무지 앞에서 나는 왜 추동되는가? 왜 나는 나아가거나 나아가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유약함에 대한 반동이다. 할 수 없음의 반대에는 할 수 있음이 있다. 알 수 없음의 반대에는 알 수 있음이 있다. 나는 추동으로서 스스로를 없음에서 있음의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과 이것이 같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나의 이러한 사상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묘하게 닮아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다.
#5.
열등감은 무능과 무지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감, 즉 자신보다 강한 것들이 자신을 좌우한다는 것에 대한 인간 본연, 나의 반동이다. 나는 그것들을 정복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독립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무덤까지도 이들에게 끌려다니고야 말 것이다.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고 싶다.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은 것이다. 설령 그 주체와 자유라는 것이 나에게 주는 것이 끝없는 심연과 공포, 아무것도 정해진 것도 없으며 확실한 것도 없다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고 할지라도.
#6.
그러니까 나를 움직이는 것은 열등감인 셈이다. 나는 나 자신을 좌우시키는 것, 나 자신보다 더 뛰어나거나, 탁월하거나, 강하다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항하거나 도전하고 싶어한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힘에의 의지에 추동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전에 나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그것 ― 생존 의지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변화를 갈망하는 것이고, 또한 그 변화로서 스스로가 정의되는 것이기에,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모든 것 ― 적어도 시체나 썩은 것이 아닌 그 모든 것들은 살아있음이라는 그 자신의 속성으로 인하여 힘에의 의지를 갈망하는 것이다. 나 또한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7.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 나는 ‘죽어있는 정신’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힘에의 의지를 있는 힘껏 갈망하며 또한 발휘하려고 한다. 그것이 나여야 한다.
〈열등감〉 中.
6. 〈자기-살해와 살아있음〉의 일부
아래의 글은 나 자신이 2022. 3. 31. 블로그에 쓴 〈자기-살해와 살아있음〉 전문을 옮긴 것이다.
#1.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과의 투쟁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투쟁으로 환원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 자신 대 나 자신의 투쟁으로 환원된다. 이 투쟁으로의 환원은 그 모든 것과의 투쟁은 다름아닌 나 자신의 살아있음의 증거라는 것을,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해 준다.
#2.
나 자신과의 투쟁은 결국은 어떤 종류의 살해인 셈이다 ― 나 자신을 나 자신이 성공적으로 살해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가 나 자신의 살아있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죽어있는 것이다. 애초에 모든 시체는 스스로를 살해할 수 없다.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스스로를 살해할 수 있다.
#3.
살아있는 것은 죽어있는 것의 반대로서 정의된다. 그러므로 모든 시체가 아닌 살해자는 마땅히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자신에 대한 살해자는 스스로를 찌른 그 칼을 높이 들고서 이 칼에 묻은 피야말로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소리 높여 칭송할 것이다 ― 어제의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비겁한 이들은 모두 시체에, 비겁한 시체에 불과할 뿐이니까 ―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 자신을 죽여버림으로써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탁월한 정의인가. 살아있는 것이 죽어있는 것의 반대로서 정의된다는 사실은 죽음으로부터 반대로 살아있는 것이 기원한다는 바로 지금의 논의와 동형적이니.
〈자기-살해와 살아있음〉 전문.
7. 다시, 니체로
아래는 제2절에서 다루었던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의 일부를 다시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모든 것은 니체로부터 시작하였으니, 다시 니체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 (전략) … 제대로 잘된 인간은 우리 감각에 좋은 일을 한다는 점 : 그의 육체와 정신이 천성적으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동시에 좋은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알아차린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을 맛있게 느낀다 ; 자신에게 유익한 것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의 만족감과 기쁨은 중지해버린다. 그는 해로운 것에 대한 치유책을 알아맞힐 수 있다. 그는 우연한 나쁜 경우들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만들 줄 안다 ;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는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모아서, 자기만의 합계를 낸다 : 그가 선택의 원칙이고, 그는 많은 것을 버려버린다. 그가 교제하는 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지역이든 그는 언제나 자기의 사회 안에 처해 있다 : 선택하면서, 용인하면서, 신뢰하면서 그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자극에 서서히 반응한다. 오랫동안의 신중함과 의욕된 긍지가 그를 그렇게 양육시켰다 ―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극을 검사해보지, 그것을 마중나가지 않는다. 그는 ‘불행’도 ‘죄’도 믿지 않는다 :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 조절하며, 잊어버릴 줄도 안다 ― 그에게는 모든 것이 최대한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는 충분히 강하다. ― 자,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다 :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진술한 것이니.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 · 우상의 황혼 · 안티크리스트 · 이 사람을 보라 · 디오니소스 송가 · 니체 대 바그너》,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334-335쪽.
주석 및 참고문헌
- 1‘데카당’은 니체 생존 당시 유럽에서 전개된 기존의 도덕이나 관습을 타파하는 타락한 문학 · 예술적 사조를 말하는 용어이지만, 나는 ‘데카당’의 니체의 용법대로 현실과 그 고통에서 도피하는 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나는 또한 ‘반(反)-데카당’을 니체가 그렇게 강조한 현실과 그 고통에 직면하고 맞서 싸우는 자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