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4.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I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내가 스스로를 주된 관찰 대상으로 삼아가면서 지난 수년 동안 심리학과 철학을 맛보면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나 자신의 (그리고 아마도 인간 전체의) 속성 중 하나란 〈고집〉 즉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한 거부, 그리고 확증 편향과 같은 ‘오류’에 관한 속성들이었다. 이러한 거부는 왜 일어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왜 인간의 지성은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는가?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친숙한 정보는 손쉽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친숙하지 않은 정보들에 대해서는 쉽게 속단하고 잘못 판단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가능한 대답 중 하나는 인간은 제한된 정보와 시간 속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고, 또한 자기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설명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그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나는 여기서 밀란 쿤데라의 《키치》 그리고 니체가 비판한 《피안》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이 맥락에서 전혀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강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유약하며, 《키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커피사유, 〈기계와 인간, 〈호모 데우스〉의 오만함〉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지난날, 나는 “철학은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쓴 적이 있다. 이 문장이 함의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나는 그 당시에 내가 읽고 있었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에 대해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치명적인 것이란 결국 쿤데라가 말하고 있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즉 책의 제목이 가지는 두 중의적 의미 중 하나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니? 왜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을 심각하고 무겁게 생각하기보다는, 가볍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정신적으로 건강한 습관이 아니던가?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이란 존재에 대한 가벼움임에 주의해야 한다. 존재란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물론 존재는 실제로는 가벼운 것이다.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적했듯 만물은 정지해있지 않으며, 영원한 것은 없고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니까.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동물이다. 우리는 존재를 논할 때 암묵적으로 그것이 비록 일정하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본질 즉 변화하지 않고 남아있는 속성들에 대해 말하게 된다. 이를테면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의한다고 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며, 이런 것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순간의 나 자신에 대한 진술일 뿐이며, 시간에 따라 호(好) 그리고 불호(不好)가 변화하는 실제 나 자신에 대한 진술은 아니다.
만물의 변화를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대상을 온전히 기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언어는 찰나의 순간만을 포착할 뿐이지 계속해서 변화하는 사물의 속성들을 모두 기술하지 못한다. 언어 속에 갇혀 사고하기 마련인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오직 끊임없는 변화만이 있다는 사실, 즉 질서란 창조되고 날조된 것이며, 오직 혼돈만이 존재한다는 이 사실은 치명적이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무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실은 치명적으로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가 의미란 하나의 착각이며 우상이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될 때 우리는 깊고 탁한 인간 실존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아래에서 나는 밀란 쿤데라가 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내가 어떠한 연유로서 이렇게 해석하게 되었는지를 하나씩 밝혔다. 우선 스스로가 가지는 몇 가지 용어들에 대한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의 사전】의 쪽수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했고, 그런 뒤에 이름과 실제 사물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면서 니체와 쿤데라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실세계와 피안이라는 주제에 대한 나의 이해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Ess muss sein!”이라는 문장, 니체에게 있어서는 ‘죄의식’에 해당할 것이며 쿤데라에게 있어서는 ‘무거움’에 해당하는 이 문장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사랑을 가져와서 이것이 니체의 ‘영원회귀 및 운명애’ 사상과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나의 추측을 밝혔다.
서론은 이제 충분하다. 이제 담담히 남은 말들을 풀어나갈 일만 남았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322.
I. 총평
등장인물들이 탄생한 토양을 열거해보자. 토마시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는 이미지’ · 작가의 실현될 수 있었던 가능성’, 베토벤의 모티프 ‘es muss sein!’ · ‘einmal ist keinmal’이라는 문장에서 탄생했다. 테레자는 ‘배 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그것도 하필 토마시를 만나서 그녀의 영혼이 육체 표면까지 올라왔을 때에) 꼬르륵 소리’에서 탄생했다. 사비나는 배신, 그것도 영원히 이어지는 배신의 연쇄에서 탄생했다. 세 인물이 탄생한 이러한 토양은 화해의 반대, 평온의 반대, 정조 그리고 ‘es muss sein!’에 대한 반대이지만 동시에 무거움, 진리, 절대성, 도덕, 통일의 반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등장인물들이 다름아닌 후자로 열거된 것들의 반대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무거움의 반대로서 제시된 바람둥이형 호색한인 토마시가 중요하다. 절대성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실은 반대로서 제시된 육체를 부정하면서도 육체를 갈구하는 이율배반에 위치한 테레자가 중요하다. 진리의 반대로서 즉 투명한 유리통처럼 자신의 속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만천하에 공개하는 진실함과 참됨의 반대로서 제시되는 사비나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 모든 반대는 현실 그 자체이며,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에 관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장부터 5장까지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사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가지는 기능과 정확히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잠언과 비유로 가득찬 문장 속에서 동형성을 발견하기 위해 수많은 가능성들을 떠올리고 수많은 사물을 외과 의사처럼 갈라내어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점점 더 아래로, 점점 더 심연으로, 은폐되어 있던 우리의 가장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근접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가 은유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던가? 실로 그러하다.
II. 논의하고 싶은 / 인상 깊었던 책 속 문장들과 그 이유
II.1. 첫 번째 문장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204.
어떤 말이든 그 말은 항상 두 사람 사이의 서로 다른 악보들의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에 노출된다. 쿤데라의 문장은 그가 겪었던 프라하의 봄,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사랑이 고조된 순간 자기 배 속에서 끈질기게 꾸르럭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배신하고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배신의 길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 대장정 행렬 속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것, 경찰이 숨겨 둔 도청 마이크 앞에서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등”의 경험을 나 자신이 공유하지 않는 이상 나와 쿤데라 사이에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사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해석은 폭력이며 왜곡이라는 점을 분명히 직시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나름의 해석을 도출하는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일련의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록 쿤데라의 세계를 온전치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나온 잘못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이 문장으로부터 내가 본 것, 그리고 이하의 서술을 읽는 독자들과 나 자신 사이의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사전〉의 쪽수를 조금 줄이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시작하자.
- 행위 – 나에게 행위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무언가를 할지 하지 않을지를 고민하는 것,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반항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양친이 모두 나의 학창 시절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히려 학업보다는 더 귀중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한적한 시골로 이사갔을 때 혹자는 나에게 순종 또는 반항의 문제는 유년기부터 제시된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반항은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양친의 의도를 나는 배신했고, 정말 희한하게도 초등학교 시절 사물과 세계의 거동을 설명하는 것, 분류하고 파악하는 바로 그 작용에 매력을 느껴서 의도와는 반대로 점점 배움에 집착했다. 그러나 처음의 배신은 동시에 하나의 함정이 되어버렸는데, 이 매력에 너무나 천착한 나머지 나는 모여서 딱지치기를 하거나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공을 차던 급우들과는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고, 결국 그 거리감은 어느 날 과학교사의 손에 이끌려 5학년임에도 불구하고 6학년 반에서 생활하면서 교탁 바로 옆에 마련된 별도의 책상에서 숲의 천이 과정이라던지 제비의 생태라던지를 한가득 쌓아둔 종이에 뒤덮여 읽었던 바로 그 때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으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반항의 욕구를 느꼈지만, 즉 모든 것을 되돌리고 이 매력적인 함정으로부터 벗어나서 평범해지고 싶은 욕구, 추락하고 싶은 현기증을 느꼈지만 그러지 못하고 순종했다. 이러한 순종은 과학고등학교에서 스스로를 둘러싼 불합리한 평가 시스템, 그리고 그 평가 속에서 재단(Cutting)되면서 스스로의 자부심,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 근본적인 순수함이 짓밟혔던 그 때의 일시적인 반감까지 누르고 곧바로 체제에 순종하고 스스로가 그 체제에 걸맞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학의 4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배신의 치명적인 매력에 노출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온 모든 것, 내가 믿어왔던 것, 내가 꿈꾼다고 생각했던 미래를 모두 배신하고자 하는 욕망, 참을 수 없는 바로 그 현기증 그것들을 느낀다. 부분적으로는 니체의 영향을, 부분적으로는 태생적인 우울증 그리고 기질에 의한 것이라 추정되는 바로 이 현기증. 그러므로 항상 행위한다는 것은 나에게 선택의 문제였으며, 더 정확하게는 순종과 배신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 미지와 의미 – 나를 추동한 두 가지 원동력. 둘 다 강렬했으며 동시에 치명적인 동력원이었지만, 사실 그 성질은 정확히 반대여서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미지는 나를 항상 의미로 추동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 그리하여 내 앞에 숨이 막힐 듯한 높은 산이 있을 때마다 나는 항상 그 산을 정복하기를 의욕했다. 그러나 항상 숨을 고르면서 힘겹게 매번 미지의 산을 정복할 때마다, 나는 그 뒤에 내리막이 있으며 또 다른 산봉우리, 대체로는 더 높은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내리막과 산봉우리에게 미지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므로 의미는 항상 나를 미지로 추동한 것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즉 오르막과 내리막, 의미와 미지라는 움직임의 영원회귀에서 나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끊임없이 던졌고, 이에 따라서 삶에 대한 나의 감각도 끊임없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탄다는 직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직감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고, 동시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미지를 볼 때마다 나는 의미로 향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꼈고, 의미를 볼 때마다 나는 미지로 향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꼈다. 상승과 하강의 욕구, 승천과 추락의 욕구, 서로 반대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떼어놓을 수 없는 바로 이들 욕구들. 그렇다. 미지와 의미는 동력원이다. 삶의 동력원이고, 거부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욕구인 것이다.
- 목표 – 아주 어린 유년기에 나는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이정표를 둔 적은 없었다. 그저 하루를 알차게 보냈는지 아닌지, 침대에 눕기 전에 몰려오는 피로감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양친에 대한 배신이 시작되면서 나는 달성해야 하는 어떤 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나를 추동한 두 가지 원동력은 미지와 의미였기 때문에, 그리고 항상 이 둘은 또 다른 정복해야 할 대상들을 열거했기에 나는 하나의 글을 먹어치운 이후에는 항상 또 다른 하나의 글을 먹어치워야 한다는 일종의 암묵적인 강박에 시달렸다. 나의 학업이 점차로 극성에 달해감에 따라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겪은 실패와 좌절이 추가됨에 따라서 나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es muss sein)는 판단을 내면화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쏟아지는 인정 그리고 도덕적 칭찬들은 그러한 나의 행위를 가속시켰다. 그러므로 목표란 궁극적으로 내가 정복해야 하는 것, 이해의 대상으로 두는 것, 이성이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일체를 가리키며, 나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 자신에 대한 한계는 없다고 믿는 것 바로 이들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 가벼움과 떠나기 – 가벼운 것은 나에게 일종의 독이라던가 아니면 사고의 부재,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어떤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나의 삶을 지금까지 추동해온 두 가지 원동력이 미지와 의미인 이상, 이러한 아주 강렬한 인상적 경로로부터 벗어나는 것, 떠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겨진 것이다. 학창 시절 나는 모든 것에 정진하지 않고 희희낙락하는 것 일체를 지나치게 가벼운 것, 나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es muss sein)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한때는 그러한 욕구가 모든 인간에게 있어 공통적인 욕구이며 그러한 욕구를 따르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나는 가장 무거운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생각이 무거워짐에 따라 나는 점차 과로하기 시작했고 체중을 잃었다. 영혼은 무거워졌을 지언정, 육체는 가벼워진 것이다. 이러한 유년기, 최초의 배신 경험 이후 빠져든 함정 속에서 나아간 끝에, 마침내 나 자신이 바닥에 Veritas Lux Mea 라고 쓰여진 이상한 풍토 위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이러한 가벼움과 떠나기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도 영혼은 무거워졌고 육체는 가벼워졌다. 철학에 집착한 이유도 사실은 무거움에 집착한 덕이다. 나는 무거움은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너무나도 가볍게도 별 볼일 없는, 지나치게 흔하디 흔한) 단체 점퍼의 뒷면에 박힌 학교의 모토에서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했던) Veritas와 Lux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너무 무거워진 것은 가벼움을 희구하기 마련인지라, 결국 무거움에 질식해버린 나는 니체의 다이너마이트라는 가벼움을 위한, 나 자신의 위에 놓인 무거움을 날려 버리기 위한 적절한 재료를 ‘우연의 새가 모여듬’을 통해 얻게 되었고, 지난 3년 동안 온갖 무거움과 가벼움, 온갖 상승과 하강, 온갖 미지와 의미 사이의 갈등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는 떠나기를 원하게 되었다. 즉 참을 수 없는 대상에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이전까지는 가벼움을 참을 수 없었다면, 무거움이 과중해진 나머지 지금은 지금까지 져 왔던 무거움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II.2. 두 번째 문장
“그렇다면 테레자와 그녀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녀의 육체는 테레자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228.
-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우리는 그 사물의 외형이 조금 변하더라도 항상 같은 이름으로 부를 것을 약속하는 셈이라는 것을 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그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가 성장하면서 아름답게 되고 정점을 지나 다시 추하게 되어 마침내는 무덤에 묻히거나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때까지 동일하게 유지된다.
- 우리는 방금의 논의로부터 이름과 육체의 성격은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은 유지되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다. 성격이 반대인 두 가지가 따라서 붙어 있다. 우리 자신에게 만약에 이름이 없었다면, 혹은 더 나아가 우리 자신에게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욕구가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욕구는 역사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이었는지 서양과 동양 문명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이름을 붙였고, 그리고 그 이름과 사물의 관계를 열심히 고민했다.
- 동양에서는 공자가 대표적이었던 모양이다. 공자는 춘추 시대 사회의 난맥상을 주례의 회복, 즉 전통적인 사회 질서의 회복 ― 지배 계급은 갈등을 조정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능력을 발휘하는 정신적인 일들을 하고, 피지배계급은 이들을 잘 따르면서 모두를 먹여살리는데 필요한 생산 활동 즉 육체적인 일들을 하는 바로 그 사회 질서의 회복 ― 거칠게 말하면 “각자 자리를 지키시오!”라고 할 수 있을 바로 이 질서의 회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질서의 회복을 공자는 정명론(正名論)이라고 하는 자신의 이론, 즉 명(名)과 실(實), 이름과 그 이름이 붙은 사물이 서로 ‘들어맞도록 하는 것’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자는 군자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말에서 학계의 많은 이들은 공자의 정치 사상 그리고 형이상학적 이상을 보겠지만, 나는 가장 본질적인 인류의 질문 즉 이름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본다.
- 서양은 이름을 붙이는 대상을 신이라고 간주해온 역사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만물을 비롯하여 인간까지 창조하였고, 끝내는 (정말 속이 좁게도) 자신이 이름 붙인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 신의 역사는 그리스교도로 이어져서 니체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 서양 철학의 주요 갈래 중 하나는 심신이원론 대 심신일원론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질문인 이름과 사물의 관계가 서양에서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라는 이름으로 논의되어 왔음을 알게 된다.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신의 세계에 속하다 믿었던 영혼, 그리고 탄생하고 사망하며 부패하기 마련인 육체가 도대체 왜 붙어 있는지, 그리고 누가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누가 우선하고 누가 열등한지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의가 서양에서도 이어진 것이다.
- 무거움이 가중됨에 따라 영혼 그리고 육체가 지시하는 의미는 점차 확대되었다. 인간에게 국한되었던 용어가 이제는 사회 전체 나아가 사물 그리고 세계 전체에 대한 용어로 확대됨에 따라, 영혼과 육체는 각각 서로 다른 세계를 지시하는 용어로 자리하고 말았다. 용어가 사용되는 의미가 방대해지면 용어가 지나치게 무겁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게 가볍게 되어버리게 되고(너무 많은 것을 지시하므로 따라서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고) 따라서 가벼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니체가 그래서 등장했고, 미셸 푸코가 그래서 등장했으며, 근 · 현대 철학이, 정상과 비정상을 질문하면서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질문하는 바로 그러한 철학들이, Veritas Lux Mea가 과연 맞는지, Veritas Morbus Mea가 오히려 아닌지 질문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등장한 것이다.
II.3. 세 번째 문장
“사랑,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사랑은 “es muss sein!”을 초월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20, p. 387.
- “Es muss sein!”는 지나치게 독일적이다. 여기서 독일적이라는 것은 니체의 용례와, 그리고 동시에 쿤데라의 용례와 부합되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모티브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의무의 표현, 그렇게 해야만 한다에 대한 표현임도 상기하자. 의무란 결국 하나의 부채 의식이고 나아가서는 죄의식으로 변질된 어떤 것이라는 니체의 주장을 상기할 때, 분명히 이 말은 무거운 것이다.
-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하도록 하자. 사랑은 무거운 것인가, 가벼운 것인가? 사랑은 무겁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을 다한다는 것을 내포하며, 나의 약점과 단점까지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유약해졌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진지한 감정과 노력을 다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 신성한 것이며, 일부일처제, 즉 남성이든 여성이든 서로가 상호를 배신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고 결혼식의 주례를 선 인물이 말한다는 점으로부터 우리는 사랑은 무거운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그런데 사랑이 무거운 것이 맞기는 하던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행위하지 않던가? 진심을 다하는 것, 진지한 감정과 노력을 다할 정도로, 배신하지 않을 정도로 깊게 빠지는 대상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쿤데라가 지적하듯 많은 경우 우리의 사랑이란 나와 동일한 것을 찾고자 하는 동일성 파악이었고, ‘나의 잃어버린 반쪽 찾기’의 비유가 지시하듯 (물론 은유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이상형’은 현실 속의 많은 상대들에게서는 항상 그것과 어긋나는 특성들이 발견되도록 강제하는 이데아인 것 같지 않은가? 토마시와 테레자의 경우로부터 우리는 사랑하는 것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항상 같은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 두 사람의 만남이란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도, 그 중 어느 하나의 우연이라도 발생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것이라는 점도 사랑이 무거운 것이라는 추측에 대한 반대 증거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 사랑이란 우리는 더없이 무겁고 진지한 것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간주했지만 실은 어쩌면 우리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무엇을 사랑하든지, 좋아하든지 간에 그것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결정했다기보다는 삶에서 갑자기 던져지곤 하는 암시들이 겹쳐진 산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여기서 치명적으로 가벼운 것 위에 서 있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 그런데 잠깐, 사랑만이 과연 치명적으로 가벼운 것, 즉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삶 자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혼과 육체라는 화해할 수 없어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두 대상과 뗄 수 없고, 또 미지와 의미라는 서로 다른 그러나 항상 서로를 향하는 이 이율배반적이지만 동시에 상호적인 추동과 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즉 〈부조리〉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렸다)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동물이지만 의미 없는 고통은 견딜 수 없어하는 동물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문제에서 각각이 무엇을 지시하는지가 명확해진 이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결국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고 가장 철학적인 질문이며,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질문인 셈이다.
- 나는 이 질문이 내 속에서 울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도 표현될 수 있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 왜 자살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수많은 문학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고, 특히 오늘날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학들은 특히 이러한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장 문학과 철학의 근간에 뿌리내린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사랑은 왜 자유가 되는 것일까?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 부조리, 의미 없는 고통 일체의 위에 서 있는 것이 우리의 존재 전체라면, 그 존재의 행위인 사랑조차도 결국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연의 은밀한 계시를 통하여 강요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을 다한다는 것을 내포하며, 나의 약점과 단점까지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유약해졌다는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진지한 감정과 노력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약점과 단점으로 여겨온 것이 육체와 통상 결부되어 왔고, 유약해진다고 느끼게 되는 원인이 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외부의 우연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진지한 감정과 노력을 다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온연히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랑은 그 계기가 자유롭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행위가 선택하는 바는 무거움이 지금까지 고집하고 재단해왔던 존재의 의미가 무너진 세계라 하더라도, 그러한 세계 속의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긍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에서 애(愛)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바로 이것은 무거움의 정확히 반대이기 때문에 짐을 버리고 가벼움으로 날아오르는 것이므로 자유가 되는 것이다. 아이의 인간이 사랑하는 인간과 동의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자유로운 진술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