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 #1. 선물과 ‘어른’
편지지(編志誌)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쓴 편지들을 모아 기록하여, 과거에 품었던 뜻과 마음들을 정리해두는 공간입니다.
아래 글은 2022. 1. 5. 필자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어머니께,
오랜만에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거의 대학에 상주한다시피 살고 있는 저로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이야기들을 써서 보내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는 통화로도 언제든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굳이 편지를 보낼 필요가 높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만,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편지에 한 자 한 자 눌러담을 수 있는 이야기들은 글의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보다도 진솔하고 담백해야 한다는 제 특유의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제 특유의 고집을 뚫고서 편지를 쓰고자 하는 욕구가 올라온 것은 다름 아닌 금해 어머니의 생신 때 제가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렴 괜찮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또 이미 며칠 전에 내려와 함께 선물도 골랐지 않았느냐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중한 사람의 기념일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참으로 서러운 일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고 위해주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장소에서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고 단순 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진정한 선물 행위란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저는 제 자신을 챙기기에도 아직 급급해서 그런지 진정한 선물을 드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모양입니다.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 가면서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선물 행위라면,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선물들을 어머니께 받은 것이 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교사라는 꿈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딸의 양육에 시간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당신을 생각하시기보다는, 자신이 아닌 아들과 딸을 ‘주체’로 생각하시면서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갓 대학에서 비로소 세상을 온전히 제 몫으로 짊어지기 시작했다지만, 아직 스스로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 누군가를 생각할 여유를 내지도 못하는 저와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일생의 절반 이상을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른’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선물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어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어머니께는 ‘어른’의 호칭이 자연스럽고 또한 어울릴 것입니다. 그러한 호칭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어른’으로서의 어머니를 따라서 저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위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행위가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란 얼마나 위대한 행위인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쓰고자 하는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편지에 한 자 한 자 눌러담아야 비로소 ‘어른’에게 가지고 있는 제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음은 말로서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마치 멀리 떨어진 두 사람 사이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이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소리와 영상만이 그렇게 보일 뿐 마음은 그렇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적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툴고 부족한 솜씨지만 다음과 같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하여 적어 내려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머니.” 라고 말입니다.
2023. 1. 5. 아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