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앞에서의 절망
대학(大學) 안에서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점점 더 헤어나올 수 없는 강력한 절망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도움을 요청해보았자 아무도 도와줄 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도울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내가 느끼는 이 종류의 절망은 나 자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이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구원자가 되어야만 한다.
학문 앞에서의 절망 ― 이것이 내가 나의 만성적 우울을 정의내리는 방법이다.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결부된 이 희한한 종류의 절망이란, 한 개인의 이해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라는 점에서 구원책이 마땅히 없다는 점에서 더욱 절망적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받을 수 있는 것이란 잠깐의 위로일 뿐이지 궁극적인 해결책 ― 즉 이해가 아니기에,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절망이기에 그 앞에 선 나는 더욱이 무너지는 심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내가 질문해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해되지 않음이 그 질문으로써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이해하기 위한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다른 이들은 훨씬 빠르게 나아가는 것만 같다. 그 사이에서 나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지만,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그리하여 좀 더 인생을 여유있고 아름답게 살 수 있었을 가능성마저 버리면서 버티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한없이 부족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도 이제는 힘들어질 지경이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자그마한 두뇌로 세상을 이해해보겠다는 시도이다. 그러나 배움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스스로에게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하라고 요구하는 초석이어야 한다.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회가 그러한 규칙에 따르기 때문에. 사회를 바꿀 힘이 없는 유약한 개인은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에서 현실을 택하는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 시간이 있다, 경쟁에 매몰되지 말 것.”이라는 구호 따위는 그 경쟁에서 승리한 이나 외칠 수 있는 공허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과연 자신의 사회적 생존, 자신의 사상적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그런 구호를 당당히 외칠 수 있을까? 경쟁 사회 속에서 유일한 진실이란 제한된 시간 속에서 가능한 한 더 많은 이해와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내 학문 앞에서의 절망이 쉽사리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름아닌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