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47. God Save the Equality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평등하지 않은 죽음
이 글은 2022. 9. 19. Chalkboard에 작성한 글 〈평등하지 않은 죽음〉을 다듬은 것임을 서두에 알립니다.
조금 전 나는 영국 여왕 고(故)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State Furneral)을 BBC 라이브를 통해 지켜보았다. 식민지 지배의 흔적으로 얼룩진 대영제국, 그리고 식민지 지배의 흔적으로 얼룩진 우리나라 역사의 한 획이 마치 거기 보이는 듯 했으나, 엘리자베스 2세는 그래도 기품 있었고 또한 자신의 의무를 다한 여왕이었기에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낸 한 사람에게 진심어린 애도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던가.
BBC 생중계 화면에 비추어지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은 오랜 입헌군주정의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답게 아주 화려하면서도 엄숙했다. 교회 성가대와 파이프 오르간이 엄숙함과 웅장함을 자아냈고, 추도 미사에서는 여왕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헌신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든 것이 단 한 사람, 고(故) 엘리자베스 2세를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영국 시민들도, 추모를 위해 도착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수장들도, 그리고 나처럼 마지막 길을 화면을 통해 함께 지켜본 세계의 수많은 이들도 모두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려하고 엄숙한 장례식의 주인공, 여왕을.
그러나 모든 화려함 뒤에는 잊혀지지 않아야 할 이야기들이 있고, 잊혀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여왕의 마지막 화려한 모습에 가려진 것을 나는 반드시 기억해두어야만 한다.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지 않다.” 이 명제야 말로 내가 기억해두어야만 하는 사실이다. 여왕의 국장을 주관한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는 대성당의 연단에 올라 만인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며, 여왕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설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주교의 거짓말이지만, 동시에 종교의 아주 오래된 거짓말이자 우리의 아주 오래된 거짓말이기도 하다. 죽음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면 여왕의 장례식에 쏟아진 세계와 관심과 애도만큼이나, 장례식을 진행하는데 사용되었던 자원들만큼이나의 사물이나 사람들은 마땅히 그 어떤 다른 누군가의 경우에도 똑같이, 바로 그곳에 그때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엇이 있었는가. 여왕이 아닌 다른 어떤 노인의 죽음에는 무엇이 거기에 있었는가.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라는 그 유명한 말은 모든 사람의 삶은 생물학적 죽음이라는 결말로 귀결된다는 의미일때만 유효하다. 그러나 그 이외 ― 즉, 죽음 이후 고인을 보내는 그 모든 모습과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그저 실언(失言)에 불과할 뿐이다. 이름모를 한 노인의 죽음을 여왕의 죽음과 비교해보기만 해도 분명하다. 여왕은 기억되었지만 노인은 그렇지 못했다. 여왕은 왕실 전용 성당에 잠들게 되었지만 이름모를 노인은 어디에 잠들었는지 모른다. 죽음 앞에서 ‘평등’이 공공연히 설교되고 전파되는 것이란, 그 말 속에 숨어있는 자기 모순의 심각성만큼이나 끔찍한 위선이자 기만이며, 또한 그 말 속에서 비추어지지 못한 수많은 고인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한 시대를 대표했고 이제 떠나는 여왕의 죽음 앞에서 나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장례식의 주인공 여왕이 아닌, 여왕이 받은 전 세계적인 애도와 추모와는 정반대에 있는 죽음들을. 잊혀지는, 그리하여 여왕의 죽음과 더할 나위 없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러한 죽음들을. 70여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군주’라는 의무를 다했던 여왕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여왕이 받은 것과 동일한 존경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그러한 죽음들을.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화려하고 엄숙한 장례식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점을 나는 기억해야 한다. 떠나는 여왕의 모습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리하여 정말로 기억되어야 하지만 기억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사족(蛇足)
고(故) 엘리자베스 2세의 마지막 길에는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이 울려퍼졌다. 모두를 위한 God Save the Equality가 아닌, 여왕을 위한 God Save the Queen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