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필요한 것
나에게 필요한 것은 ‘멈춤’이 아니라 ‘속도 조절’이다.
앞을 보고 끊임없이 달려가는 나에게 누군가는 그 자리에 멈추어 만족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교한다. 너무 빠르게 달려가는 기관차는 터질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그들의 말이란 결국 죽음의 속삭임에 다르지 않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전진하기 때문에, 멈춘 것은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나를 규정하는 것은 고등학교 때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복수심과 열등감, 그리고 니체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출발점은 전자였으나 나는 자기 변호를 위해 후자를 끌어들였다. 처음에 니체는 나를 병들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반대로 니체가 나를 병으로부터 회복하도록 도와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니체와 나의 방황에 따르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양태의 쉼이다. 어떤 종류의 쉼을 선택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강조한 바가 있는데, 분명히 옳은 말이다. 올바르지 않은 쉼을 선택하는 것은 건강에 아주 해롭다. 스스로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방탕과 불성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쉼’은 올바른 쉼이 아닌 단지 하나의 일시적인 쾌락이자 마약과 같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올바른 양태의 쉼은 이러한 불결한 쉼과는 다르다. 그것은 쉼을 즐기는 자의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만든다.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게 해 준다. 그것은 개인이 새로이 스스로를 환기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러한 쉼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살아있음의 증명 과정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현실의 수많은 어려움과 비극 속에서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며,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지고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안으로부터 솔직하게 찾아나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항상 청결하고 건강하게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올바르지 않은 쉼은 개인을 병들게 하므로, 나는 올바른 쉼을 가까이 하고 올바르지 않은 쉼은 멀리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죽어있는 멈춤이 아니라 살아있는 속도 조절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에서 설교하는 마음의 평화와 안식 따위가 아니다. 나에게는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