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일지 #1. 국립중앙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기행일지 #1. 국립중앙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2023-02-26 0 By 커피사유

다니고 기록하며 날마다 알아가다. 기행일지(記行日知)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직접 답사하거나 조사하여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두는 공간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포스터

#1. 계기

이 기행(記行)의 시작은 단연컨대 우연이었다.

대학(大學)의 2023학년도 제1학기의 개강을 앞두고서, 일찍 상경(上京)하였기에 별다르게 주말에 일이 없던 나 자신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가볼까 생각한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었다.

그 결심이 선 것이 25일 19시.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의 토요일 관람은 21시까지. 대학에서 박물관까지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남짓. 따라서 관람 가능한 시간은 단 1시간. 합스부르크 왕가 특별전이 오래 전부터 나의 눈길을 끌기는 했지만 이 1시간만을 가지고 그 특별전을 보는 것은 무리일 뿐더러, 이미 늦은 시간이라 현장 발권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상설전시관 3층 메소포타미아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전시회였던 것이다.

해당 전시회에 소장품을 제공해준 곳이 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라는 사실도 이 선택에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다. 고등학교 수학 여행에서 3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추상화나 이집트 문명에 대한 전시는 상세히 관람할 수 있었지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 전시물은 제대로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기억이 아직 가슴 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외에도 또 하나가 있었다.최근 읽고 있는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의 내용도 떠올랐던 것이다. 그 책이 다루는 내용이란 곧 어떻게 하여 인간의 서로 다른 문명 발전사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써 내려갔는가에 대한 것이라, 4대 주요 문명 중 하나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될 대로 증폭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심이 선 그때,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박물관으로 향하는 여정에 돌입한 것이다.

이 기록은 그 여정에서 내가 얻은 것들에 대한 것이다.


#2. 알게 된 것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신전

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 기술 · 경제적 혁신의 중심에는 신전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신전이란 대중들에게는 신을 모시는 성소라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 ‘신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살펴볼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모습 또한 없었을 것이다. 신전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원시 시장과 교역소의 기능도 했기 때문이다. 신전은 모든 생산물을 집결 · 분배하는 경제 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

메소포타미아의 신전에서 곡물을 분배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즉 계량에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크기가 일정한 그릇 여러개가 다소 발견된 바 있다.

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전이 등장하고, 이 성소가 경제 · 기술 ·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에는 기원전 3500년경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농업 기술의 발전(수로 · 저수지의 사용)과 시장 및 교환의 발달, 노동의 분업화가 있었다. 이들 진보 덕택에 식량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신전과 도시 공동체 운영 인력을 먹여살릴 수 있게 되면서 신전 중심의 도시 공동체 운영이 가능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

이러한 진보와 도시 발달은 현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우룩이라는 지역이 그 첫 주자였으며, 이후 서아시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바빌론 등의 초기 왕조 국가가 형성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최초의 문자: 쐐기 문자

가.
맥아 ·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승계와 상속에 관한 대화를 적은 점토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사람들은 기원전 3400년경 이라크 남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굳지 않은 점토판에 갈대 줄기 끝을 찍어 새긴 쐐기 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자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보통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쐐기 문자는 조세 · 민사 계약 등 회계 분야를 다루는데 이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쐐기 문자의 시작만이 그러했을 뿐 시간이 지나면서 쐐기 문자는 회계 분야 이외에도 의료 · 과학 · 문화 전반을 기술하는 문자로 널리 사용되었다.

나.

쐐기 문자는 의료 기록을 남기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실제로 초기 의료 기록으로 볼 수 있을 법한, 쐐기 문자로써 질병 증세와 이에 대한 처방 내역을 자세히 기록한 문서(점토판)이 있다.

다.

쐐기 문자는 원래 슈메르어(수메르어)를 적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악자드어 등 여러 언어권에 걸쳐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필경사들은 당연히 여러 언어를 쐐기 문자로 남겼기에, 번역에 익숙했다.

라.
메소포타미아 문명, 구데아 왕의 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아다드-슈마-우쭈르 명문 벽돌.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많은 이들은 쐐기 문자는 점토판에 찍어 기록했음은 알고 있지만, 그 이외에도 흙을 빚어 만드는 조각상, 벽돌 등은 물론이고 굳이 판형의 점토 이외에도 진흙 기둥, 원뿔 등에도 쐐기 문자를 기록해두었음은 알지 못하고 있다.

원통형 인장: ‘나’임의 증명,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
이쉬타르 여신의 알현 장면을 묘사한 원통형 인장.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이쉬타르 여신상에 기도하는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쐐기 문자와 그림을 돌 기둥 옆면에 새기어 ‘기둥형 도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이른바 ‘스탬프’ 형식의 도장과는 달리, 이들의 기둥형 도장은 점토판 등에 굴려서 도장 옆면에 새겨진 도안 · 글자가 판에 반전되어 찍히는 방식의 도장이었다.

나.

이러한 기둥형 도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공식 문서나 행정용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 사적으로도 꽤나 사용되었다. 특히 기둥형 도장은 작고 휴대성이 간편하여,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요소들이나 신, 소망 등을 담은 도안과 글자를 음각으로 새긴 기둥형 도장을 만들어 사용함은 물론, 부적으로서 몸에 지니거나 장신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다.

기둥형 도장의 재료는 꽤 다양했다. 오늘날 발굴되는 기둥형 도장의 재료 중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옥 등도 있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다른 지역과 교역도 활발히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라.

그러나 기둥형 도장 · 인장이 널리 쓰였다고 해서 오늘날 널리 볼 수 있는 ‘스탬프형’ 도장 · 인장이 전혀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스탬프형’ 인장 또한 출토된 바가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예술혼: 신과 본질

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인물상 · 그릇을 금속이나 진흙, 돌 등으로 세공하되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명문을 새겨 신전에 종종 봉헌하곤 했다. 주로 이러한 인물상 · 그릇의 제작을 의뢰할 수 있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재산이 넉넉한 이들이었다.

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에서는 초상 예술이 ‘개인에 대한 완전한 재현’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초상’이란 ‘재현’보다는 ‘본질의 관측’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초상’ 예술은 통치자들의 초상에서 잘 드러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의 왕의 조각상이나 그들을 기술한 명문 등에서는 왕 개개인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좋아했다와 같은 기술보다는, 이상적 통치자의 모습으로 여겨진 특징들이 반복된다. 튼튼한 팔, 큰 눈, 얼굴을 뒤덮는 수염이라던가…….

라.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왕 조각상’은 훼손되는 경우가 많았다. 왕 조각상의 훼손이란 곧 그 통치자가 통치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특징을 상실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통치자의 조각상의 파괴란 곧 통치자의 이미지의 ‘살해’와 등치로 여겨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들: 지배자의 장신구와 상징

가.

메소포타미아의 부유한 지배층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에서는 잘 나지 않거나 광택이 있는 귀금속을 사용한 장신구 등을 사용했다. 금과 은은 물론, 홍주옥 · 청금석을 사용해 목걸이나 인장 등을 만들고 사용한 것이다.

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곡선 모양의 칼은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했다. 실제로 청동으로 만든, 차라리 낫에 가까워 보이는 곡선형의 칼이 종종 출토되며, 신들이 종종 곡선형의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칼은 실제 전쟁에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곡선형이라 상대를 찔러 죽이기에는 부적합하다) 의식에 이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신-바빌론 제국과 벽돌

가.

초기 바빌론이 멸망한 뒤, 한 차례의 혼란기를 겪고 나서 기원전 626 ~ 539년 동안 바빌론 지역에서 신-바빌론 제국이 건립되어 여러 기술들을 발전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탁월했던 것은 단연컨대 벽돌 기술이었다.

나.

이 시기의 벽돌은 가장 간단하게는 충적토와 진흙을 섞어 반죽한 뒤, 겨나 동물의 배설물을 섞고 건조시켜 완성했다. 벽돌을 제작하는 것은 단순한 생산 활동의 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의미까지 가졌는데, 이 시기 사람들이 믿던 창세 신화에서는 신이 사람을 충적토로 빚었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벽돌은 단순한 건축의 재료의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성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다.
사자 벽돌 패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 블로그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벽돌에 명문을 새기기도 했을 뿐더러, 여러 종류의 유약을 사용해 다양한 색상의 무늬를 그리기도 했다.


#3. 감상과 평가

혹자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이러한 상세한 발전사, 그 문명의 일굼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느냐고 냉소적으로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의 첫 시기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자연을 개척해나가면서 기록하고 활동한 흔적들은 인류가 지금도 남기고 있는 흔적이다.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얻은 지식을 되물림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문명이 현대의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은 분명히 호기심과 관찰, 그리고 기록의 덕택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 ― 즉, 세계 또는 주변 ― 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그 집요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살아 있고, 바로 그 집요함 때문에 인류는 매일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연 앞에 던져져 생각하는 인간이야말로 메소포타미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자연과학을 하는 나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