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 2023. 3. 7. ~ 2023. 4. 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결국 최후에 드러나는 철학에서의 가장 극명한 질문이란 “존재는 긍정될 수 있는가?” 의 질문이다. 한 인간이 비로소 병들었을 때, 따라서 위대한 정오 ― 가치 전환의 순간 ― 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이 최후긍정(最後肯定)의 문제는 들뢰즈도 그의 《니체와 철학 Nietzshce et la philosophie》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와 비극적 사유 사이에 바로 공통적인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현존 existence의 의미에 관한 문제이다. 니체에 의하면, 〈현존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은 가장 경험적이고 가장 〈실험적이기〉까지한 철학의 가장 고귀한 의문이다. 그 이유는 그 의문이 해석과 동시에 평가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 있다. 그 의문을 제대로 이해할 때, 그 의문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니체는 과장 없이 자신의 전 저작이 그 의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니체와 철학 Nietzshce et la philosophie》, 이경신 역, 민음사, 2001. p. 49.
#2.
대학에서 무능과 무지를 끝없이 마주하는 운명 속에서 나는 매일 질문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바로 그 질문. 눈을 뜨면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된다. 눈을 감을 때까지 나는 그 전쟁 속에서 세상의 우연과 부조리에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대학에서의 숙명이라는 직감이 드는 순간, 이 질문은 당연하게도 떠오른다. 가장 근본적이기에 해결이 시급하며, 반드시 대답되어야 하는 질문이 바로 이 질문이다. 그 어떠한 질문도 이 질문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는 없다.
#3.
우리는 사물을 오직 폭력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사물의 다양한 모습, 즉 사물의 다수성(多數性)으로부터 오직 하나의 단면을 가져올 뿐이다. 즉, 우리는 다수에서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제거하는 방식으로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다수성이 역사에서 인식의 맹점에 도달함에 따라, 다수성은 잊혔고 다수와 하나 중에서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역전되고 말았다. 있는 것은 다수이고, 하나는 다수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다수 없는 하나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도 다수 속의 존재로서만 존재한다. 존재를 전제하는, 하나를 전제하는 다수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인식의 함정에 사람들이 당한 결과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존재는 정적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동적이다. 사유의 오랜 오류는 존재를 정적 대상으로 간주했다. 인간의 합리에 대한 향수는 어쩌면 이 불변에 대한 향수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불변은 변화 앞에, 변화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변자를 따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찾아낸, 인식을 통해 얻은 불변자는 결국 변화하는 것을 전제한다. 불멸자는 필멸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매 순간 일어나는 생성 속에서 우리는 오직 그 생성의 본질, 즉 영원토록 오직 생성될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생성에서 규칙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통상적 의미에서의 ‘존재’, 즉 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존재’는 실제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존재’는 오직 동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즉 생성 속에서 파악되는 것으로서만 유일하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이원성을 부정했고, 〈그는 존재 그 자체를 부정했다.〉 게다가 그는 생성을 긍정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생성을 긍정으로 만듦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사색이 필요하다. 우선 그것은 생성만이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고 생성이 존재를 긍정한다고 말하거나 존재가 생성 속에서 긍정된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숫자상으로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에 따르면, 존재란 없으며, 모든 것은 생성 속에 있다. 또 다른 하나에 의하자면,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생성의 존재이다. 생성을 긍정하는 노동자의 사유와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는 관조적인 사유, 이 두 가지의 생각은 분리될 수 없고, 불과 디케 그리고 피지스 Physics와 로고스 Logos처럼 하나의 동일한 요소에 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생성 너머에 존재는 없으며, 다수 너머에 하나는 없고 다수도 생성도 외관이나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차례에 오면, 외관 너머에 있는 본질처럼 영원한 다수의 실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는 분리될 수 없는 표현이고, 본질적인 변신이며, 유일한 것의 항상적 징후이다. 다수는 하나의 긍정이고 생성이며 존재의 긍정이다. 생성의 긍정 그 자체는 존재이고 다수의 긍정 그 자체는 하나이며, 다수적 긍정은 하나가 긍정되는 방식이다. 〈하나는 다수이다.〉 …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니체와 철학 Nietzshce et la philosophie》, 이경신 역, 민음사, 2001. pp. 58-59.
#4.
니체가 기성의 형이상학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은 기성적 형이상학이 정(停)에 ‘좋다’를, 동(動)에 ‘나쁘다’를 대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물의 정적이나 동적이냐 하는 특성에 대하여 기성이 행하는 가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니체가 문제삼는 것은 정과 동 중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냐 하는 문제이다. 정은 동 속에서만 존재한다. 동을 전제하지 않는 정은 없다.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이라고 한다면, 즉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하나라고 한다면 ‘동’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동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 그것 딱 하나뿐이다.
#5.
이제 문제가 바뀐다. 기성적 형이상학에서 생성과 머무름에 대해서 살펴본 가치평가는 전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가치평가를 다시 원래대로 뒤집어서 생성을 긍정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인간의 합리에 대한 향수가 이 경우 문제가 된다. 그 향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예상할 수 없는 생성 속에서의 질서, 즉 불멸자를, 신을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그 향수에도 불구하고 과연 인간은 어떻게 생성을, 오직 생성만을 긍정할 수 있는가? 긍정은 단순히 그것만이 있다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하여 ‘좋다’라는 가치 평가를 부여하기까지 해야 그것은 오로지 긍정이 된다. 합리에 대한 향수를 이겨내면서 어떻게 생성을 긍정할 수 있는가? 어떻게 목적 없이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삶을 정당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서 오로지 삶 그 자체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내일 없이 오늘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 과연 문제이다.
#6.
나는 내 매일의 투쟁이 과연 원한 ― 즉 복수심 ― 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에서 근거한 것인지 헷갈린다. 매일 태양이 뜬 때부터 정오를 지나, 태양이 다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질 때까지 반복되는 이 아(我) 대 타(他)의 투쟁은 기성의 가치에 뿌리를 두는 합목적적 사고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목적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오늘의 사고인가?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늘이 온전히 오늘로써 사유되느냐, 아니면 오늘이 내일로써 사유되느냐 하는 것이다.
#7.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설명해줄 ‘변론서’를 찾아다닌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는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을 정확히 포착해냈다. 그러나 ‘변론서’는 사람들을 점점 갉아먹었고, 마침내 ‘변론서’에 의하여 사람들이 그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며 삶을 ‘속죄되어야 할 것’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것’으로 만들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변론서를 발견하려는 허황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그의 표현, 그리고 아래층 위층으로 마구 달려들면서 말다툼을 벌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욕을 내뱉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이다. 보르헤스는 ‘변론서’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삶’이다.
… 그 무렵에는 ‘변론서’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것들은 우주에 살고 있는 각 인간의 행위를 항상 정당하다고 입증해 주고, 각자의 미래에 대한 놀라운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찬미서와 예언서였다. 탐욕에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정든 육각형 진열실을 버리고서 자신의 ‘변론서’를 발견하려는 허황된 욕망에 사로잡혀 아래층 위층으로 마구 달려들었다. 그 순례자들은 비좁은 복도에서 서로 말다툼을 벌였고, 이해하기 어려운 욕을 내뱉었으며, 신성한 층계에서 서로 목 졸라 죽였고, 믿지 못할 책들을 통풍구로 내던졌으며, 머나먼 지역에서 온 사람에게 유사한 방식으로 내던져졌다. 어떤 사람들은 미쳐 버리기도 했다…….
#8.
당초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이제 나는 ‘삶을 긍정하는 것’을 배우고자 한다. 기성과 도덕의 족쇄에서, 촘촘한 이성의 거미줄로부터 벗어나 아이가 유희하듯, 놀이하듯 삶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고 생성을 즐기는 삶을 배우고자 한다. 니체가 그 답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알베르 카뮈의 도움으로, 나는 이제 위대한 가치 전환을 향해 나아간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문제가 나의 앞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병들었을 때 가장 건강하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보다 더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