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기만적 이해의 반대, 부조리를 지탱하는 인간
지금으로부터 대략 2주일 전에 들었던 말이 여전히 기억에서 맴돈다.
그녀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4년차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빡빡하고 바쁘게 학업을 영위해왔다면, 번아웃이나 우울증이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인 것 같다는 사견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나 역시 내 학습 방법이 너무 힘들고 또한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건넨 말의 행간을 거부한다. 나는 여전히 나의 학습법을 고집하고자 한다. 교수자의 강의 시간의 3배에서 5배에 달하는 시간을 써 가면서 스스로의 언어로 정리할 수 있어야 그나마 나는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바로 그러한 직감의 아래에서, 그리고 여전히 무지와 미지의 세계 한 가운데에서 조금이나마 확실한 〈질서〉를 찾고자 하는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운명 아래에서.
“대충, 적당히 배우고 넘어가면 되지.”라는 문장을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태생인 듯하다. 애초에 내가 이해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수자가 강의 시간에 이야기한 것만 대략 훑어보고 머릿속에 한 번 복기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은 충분한가? 교수자가 대충 넘어가는 사항들도 나 또한 그렇게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내가 그것을 온전히 이해했음을 지시하는가? 강의 자료를 단지 한 번 읽어보고, 문제를 풀어서 답들이 맞았다고 해서 그것을 내가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애초에 내가 이해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나도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의 언어로서, 내가 배웠거나 알게 된 내용을 기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안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생이나 나의 할머니에게 평이한 일상의 언어로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안다. 적어도 내가 지각하는 앎의 구멍들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서, 따라다니는 질문들을 타고서 최대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안다. 적어도 이러한 ‘이해함’의 반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나는 이 같은 나름대로의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대충, 적당히 배우고 넘어가면 되지.”는 여전히 나에게 있어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관이 담긴 문장이다.
무지와 나 자신의 끝없는 겨루기, 그것을 지탱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처음에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를 직시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니체에 대한 나의 평가가 질 들뢰즈 그리고 밀란 쿤데라와 결합함에 따라 조금 바뀌었기에 〈부조리〉란 단순히 무지와 앎의 이항 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변화의 공포에 맞서서 질서와 의미를 창출하려 할 때 발생하는 이항 대립, 삶과 〈키치〉의 이항 대립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초의 나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지와 나’의 대립이란 결국 후자인 ‘변화와 의미’의 대립의 부분집합일테니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반대로 이 같은 방식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내가 너무 원시적인 방법으로, 심각하게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경제적이지 못한 방안으로 나의 학문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상술한 ‘이해하지 못함’의 구체적인 양태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된다. “어떻게 나 자신의 언어로서 나의 앎을 기술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서, 아예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나의 앎을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지각하는 모든 질문들을 방치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 통상, 이해했다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드넓은 학문 세계의 작은 귀퉁이를 탐방하는 자그마한 아이에 불과하는 나 자신도, 결국 이 귀퉁이를 보면 저쪽 멀리에 무언가 더 넓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저쪽 귀퉁이로 가면 그 너머에 더 넓은 대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물론 나는 유한한 시간 안에, 즉 나의 일생을 다 소모하여도 모든 곳들을 다 가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할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자신의 가장 깊숙한 무지를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나는 이해했다”는 〈추정〉 내지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히는 것을 고도로 경계한다. 대학에서 4년 동안 철학 · 논리학 · 문학 · 물리학 · 대기과학 · 예술 · 체육을 모두 접한 나에게 항상적이었던 느낌이란, 여전히 저기에는 나의 이해를 넘어선 지평선이 존재하며, 그 광활함에 비하면 나의 이해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직감, 그리고 영원히 그 모든 지평선을 탐색할 수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들을 최대한 돌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죽기에는 단 한 번이라는 나 자신의 생(生)의 기회가 지니는 무게가 너무나도 중대하다는 직감이다. 그렇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삶이 어떤 방식을 택하고 있는지를 소명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울지는 몰라도, 결국 세계와의 멋진 대결을 지탱해나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기에 〈부조리〉 속에서 사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대충〉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러한 방식이 나 자신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위기를 가중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포기하기를 거부한다. 단호한 정신은 분명히 버텨낼 수 있을 것이며, 세계와 스스로의 대립이라는 이 인간적인 대결에서 한쪽 항을 폐기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조리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에 기반을 두는지 안다.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을 겨루듯이 떠밀며 버티고 있다. 나는 이 상태에서의 삶의 규범을 묻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게 내놓는 제안은 그 기반을 무시하며, 고통스러운 대립의 항목들 중 하나를 부정하고 나에게 기권을 요구한다. 나는 내 것임을 인정하는 이 조건이 어떤 귀결에 이르는지 묻는다. 이 조건이 어둠과 무지를 전제로 함을 나는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무지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며 이 어둠이 나의 빛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 열광적 서정이 역설을 보지 못하도록 내 눈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러니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외치며 경고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모든 사물의 근저에 오직 어둠침침한 열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것과 하찮은 것 등 모든 사물을 생산해 내는 원시적이고 격렬한 어떤 힘밖에 없다면, 만약 세상 만물의 저 뒤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바닥없는 공허가 숨어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외침은 부조리의 인간의 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 낼 것이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6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