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는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야수는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나의 야수란 곧 다른 이들을 짓밟고 올라서려 하는 바로 그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인간의 야수적인 의지란 자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 않던가. 한정된 자원 속에서 가장 최고의 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 이 욕망은 태초 이래 모든 동물이 가진 바로 그것,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던가.
경제학은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불평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자원 배분 구조는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실패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실패하였는가? 인간의 본성을 너무 단순하게 평가하였기 때문인가? 비슷하긴 하지만 이는 틀린 대답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성과 후에 강제된 본성을 혼동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니체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란 공격적이고 더없이 잔혹한 본성 그 자체이다. 그것 자체가 공동체를 위협하지 않는 한 그것을 억지하는 것은 한 개인을 병들게 할 뿐이다.
많은 이들은 오늘날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 관념을 들어 나의 야수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 자체가 이미 병든 증거가 아니던가. 인간 자신의 잔혹한 모습, 그 공격적인 모습, 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바로 그 마음 자체를 부정적인 것만으로 매도하는 그것 자체가 이미 병든 모습이다. 그러한 공격적인 본성, 바로 이 야수야말로 인간에게 태초부터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를 억압함으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공격하면서 병들게 되는 것이다. 니체가 지적한 것 처럼, 그리고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수는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 야수는 오히려 공동체를 위협하지 않는 한 가능한 자유롭게 풀려져서 마음껏 눈에 보이는 것을 공격하고 자신의 힘을 강화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생리학적으로 옳은 것이다. 한 개인을 병들게 하지 않게 하는 길인 것이다. 스스로의 더 강한 힘을 추구하려는 그 의지를 도덕으로 부정당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강해질 수 있음, 더 충분히 강력한 능력과 탁월한 인간이 되기를 위한 그 힘에의 의지에 대한 추구.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유약하고 병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까지에 이른 오늘날의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긍정할 것을 설파하였다는 전후무후한 증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건강함과 당당함, 살아있음의 증거가 되는 이 자연스러운 본성, ‘야수’를 길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적’을 필요로 하며, 그러한 적이 있음으로 하여 건강해지는 것이다. 경멸할 이들은 경멸하고 영예를 부여할 이들에게는 마땅한 영예를 부여하면서,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오직 나 자신이 스스로 확립한 이 가치 기준에 의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그러한 진정으로 자유로우면서 주체적인 야수가 되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