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와 민주주의

2025-01-01 0 By 커피사유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中

근래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하다보면, 작년에 살펴본 문장 중 가장 의미가 깊은 바로 이 문장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 멀리 상기할 필요는 없다. 작년 10월 초 나는 〈사유 #52. 키치와 인간〉에서 키치 속에서 사는 것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을 구분했다는 점을 되짚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키치가 인간이 죽음에 대항하여 만들어낸 벗어날 수 없는 우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니체와 질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이 일찍이 깨달은 바에 따라 완벽한 중립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많은 힘과 해석들이 존재할 뿐임을 다시 확인할 때, 나는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키치 속에서 사는 것이지 키치가 아님을 되새기게 된다.


키치 속에서 사는 것과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한 것은 냉전 시기 미소의 우주 경쟁의 결과 최초로 대기권 밖에서 푸른 행성을 바라본 사람의 눈에 그 모습이 비쳤을 때였다. 이는 체계 속의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체계의 한계, 이론의 한계, 사회와 도덕과 문화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 그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그가 키치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다.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는 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 밖의 것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자신이 처한 건물,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바로 그 구조물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그가 문 밖을 나가 자신의 피난처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개구리처럼 자신의 앎보다 더 넓은 미지가 존재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믿음은 하나의 우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는 이제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는 이제 키치 안으로 들어가서 살 수도 있고, 키치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키치와 더불어서 사는 자란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키치를 인지한다. 그러나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이미 그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키치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자신의 키치와 다른 어떤 키치가 그의 세계로 유입된다면 그는 자신의 구조물에 모순되는 대상이 있다고 소리칠 것이며, 자신의 구조물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자신의 구조물이 그 침입자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침입자는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닌 방문자가 된다. 그는 충분히 대화를 나눈 뒤에 괜찮다고 생각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그와 어울릴 것이고, 별로라고 생각되면 인사를 나누고 그를 되돌려보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구조물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커피사유, 〈사유 #52. 키치와 인간〉

인간은 믿음 위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키치는 인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층위를 달리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나기’라는 자기-지시와 자기-반영을 포함하는 사고를 할 줄 하는 인간은 자신의 ‘믿음’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믿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 바로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