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와 메아리의 구분
오늘 장학 재단의 장학증서 수여식에 다녀왔다.
연단에 오른 재단의 이사장과 전 교육부 장관, 그리고 고등과학원 교수는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비롯한 장학생들은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라 단언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이 ‘재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이였기에, 애써 웃음으로 미묘한 심정을 가리려고 했다.
대학에서 보낸 시간이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내가 그나마 조금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즉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새로운 것을 익히고 배우며, 활용하는 것 이외의 많은 것들을 대학에서 시도해보았지만, 나는 매번 흥미를 급격하게 잃었었다. 게임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는 것도, 파티도, 무슨 모임도 전부 나에게는 별로 유익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 나의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원초적 욕구를 알게 되었다. 즉 내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순간마다 강력하게 끓어오르는 그 원초적인 알고자 하는, 배우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 딱 하나만이 나에게 있어 가장 확실하게 감지되고 따라서 그나마 현재 속에서 가장 따를 수 있는 욕구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저 그러한 욕구(관점에 따라서는 물론 ‘가치관’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치관’은 정해진 것이고 당위를 구성하며 따라서 삶을 재단하는 것을 포함하는 표현이라 믿기 때문이다.)에, 매 순간 나에게 덮쳐오는 무지와 무능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그 본능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나에게 ‘재능’이 있으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문제들에 도전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이 본능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어떤 문제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문제’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사실 나 자신이 다른 이들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에서 판단할 방법이 전무하다. 또, “재능이 있다”라는 통상적인 표현은 (고등과학원 교수 그 자신이 시인했듯) 재능에 대한 정의가 너무 제각각이고, 또한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도 · 의미를 가지는 참으로 모호한 표현이다. 만일 그 중에 하나의 정의 · 의도 · 의미를 택한다고 하더라도, 대학에서 학문을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 가장 극명한 현재에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은 명백하게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도전하라”라는 말은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모호한 구호 또는 메아리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물론 알베르 카뮈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내가 크게 받은 것일수도 있겠지만) 오직 현존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일상 속의 일련의 경험들과 그에 뒤따르거나 얽히게 되는 감정들 혹은 몇 가지 사실들 뿐이다. 그 이외에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없다. 거기에서는 훨씬 더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 놓인 여러 믿음들이 혼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호한 구호 또는 메아리에 의존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모호함의 산물이란 항상 너무 많은 현재를 생략하기 때문에 어떠한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기에도 부적절하다. 나는 가치 평가에 있어서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란, 나 자신이 경험을 통해 비교적 현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통계적 증거들의 수가 더 많은 나 자신의 원초적인 욕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