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52. 키치와 인간

사유 #52. 키치와 인간

2024-10-10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키치 없이 인간은 살 수 있는가?”


일주일 전인가 《괴델, 에셔, 바흐》 독서 모임에서 나는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질문 하나를 계속 생각하고 있노라고. 그리고 이 질문은 지난 3년 동안의 니체 읽기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만난 결과물로 탄생했노라고.

물론 나는 그 질문이 이전에도 제기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단지 당시에는 같은 질문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없도록 한 층위 높은 곳에서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나타났을 뿐이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편에서 등장했던 다음의 표현들을 복기해보자. “부조리 앞에 서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절망을 보는 인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희망을 가지지 않는 법을 나는 배울 필요가 있다”라는 그 서술들 일체를. 그러나 그 서술들 뒤에 숨은 심연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단어들을 배열하여 맥락을 구성할 당시 어떤 질문을 자연스럽게 품고 있었던 것인가? 부조리 앞에서 어떻게 설 것인가, 이런 식의 방법론적 의문이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능성의 문제, 이를테면 그 유명한 밀레니엄 문제 ― 비선형 편미분방정식계인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계의 해가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유일한지와 같은 존재성에 관한 물음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1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421.라는 바로 그 대목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보는 것이다. 키치(Kitsch)란 우상이다. 키치란 믿음이다. 키치란 도식이며, 키치란 왜곡이다. 그렇다. 키치란 쿤데라가 말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노출된 인간이 자살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버팀목이다. 적어도 한 세대 이전의 이 체코의 소설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니체의 주장을 잠시 되짚어보자. 니체는 일찍이 절대성, 그러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피안 즉 꿈과 희망으로 구성되는 세계에 대한 철폐를, 그리하여 우리에게 온전하게 남는 단 하나의 이 세계, 지상에 대한 긍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우상 즉 절대성을 획득한 도덕은, 사람들을 재단하는 걸왕과 주왕2오늘날 많은 서적과 사상을 접하지 못하여 미처 앎이 여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부언하자면, 고대 중국사에 의하면 걸왕은 하나라의 임금이었고, 주왕은 상나라의 임금이었는데 둘 다 폭군으로서 자신들은 술과 고기 그리고 음악을 즐겼지만 그들의 통치 아래에서 정작 백성들은 신음하고 죽어나갔다고 전해진다.이었고, 따라서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독일의 그 철학자에게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우상 앞에서 망치를 꺼내들었고 그것을 내리쳤으며, 오로지 변화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외침으로써 헤라클레이토스를 다시 한 번 부활시켰다. 니체는 키치의 반대를 말하는 철학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이율배반적 구도가 형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한쪽에는 밀란 쿤데라가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니체가 서 있다. 둘 다 “키치는 인간의 본성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뉘앙스는 미묘하게 다르다. 쿤데라의 말에는 약간의 우울함 그리고 직시가 들어 있다. 그러나 니체의 말에는 단호함 그리고 직시가 들어 있다. 한 사람의 문장은 물음표로 끝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의 문장은 느낌표로 끝나고 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라고 말하는 우(愚)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둘 중 어느 누구도 일목요연하게 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대한 세 번째 독서 노트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난 9월 읽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독서 노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전략) … 철학의 오래된 역사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왔다. 언젠가는 죽거나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추하다고 여겨지는 육체 속에서 인간은 영혼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그 영혼은 확장되어 그의 사고 법칙을 지배했다. 인간은 그가 사고하면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때문에 동물과는 다르다고 믿었지만, 근 · 현대에 이른 지난 2천년이 넘는 문명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은 그와 동물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묻고 있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떤 존재인지 여전히 묻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현기증을 느끼고 있으며 낙원을 꿈꾸는데, 그 낙원에서 인간은 동물과 그를 구분해준다고 믿었던 요소를 상실한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항상적이고 영원한 세계에서 인간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를 상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자.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 있나? 인간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마지막 질문이 나의 질문이다.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영원회귀와 운명애 속의 초인은 가능한가?”, 다시, 조금 더 예전의 언어로, “희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가능한가?”, 다시, 밀란 쿤데라의 언어로, “키치 없이 인간은 살 수 있는가?”

얼핏 보기에 니체와 쿤데라의 모순은 해결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두 사람의 주장이 화해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7일 전의 독서회에서 내가 말했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키치 속에서 사는 것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의 구분이다. 이 술어를 사용한다고 전제하면 니체를 이해하는데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생기는 것인데, 하나는 그가 키치 속에서 사는 것을 거부했고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을 말했다고 해석하는 방식이고, 둘은 그가 키치 자체를 거부했다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키치 속에서 사는 것과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한 것은 냉전 시기 미소의 우주 경쟁의 결과 최초로 대기권 밖에서 푸른 행성을 바라본 사람의 눈에 그 모습이 비쳤을 때였다. 이는 체계 속의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체계의 한계, 이론의 한계, 사회와 도덕과 문화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 그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그가 키치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다.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는 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 밖의 것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자신이 처한 건물,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바로 그 구조물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그가 문 밖을 나가 자신의 피난처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개구리처럼 자신의 앎보다 더 넓은 미지가 존재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믿음은 하나의 우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는 이제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는 이제 키치 안으로 들어가서 살 수도 있고, 키치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키치와 더불어서 사는 자란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키치를 인지한다. 그러나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이미 그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키치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자신의 키치와 다른 어떤 키치가 그의 세계로 유입된다면 그는 자신의 구조물에 모순되는 대상이 있다고 소리칠 것이며, 자신의 구조물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자신의 구조물이 그 침입자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침입자는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닌 방문자가 된다. 그는 충분히 대화를 나눈 뒤에 괜찮다고 생각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그와 어울릴 것이고, 별로라고 생각되면 인사를 나누고 그를 되돌려보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구조물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제 나는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이 니체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니체는 근본적으로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정지한 것이 없고 다만 생성하거나 소멸하는 것들로 가득 찬 세계라고 지각한다. 그가 전쟁과 경쟁을 긍정할 때 그는 그것이 옳다는 측면에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가 과학도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고 비판할 때 니체는 절대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계의 단 하나뿐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일원적이지 않고 다원적이며, 그것들이 겨룬 끝에 일시적인 우위가 나타날 뿐이다. 키치와 더불어 사는 인간이 니체의 사상과 모순되지 않음은 이제 명백하다. 그는 자신의 키치가 키치라는 사실을 알고, 세계는 수많은 키치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키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시간에 따라 변화할 뿐이며, 그는 언제든지 자신의 키치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다른 키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여전히 하나의 질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 만약 우리의 첫 번째 해석이 실은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니체가 실제로 주장한 것이 두 번째 해석, 즉 키치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자연히 떠오르게 되는 질문 하나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처음의 질문인데, “키치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다시, “희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가능한가?”, 또 다시, “초인(Übermensch)은 가능한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하냐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키치와 더불어 살기 시작하게 되었고 따라서 내가 믿어왔던 구조물의 바깥에서 내가 있었던 곳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있다. 문을 열고 언덕을 올라간 나는 스스로가 살고 있던 집을 내려다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으로서 나는 그 건물이 마치 하나의 기둥 위에 위태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만 같다. 한때 파르테논 신전을 볼 때 느껴졌던 그 위대함과 장엄함으로 감싸져 있던 나의 우상이 이제는 볼품없고 작은, 그것도 아주 치명적으로 가벼운 허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우며,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로 나는 내가 살던 집에 조금 더 튼튼한 기둥을 가져오고, 물이 새는 곳을 고치거나 볼품없어진 곳들을 다시 한 번 쌓아올리는, 건축가로서의 방안을 택할 수 있다. 즉 나의 키치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면서 키치 위에서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로 나는 방랑자의 운명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건축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조건에 의해 그 결과물이 다시 한 번 공허한 집이 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과연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니체는 여전히 나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추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가출할 수 있다. 집을 버리고 그 어떠한 키치 안에서도 살지 않고 그냥 드넓은 세계 위를 표류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방안이 니체가 말하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키치를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에 비유하면서 그것이 권위를 상실하게 되면 감동적인 것이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3그녀는 이것이 환상임을 잘 알았다. 이 매력적인 노인네들 집에서 체류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간이역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했다. 늙은 신사는 중태이고 그의 부인은 홀몸이 되면 캐나다에 사는 아들 집에 갈 것이다. 사비나는 다시금 배신의 길로 들어선 것이며 이따금 그녀 가슴 깊은 데에서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환한 두 창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럽고 감상적인 노래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p.420-421.
또한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키치를 완성하는 단계를 곡을 작곡하는 것 즉 악보를 구성하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4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152.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의 나의 논의 그리고 물음들 일체를 다음과 같은 음악으로 닫고자 한다. 니체가 말하는 ‘강해짐’이란 〈초인〉이 되는 것, 즉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인간이 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키치를 거부하는 인간을 지시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을 암시한다면, 나는 아래의 노래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당신과 나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용어집’의 차이에 의한 간극을 어느 정도 메우는데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M2U – Marigold (feat. Guriri, DEEMO Soundtrack, Arranged and Played by phyxinon) ― 원곡은 가사가 있고, 조금 더 Artcore 계열의 일렉트로닉 음악에 가깝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는 피아노를 위해 편곡하여 연주한 이 음악이 훨씬 적합해 보인다. 물론 가사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별’은 도달할 수 없지만 동경이 사라지고 나면 감동적인 것이 되고, 그리하여 가장 인간적인 것이 되니까.

M2U – Marigold (feat. Guriri)의 가사

I dreamed a beautiful dream,
(아름다운 꿈을 꾸었어,)
you were there as well as I.
(그 꿈속에 너도 나와 함께 있었지.)
It doesn’t seem like a dream even it’s over.
(비록 모두 끝나버렸지만, 단지 꿈 같지만은 않았어.)

I miss you caress my hand as you watch me while I sleep.
(곤히 잠든 내 모습을 보며 내 손을 어루만져 주던 네가 너무 그리워.)
Your melody still remains in this room and it rings.
(너의 멜로디는 여전히 이 방에 남아서 울려퍼지네.)

Star-la la- la la, la la la lah,
(별이여 라라라라, 라라라라,)
love you always deeply,
(언제나 사랑하고 있어, 깊이,)
genuinely, immensely, steadily with all my heart.
(진심으로, 대단히, 변함없이, 내 마음을 다해.)
Be strong and all will be alright.
(강해지면 모든 건 괜찮아질 거야.)
You are the aria itself, shine out!
(너 자체가 아리아(노래)니까, 밝게 빛나길!)

(Interlude)

Shine out!
(밝게 빛나길!)

(Interlude)

I remember you from dream, playing my favorite song for me.
(꿈 속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주던 너를 기억하고 있어.)
Your melody becomes a part of my whole world.
(너의 멜로디는 나의 세계의 일부가 되었어.)

Stel-la la- la la, la la lah,
(별들이여 라라라, 라라라,)
love you too always deeply,
(나 역시 언제나 사랑하고 있어, 깊이,)
genuinely, immensely, steadily with all my heart.
(진심으로, 대단히, 변함없이, 내 마음을 다해.)
I’ll be strong and all will be fine.
(강해질게, 그럼 모든 건 괜찮아질 거야.)
I’ll be strong and all will be fine.
(강해질게, 그럼 모든 건 괜찮아지겠지.)

주석 및 참고문헌

  • 1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421.
  • 2
    오늘날 많은 서적과 사상을 접하지 못하여 미처 앎이 여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부언하자면, 고대 중국사에 의하면 걸왕은 하나라의 임금이었고, 주왕은 상나라의 임금이었는데 둘 다 폭군으로서 자신들은 술과 고기 그리고 음악을 즐겼지만 그들의 통치 아래에서 정작 백성들은 신음하고 죽어나갔다고 전해진다.
  • 3
    그녀는 이것이 환상임을 잘 알았다. 이 매력적인 노인네들 집에서 체류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간이역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했다. 늙은 신사는 중태이고 그의 부인은 홀몸이 되면 캐나다에 사는 아들 집에 갈 것이다. 사비나는 다시금 배신의 길로 들어선 것이며 이따금 그녀 가슴 깊은 데에서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환한 두 창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럽고 감상적인 노래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p.420-421.
  • 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재룡 역, 민음사, 2018.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