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하지 못한 다자이 오사무
#1.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인 〈인간 실격〉에서 이렇게 썼다.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저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위협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미신은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뭔가 미신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저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참 행운아라는 말을 정말이지 자주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거고 그렇다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의 관찰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2.
괴로움. 실용적인 괴로움. 물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인간 실격〉에서 화자 요조가 지적하는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은 왜곡되거나 날조된 괴로움이다. 요조의 지적에는 자신이 겪는 괴로움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물질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냉소가 깔려 있다.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닌가”하고 요조가 의심하는 것에는 자기 자신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며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행위가 깔려 있다.
그러나 요조 또한 ‘인간’이 아니던가. 요조는 스스로의 인간됨을 기각하지만 그것은 ‘요조 자신’과 인간의 차이에서 일차원적으로 기원하는 오류이다. ‘요조 자신’과 현실 속의 인간이라는 차이는 더 정확하게는 요조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과 현실 속의 인간의 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요조는 이상적 인간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조는 자신의 존재가 정확히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요조의 ‘인간임을 부정하기’는 이 망각에서부터 출발한 죄의식에서 기원한 정신병에 다름 아니다.
#3.
그런 사람들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 세상 모두에게 깊은 회의를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확신하며, 살기 위한 투쟁을 지속하는 이웃들이야말로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조가 느끼는, 나아가 다자이 오사무가 느끼는 바로 그 괴리, 괴로움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백히 느끼기 때문에 나는 자신 뿐만이 아닌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 그마저도 모두 인정하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화자가 구역질을 연신 내뱉는 그러한 위선과 거짓말마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자 자연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오히려 이용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개인이 회의를 언제 느끼는지 아는가? 온전히 현실에 기초한 엄격한 관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한 개인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자그마한 그의 지식을 비틀고 짜집어 만들어낸 현실과 닮았지만 현실 그 자체가 아닌, 존재하지 않는 상(狀)과 현실이 충돌함을 확인하였을 때. 오직 그 때만이 개인이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개인은 무존재 또는 비존재의 영역인 이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 생리학적으로 물질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은 현실 속에서 산다. 오직 개인은 이상 속에서 살 수 있다거나 산다고 착각할 뿐이다.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거부하려는 그 행위는 하나의 정신병에 다름 없다. 그것은 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너무 유약하기’ 때문인 것이며 나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찰된 사실을 거부하려는 행위, 필사적으로 목격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행위야 말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가장 크고 어리석은 걸림돌이다. 바꿀 수 있으려면 우선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한 깊은 회의를 느끼는 자라면, 오히려 그러한 이상은 방향이자 종착지로 생각해야 하지,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 그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도피이지, 직면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