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이야기, 진은영
종이
“쓸모없는 이야기”, 진은영
펜
질문들
쓸모없는 거룩함
쓸모없는 부끄러움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에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왜 화자는 종이와 펜을 두고 질문들을 던지며, 쓸모없는 거룩함과 쓸모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는가. 설익은 푸른 앵두마저 그의 질문에 풋풋함이라도 더했던 것인가? 바람이 불 때의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그 배는 그림액자 속에만 있을 것이 아니고 푸른 바다 위에서 지평선 저 멀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그림액자 속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 뒤에 이어지는 너에 대한 감정이 쓸모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가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일방적인 사랑은 상처만을 낳기 마련, 그 감정이 상대가 들어주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감정이 쓸모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감정은 그 효용이 없다는 것인가. 스스로의 만족으로 끝낼 수도 있지 않은가, 아직 사랑이라는 것을 못해본 나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 너에 대한 감정이 쓸모없다는 것이 왜 그러한지, 이 부분은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그 햇빛으로 따스함을 얻는 이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햇빛은 왜 유리창을 데웠는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빈집 유리창이라도 햇빛이 데워주지 않았다면 그 집은 얼마나 쓸쓸하고 추운 곳이 되었을까. 태양의 광명을 통하여 그나마 조금의 따뜻함이라도 얻은 것이 어찌보면 다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으리라.
자비로운 기계가 가장 쓸모없다 말할 것이다. 기계가 자비로우면 어떻게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것인가,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눌러대고 찍어대는 프레스가 자비로우면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질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 애초에 피도 눈물도 없던 차가운 기계가 자비로움을 얻는다면, 그 기계는 제품 생산에 있어서 – 본질적인 목적에 있어서 쓸모없어질지는 몰라도, 조금이나마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기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강인공지능이 생각난다.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은 마치 이전에 올렸던 포스팅, 박래전의 “동화(冬花)”가 생각나게 한다. 동화도 아무도 그 향기를 맡아주지 않는, 그것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장 추운 계절에서, 자신의 뿌리내린 운명 때문에 당신들의 나라에서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이 아니던가. 장미들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듯이 향기롭게 핀 것 또한, 아무도 맡아주지 않음으로서 그들의 효용을 상실했더라도, 그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향기로운 장미들이 피어 있는 모습은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의 주인에게 있어 하나의 위안이라도 되어 주지 않을까.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시에서 이른바 “쓸모없는 것들”의 나열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나 그들 요소 하나하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코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 진은영은, 쓸모없는 이야기들이 사실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결국 저마다의 효용을 가지며, 효용을 상실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은 잠재적인 효용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혹은 그 존재만으로도 마치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핀 미칠듯 향기로운 장미들과 같이, 충분히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