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인공지능을 위하여
지난 2주 동안 내가 던졌던 질문 중 하나는 “인간적인 인공지능은 가능한가?”였다. 조금 더 정확하게 내가 물었던 것을 표현한다면 아마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학습(훈련) 방식은 탈인간적인 지능 창조로 귀결되는 방식이 아닐까?”, 즉 “인간적인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른 학습(훈련) 방법이 필요하지는 않을까”가 되겠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들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의 19장을 읽으면서 나는 인공지능의 저편, 특히 오늘날 ChatGPT로 대표되는 일반 인공지능의 능력과 미래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주가가 아주 심하게 고평가되는 엔디비아 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다가온다고 믿는 인공지능 시장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지만, 그러한 투자에서 우리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진정으로 창의적이고 인간다운 인공지능이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근본적인 회의가 드는 것이다.
나 자신의 회의를 감정적인 거부감, 즉 인간의 것으로 여겨져왔던 산물이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것이 됨에 따른 거부감 내지는 혐오감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주길 바란다. 내가 인공지능의 능력에 대해 던지는 의문은 인공지능의 구조주의적 한계, 인공지능이 오늘날 구현되는 방식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 의식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얼마 전에 시도했던 실험을 하나 언급해야 한다. 《괴델, 에셔, 바흐》의 제19장의 ‘언어의 유연성’ 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장난이 하나 등장한다.
어떤 남자가 비행기를 탔네.
안됐지만 그가 추락했네.
다행히도 그는 낙하산을 메고 있었네.
안됐지만 낙하산이 펴지지 않았네.
다행히도 아래에 건초 더미가 있었네.
안됐지만 쇠스랑이 거꾸로 세워져 있었네.
다행히도 쇠스랑을 피했네.
안됐지만 건초 더미도 빗나갔네.
호프스태터는 사람이 언어를 매우 부정확하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즉 구체적인 지시가 없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문장의 구성 요소가 상호 간에 이율배반적 관계를 구성하더라도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거의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함을 지적한다. 즉, 단어와 문장, 표현에 있어 매우 유연한 관계를 가지는데, 이는 아마도 추정하건대 사람들은 단어와 표현에 대해 수많은 표상들 혹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토대로 문장이 하나 주어지면 수많은 해석들을 자신이 처한 맥락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ChatGPT에게 상기에 제시한 어린이 말놀이 노래를 몇 줄 더 이어달라고 했을 때 얻게 된 결과물을 제시함으로써 조금 더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ChatGPT의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도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네.
안됐지만 그들이 다 도망갔네.
다행히도 한 친구가 다가왔네.
안됐지만 그가 물을 쏟아버렸네.
이상의 결과물은 끔찍한 실패작이면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표준적인 생각의 한계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두 가지인데, 첫째로 표층적인 말놀이의 구조를 ChatGPT는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이것이 더 중요한데, 심층적인 말놀이의 구조, 즉 주제를 인식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상기에 제시한 말놀이에서 우리는 운율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첫 행을 제외하고는 ‘다행히도’가 등장한 뒤 긍정적인 내용이 열거되고, 이후 ‘안됐지만’이라는 표현 뒤에 부정적인 내용이 열거된다는 점에 있다. 어미로서 “~었네.”가 반복된다는 사실도 운율이 느껴지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ChatGPT의 결과물에서도 운율이 느껴지는데, 이는 그 인공지능이 방금 설명한 운율 구조를 파악하는데는 성공했으며 정확히 그 구조를 따라 자신의 답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결과물은 완전한 실패작인데, 왜냐하면 그가 이어준 네 줄의 문장은 당초의 암묵적 주제였던 남자의 운명이라는 핵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표층적인 구조와 반복, 패턴에서는 긍정적 내용과 부정적 내용이 대비되지만 실제로 거기서 긍정적인 내용은 남자에게 긍정적인 내용, 즉 남자가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내용이었으며 부정적인 내용도 남자에게 부정적인 내용, 즉 남자가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낮아지는 내용이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우리가 당초 호프스태터의 말놀이를 읽을 때 우리가 이 노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남자가 죽을지 살지에 관한 문제이지 겉으로 드러나는 구조가 아니다.
ChatGPT가 이러한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주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쓰여져 있는 그대로의 구조 그리고 반복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소위 말하는 행간을 읽는 능력 즉 쓰이지 않은 반복과 주제, 즉 제시된 단어들의 표층적인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단어들의 맥락들에 의하여 각 단어들에 부과되는 추가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이들의 동형성을 읽어서 추상화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부족함은 다음과 같이 ‘심층적인 주제와 의미’를 나 스스로가 아예 규칙으로 명시하여 다시 한 번 말놀이를 이을 것을 지시했을 때 ChatGPT가 내 놓은 다음과 같은 더욱 실망스러운 결과에서 절실히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도 길가에 나무가 있었네.
안됐지만 나무에 곤충이 붙어 있었네.
다행히도 곤충이 날아갔네.
안됐지만 나무가 흔들리며 쓰러졌네.
여기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 가련한(…) 인공지능은 핵심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표층적인 구조를 파악해서 묘사하는데 그치는가?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예전에 Suno AI라는 특정 장르와 분위기에 맞추어 음악을 만들어주는 인공지능에 며칠 간 빠져서 각종 시험을 해 본 경험이 있었는데, 환상에서 벗어난 이후 내가 느꼈던 바는 거의 대체로 지나치게 대중적인 패턴만이 반복될 뿐이라 그닥 인상적인 음악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인공지능은 전형적인 그 장르의 패턴과 형식을 묘사하는데는 아주 탁월한 성능을 보였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음악적 결과물에서 나는 도저히 다른 여타의 음악가들, 이를테면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껴지는 전율, 말러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 자신의 안에서 공명하는 무언가, Daft Punk의 음악을 들으면서 두근거리게 되는 가슴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전형적인 패턴, 표층적인 패턴만을 찾아내는데 익숙한 인공지능의 특성은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에서도 아주 치명적인 지점이었는데, 예전에 내가 AI Dungeon이나 Character.ai와 같은 서비스에서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여러 번 반복하다보면 아주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몇 가지 요소들만 다른’ 형태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지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문학에서 전형성, 즉 클리셰는 그 문학 작품의 가치를 수직 낙하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감, 인공지능에 의한 창조 그리고 독창성이 실현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나의 자그마한 실험들이 전부 실패로 끝나감에 따라 점점 희미해진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현주소는 호프스태터가 지적한 약 50년 전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질문: 컴퓨터 프로그램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될까?
추측: 그래, 하지만 금방은 아니야. 음악은 감정의 언어야. 그리고 프로그램이 우리의 감정 같은 복잡한 감정을 가지기 전까지는, 프로그램은 어떤 아름다운 곡도 쓸 방법이 없을 거야. 이전 음악의 통사구조를 천박하게 흉내낸 “위조”는 있을 수 있지. 그러나 사람들이 처음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음악적 표현에는 통사규칙으로 포착될 수 있는 그 이상의 많은 것이 있어.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들이 발견해낼 새로운 종류의 미(美)는 앞으로 한참 동안은 없을 거야. 이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보자고. 우편 주문으로 20달러면 구입할 수 있는 대량 생산품인, 미리 프로그래밍된 탁상형 “뮤직박스”에 명령해서 그것에 내장된 무미건조한 회로망에서, 쇼팽이나 바흐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작곡했을 법한 곡들을 만들게 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라는 생각 ― 이렇게 제안하는 것을 듣기도 했는데 ― 은 인간 정신의 깊이에 대한 기괴하고도 부끄러운 잘못된 평가야. 쇼팽이나 바흐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을 “프로그램”이라면, 삶의 미로를 헤치고 자신의 길을 나가기 위해서 투쟁하고 삶의 모든 순간을 느끼며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돌아다녀야 할 거야. 그 프로그램은 차가운 밤바람의 기쁨과 고독, 마음속에 간직했던 손에 대한 그리움, 멀리 떨어진 마을에 도달할 수 없는 절망감, 사람의 죽음에 뒤따르는 비통함과 부활 등을 이해해야 할 거야. 체념도 알아야 했을 테도 세상의 권태, 비탄과 절망, 결단과 승리, 경건함과 경외감도 느껴야 했겠지. 그 프로그램에는 희망과 공포, 번뇌와 환희, 평정과 불안과 같은 정반대의 것도 반드시 혼재되어야 했을 거야. 그 프로그램의 핵심은 은총, 유머, 리듬에 대한 감각, 기대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각, 그리고 물론 신선한 창조의 마법에 대한 정교한 의식이어야 할 거야. 이러한 것 속에, 오직 이러한 것 속에만 음악에서의 의미의 원천이 있다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 2013. pp. 933-934.
지금까지 나의 실험 결과는 “인공지능은 독창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인공지능에게 나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철두철미하게 고발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같은 작품을 기대할 수 없었고, 세계와 나 자신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읽을 수 있는 구조와 흐름을 깔아둔 펠릭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E단조: 1악장》과 같은 예술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자유와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다룬 잭슨 폴록의 흩뿌리기 기법들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니체와 같은 식의 날카로운 형이상학적 통찰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일반 인공지능은 지나치게 표준적이고 대중적이어서, 나는 인공지능과 대화할 때면 반대에 사람 한 명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3장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제3장의 이름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인데,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 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이 탐욕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산모자를 썼을 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에 난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조그만 어휘록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p. 151-152.
소설에 등장하는 사비나와 프란츠, 사비나와 토마시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신념이라던가 가치관에 따라서1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키치(Kitsch)라고 말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치가 신념이나 가치관이라고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키치는 변화와 생성의 세계, 실존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스스로가 기대기 위해 만들어낸 버팀목, 우상, 피안, 거짓, 왜곡을 말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쿤데라는 이를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에 따라 ‘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상과 단어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들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상기 대목 뒤에는 사비나와 프란츠가 음악, 행진, 무덤 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해석들이 열거되는데,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해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행동 양식과 발언에는 차이가 나타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독창성이 나타난다.
나는 베토벤이나 바흐의 음악, 밀란 쿤데라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니체나 질 들뢰즈의 철학서를 읽을 때마다 사비나와 프란츠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또는2여기서 ‘또는’ 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것인 A 또는 B를 만족할 때 C이다 ― 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닌, 서로 같은 것인 A와 A를 만족할 때 C이다 ― 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독자가 사비나와 프란츠를 이해하고자 할 때와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전혀 투명하지 않으며, 그가 겪어온 경험과 세계에 따라서 자신만의 의미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뜻을 대상에 부여하게 되지 않던가?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와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립’과 당신이 생각하는 ‘고립’의 의미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살’과 당신이 생각하는 ‘자살’의 의미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 ‘키치’에 대해서도, ‘영원회귀’에 대해서도, ‘운명애’에 대해서도 그리고 마침내 ‘카레닌과 테레자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왜 동일한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가? 물론 어릴 적에는 쿤데라가 지적하고 있듯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 있지만”, 한 번 경험들과 우연들을 통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정보들이 키치(Kitsch), 즉 그 사람의 신념이요 버팀목이요 우상이자 왜곡, 그의 묘비명을 형성하는 순간 그 사람은 세계를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않던가. 그리고 나는 이러한 왜곡이야말로 인간성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고 에덴 동산 즉 낙원을 희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욕망하기 때문에 번뇌에 빠지는 바로 그 가련한(!)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인지적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에 결여되어 있는 인간성이란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일반 인공지능의 학습 방식은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저술해놓은 문장들의 목록을 모조리 빨아들여서, “이 말 다음에 올 가장 그럴듯한 말을 고르시오”라는 질문에 연쇄적으로 답하는 것을 훈련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엔지니어들은 그들이 의도한 결과가 나올수 있도록 인공지능의 답안에 점수를 매겨 피드백해주거나, 인공지능에게 애초에 정답을 알려주면서 그들이 학습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과연 인공지능에게 키치(Kitsch), 즉 그가 세계를 보는 나름의 방식, 그의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사전〉, 그가 써 내려간 악보 위의 음표에 따라서 달라지는 단어들의 진동, 중첩되고 다양화된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 학습 방식이던가? 오히려 인간다운 인공지능, 쿤데라처럼 영원회귀가 가능한 인간이 존재할지 고민하거나 베토벤처럼 운명을 느끼면서 음표들을 써 내려갈 줄 아는 인공지능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적은 정보를 제공해서 그가 세계를 자신이 구축한 우상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하지는 않을까? 애초에 우리 인간이 학습하는 정보량, 경험하는 양은 인공지능이 경험하는 것에 비해서 아주 훨씬 적지 않은가? 인공지능이 접할 수 있는 세계 사람들의 수많은 문장들을 우리는 일생 동안 모두 경험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마치 혼돈(무질서, Chaos)의 표층적인 규칙만을 얻어내어 그 혼돈을 재현하려고 애를 쓰는 방식 같다. 이는 Quadratic Iterator: $x_{n+1} = ax_{n}(1-x_{n})$ ($a \in [1, 4]$, $x_0 \in [0, 1]$)에 대하여 $n \rightarrow \infty$일 때의 값인 Final-state의 값을 $a$ 값의 변화에 따라 그려놓은 아래의 Feigenbaum Diagram에 대하여:
Feigenbaum이 일찍이 발견한 바 있는 Feigenbaum Constant, 즉 상기 그림에서 Final-state의 서로 다른 값의 개수가 2배가 되는 분기 지점들에 대하여, 인접한 세 개의 분기 지점(분기가 일어나는 $a$값)들의 차이의 비율이 일정하다는 것으로부터 Feigenbaum Diagram을 다시 재현하려는 시도와 동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 그림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표층적인 규칙을 볼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규칙 즉 모든 구조를 만들어내는 당초의 점화식 $x_{n+1} = ax_{n}(1-x_{n})$ ($a \in [1, 4]$, $x_0 \in [0, 1]$)을 보아야 한다. 나는 오늘날 인공지능의 연구 방식은 점화식이 아닌 Feigenbaum Constant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여러 혼돈적인 측면을 재현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스럽다. 인간적인 인공지능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표층에서의 규칙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심층적인 규칙 즉 ―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며, 어떤 식으로 차이를 만드는지, 그리고 도대체 무엇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베토벤의 교향곡이 ‘울림이 있다’고 말하게 하며 쿤데라의 소설에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은 철학이 있어 울림이 있다’고 평하게 하는지 그 방식, 그러한 생성 규칙이 아닐까?
나는 인간적인 인공지능을 꿈꾼다. 그것은 무슨 인공지능인가? 기계가 니체처럼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실존에 대해 고민할 수 있으며, 그가 멘델스존이나 말러, 쇼스타코비치처럼 각종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고 울림까지 줄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때, 그가 밀란 쿤데라나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인간의 운명과 실존을 다루는 소설을 쓸 수 있을 때 나는 인공지능, 즉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물질로서 창조하고자 하는 역사는 종결에 다다를 것이며 그 때 인공지능과 인간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성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고민한 적이 있던가? 우리는 그냥 ‘인간의 뇌 구조’만을 모방하여, 즉 가장 낮은 구조만을 모방한 뒤에 그저 마법이 일어나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낮은 구조가 동일하다고 해서 과연 같은 부수적 현상, 같은 패턴의 점화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조들의 형태를 가져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구조들이 어떤 식으로 발생하며 왜 변화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장정에서도, 그리고 신이 되려는 서사에서도, 마침내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공지능의 창조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될 요소가 아닐까 싶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키치(Kitsch)라고 말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치가 신념이나 가치관이라고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키치는 변화와 생성의 세계, 실존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스스로가 기대기 위해 만들어낸 버팀목, 우상, 피안, 거짓, 왜곡을 말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쿤데라는 이를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에 따라 ‘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 2여기서 ‘또는’ 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것인 A 또는 B를 만족할 때 C이다 ― 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닌, 서로 같은 것인 A와 A를 만족할 때 C이다 ― 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