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
은근히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좋아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맏이로 태어났고,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특성상 물어볼 이, 의지할 이 하나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일 뿐이다.
아무것도 없던 학생회에서 학생회 운영 규칙과 제도들을 만들어나갔던 내 피땀어린 중학교 학생회장 시절, 유클리드 기하학원론과 수학의 정석과 씨름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꿈꾼 끝에 얻어낸 과학고등학교 입시, 그리고 그 과학고등학교에서의 악착같은 노력으로 끝내 도달한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아는 선배도 없었다. 내가 첫 번째였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서럽기도 했다. 먼저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을 걸어간 이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내가 방황하던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고민들과 한숨도 내쉬곤 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고민들을 할 시간도 없이 내 삶은 숨가쁘게 흘러갔고, 현실에 길들여진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결국 어떠한 척박한 대지를 처음으로 개척하는 개척자의 삶을 살게 된 것. 그것이 내가 살아온 삶이었기에 나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 무(無)로부터 출발하는 것. 그렇기에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것.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할 것이 아니었던가. 맨땅에 헤딩이란 그래서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 그것 이상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