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문
철학은 기본적으로 문을 여는 것이다.
문장은 단순하지만 가지는 무게는 중대하다. 문장은 짧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문장은 쉽게 읽히지만 그 배경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난 4년 동안의 이 대학 위에서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이 바로 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의 저편을 보기 위해서는 부득이 위 그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치밀어오른 갑작스러운 욕구에 따라 오늘 아침에 기숙사 책상 바로 위 벽에 붙여둔 이 그림은 단순히 감상을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쓸 때에 가장 잘 보이는 바로 그 위치에 붙여둔 것은 아니다. 〈경화수월〉 시리즈에서 암시한 바 있듯 나는 최근 들어서 과학보다 예술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는 선후 및 인과관계 위에서 대상을 형식체계로써 기술하고자 하는 과학이 바로 그 방식을 택함으로 인하여 서술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술은 단번에 전달해준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 그 짐작 위에서 유영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하는 그 그림을 걸어두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한 장의 그림이, 그것도 진짜 이름과 얼굴 어느 하나도 알지 못하며 대중에게 그렇게까지 알려지지도 않은 어느 화백의 그림이 누군가의 삶 전체를 표상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기막힌 우연이거나, 또한 다른 의미로 기막힌 착각이 아니냐고?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우연과 착각이야말로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있어 발휘하는 미적 감각의 핵심 요소가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23년 동안의 삶에서 내가 한 자리에 굳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동안 응시했던 모든 작품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작품들이 우연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장면들을 마음 한 켠에서 끄집어내었고 그 작품 위에 내가 떠올린 기억들을 살포시 얹어 놓았음을 상기하게 된다. 물론 그 심오한 경험들의 뒷맛이 항상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들춰지는 기억들이 별로 유쾌한 경험들이 아니기도 했고, 그림 자체가 내게 속삭이는 것이 마치 숨기고 싶었던 무언가들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희미해진 과거들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이미지는 고등학교 시절 미국 동부로 수학 여행을 떠났을 때 방문했던 미국 메트로폴리탄 현대 미술관에서 맞닥뜨린 잭슨 폴록의 어느 그림 중 하나를 올려다보던 장면이다. 수 년의 시간 속에서 그 이름마저 잊힌 그 그림에는 분홍색과 검은색이 흰색의 캔버스와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다른 그림들은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던 나였지만 그 그림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마성의 매력이 나를 묶어두었고, 눈동자에 그 그림이 점차 가득 담김에 따라 나는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서 시작된 작은 파란이 웅웅거리면서 커지는 것을 느꼈으며 종국에는 그 파란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집어삼키는 듯한 격렬한 반응에 전율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이 원한다면 몇 시간이고서 설명해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인 저 그림, 잭슨 폴록의 작품보다는 훨씬 표현하는 것이 선명하며 색채도 훨씬 정갈하다고 느껴지는 저 작품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고등학교 시절 가장 격정적이었던 나의 치명적 트라우마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눌렀지만 물커덕거리며 조금씩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던 나의 유년기부터 동고동락했기에 아주 오래된 〈친구〉라 할 저 고립감, 그리고 대학 진학의 이름으로 억압되었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을 뒤흔드는 저 잔인한 뒤틀림 위에서 한동안 당시 내 마음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갈음할 뿐이다.
당신은 한 장의 그림이, 그것도 어느 때인가 우연히 보고서 조용히 내려받은 그림 한 장이, 화백이 마찬가지로 조용히 남몰래 비공개로 돌린 듯한 그림이 누군가의 철학적 여정을 전부 요약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마찬가지로 기막힌 우연이거나, 또한 다른 의미로 기막힌 착각이 아니냐고? 전자 즉 기막힌 우연이라는 점에 있어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후자, 기막힌 착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전자에 대해 동의할 때도 나는 당신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기막힌 우연’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운이 좋아서’, 즉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의미에서의 우연이 아닌,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한 여러 번 겹쳐서 필연을 만들어내는 우연, 바로 그 문학적 의미에서 한정적으로 쓰인 바로 그 우연으로써 ‘기막힌 우연’이라는 표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최근의 글들에서 고백했듯이 나는 지난 4년 동안 대학에서 내가 맞닥뜨린 실존적 위기, 그리고 그 위기에 맞서 내가 격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찾아내어 붙든 여러 사상들이 내게 걸었던 대화가 대학에서 나의 서사가 종결점에 도달해감에 따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점으로 모인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위기라니, 어떤 위기? 필사적으로 붙든 사상들이라니, 어떤 사상들? 당신을 위해 시간 순대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중 · 고등학교 시절의 전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대학 1학년: 고 김윤식 교수의 〈살아있는 정신에게〉, (3) 대학 2학년: 니체의 《도덕의 계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마침내 야마다 무네키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4) 대학 3학년: 《들뢰즈의 니체》에 담긴 질 들뢰즈의 니체 해석,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 간간히 읽었던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의 일부, (5) 대학 4학년: 다시 읽은 《도덕의 계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여름방학 때 플레이한 비디오 게임 《OMORI》, (6) 지금, 대학 5학년: 프로이트와 라캉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특히 라캉), 거의 다 읽어가는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그 예술성에서 결정적 영감을 얻어 준비한 지난 2월 경남과고 36기 ‘날적이’ 독서모임의 《OMORI》 모임. 이 모든 서사를 통과할 당시 나는 매 순간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단 하나라도 좋으니 버팀목이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었음을 기억한다. 버팀목 하나를 붙잡고 안도하더라도 몰아치는 폭풍, 내면의 외침에 의하여 그 버팀목은 조각조각 찢겨 사라지고 나는 또 다시 허우적거리며 다른 조각을 붙잡기 위해 몸부림쳤음도 기억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반복된다면, 그것도 자신의 안도가 곧바로 끝없는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는 점을 계속해서 목도하게 되면 희미한 하나의 가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난파된 조난자의 운명이 영원히 자신에게 내려칠 것이라는 바로 그 희미한 직감, 그리고 이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운명이라는 바로 그 느낌, 바로 그 느낌에 그는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썼듯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1「이 모든 경험이 서로 부합하고 일치한다. 궁극적 한계점에 도달한 정신은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자살과 대답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탐구의 순서를 뒤집어서 지적 모험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동작으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여기 열거한 경험들은 사막에서 태어난 것이므로 우리는 그 사막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경험들이 과연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노력이 그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48-49.

따라서 이제 당신은 내가 이 단 한 장의 그림이, 우연히 접하게 된 어느 다른 예술 작품의 중심 시니피앙과 겹쳐 보인다고 이야기할 때 이 문장에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예술 작품이냐고? 그것은 조금 전 언급되었던 게임 《OMORI》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수겹의 장벽을 세운 자신의 정신 세계, 〈별세계(Otherworld)〉에서 수많은 문을 마주하게 된다. 문의 색상은 실로 다양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문을 단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하얀 문〉을 고를 것이다. 그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할 당신을 위해 내가 《OMORI》에서 빌려와 바로 위에 제시한 바로 저 문, 장엄하게 서 있는 잔인한 저 문 말이다. 그런데 문이 왜 장엄하게 서 있고, 또 도대체 왜 잔인하다는 말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월 23일 나는 《OMORI》라는 작품을 감상하고 내가 느꼈던 바를 어떻게든 실어나르려는 노력을 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문이란 무엇인가?”
쓸모없고 당연한 것을 묻는 것 같은 질문일수록 핵심을 찌르는 법이다. 이 질문도 다를 것은 없다. 그러나 질문을 막연하게 던지면 대답하기 어려운 법이니,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시니피앙에 얽힌 수많은 시니피에들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일상 속에서의 경험을 되짚어보는 것에서 출발하면 편리하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건물과 그 속의 방들을 출입해왔다. 건물의 안과 밖을 드나듦에 있어 우리는 역시 마찬가지로 수많은 문들을 통과해왔다. 너무나도 자주 반복되는 경험이었기에 우리는 문이 특별히 어떤 사물인가를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열거나 닫고, 또 그 속을 통과해왔다.
문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기능면에서 비슷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 차이가 있는 다른 구조물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벽이다. 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을 두 범주로 가르는 하나의 경계이자, 반대로 넘어갈 수 없게 둘 사이에 세우는 단절이다. 벽을 기준으로 원래 하나였을 공간은 안과 바깥, 혹은 이쪽과 저쪽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인간은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싶은 공간마다 마음 가는데로 벽을 세웠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수많은 벽들을 드나들게 되었다.
잠깐, 벽을 드나든다고? 벽의 주요한 특성들에는 반대편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도 그럴 것이 반대편을 볼 수 있다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벽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어떤 집에 외부인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외벽은 더 이상 외벽이 아닐 것이며, 우리 자신의 방이 완전히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지나가는 누구든지 그 내부를 볼 수 있다면 우린 그것을 더 이상 방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벽이 분리하는 두 공간을 어떻게 드나들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의 주제, ‘문’이라는 사물이 등장한다. 문도 크게 보아서는 벽과 거의 같은 기능을 한다. 문을 닫아 놓으면, 특히 자물쇠를 걸어 놓는다면 사람들은 그 반대편으로 이동할 수 없다. 문도 벽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문은 벽과 비교하여 단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그것은 열 수 있다. 즉, 문은 벽과는 달리 그 개폐를 사람들이 조절할 수 있다. 문은 닫는 경우에는 벽과 같이 공간을 둘로 나누지만, 여는 경우에는 그 벽이 갈라놓은 세계를 하나로 화해시킨다. 문이 벽과 가지는 이 중대한 차이점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갈라놓은 공간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사려 깊은 독자들은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게임 《OMORI》 위에 만들어온 글들에 공통적으로 ‘문’이 하나의 시니피앙으로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글에서도 ‘문’은 예외없이 반복된다. 삶에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지혜대로, 반복은 그저 우연히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복을 지각하는 인간은 그것이 왜 발생했는지 묻게 되며, 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어느 순간에 그 반복은 인간 정신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인지되지 못하던 벽이 사실은 열릴 수 있는 벽이 아닌가, 즉 ‘문’이 아닌가 하는 희미한 추측으로 이어진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문을 열 것인가, 열지 않을 것인가.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질문 위에서 인간은 시험에 오른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반년 전 혼자서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OMORI》의 모든 서사를 탐험한 이래로, 나는 점점 더 많은 문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어떻게 생겼느냐도 중요했지만, 나의 관심은 그 문이 어디에 위치하느냐는 쪽에 집중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 나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다르는 곳들에 문들이 서 있음을 발견했고, 종종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들에 문이 있음을, 나에게 봉쇄되어 있었기에 반대편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장소들에 그것들이 오래 전부터 서 있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몇몇 문들은 손쉽게 열고 반대편을 확인해볼 수 있었지만, 몇몇 문들은 열고 반대편을 들여다보는 것이 몹시 두려울 정도로 장엄하게 서 있었다. 너무나도 중압적으로 서 있었던 그 문들이 열고 들어갔을 때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다는 강렬한 직감을 풍겼기 때문이다. 물론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해서 거기서 끝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문 뒤에 또 다른 문이 있는 경험들에는 익숙하니까.
문은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앞에서 서성거리든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잔인한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니체가 오래 전에 남겼던 문장 하나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f Abgrund auch in dich hinein.)그러나 열지 않고서 되돌아간다면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다. 상술하였듯 벽과 문을 구분하는 핵심적인 차이는 인간이 자신이 마음대로 그어둔 경계를 드나들도록 그것을 열 수 있는지의 여부에 있으니까. 인간은 다시금 일어나 선다. 그리고 자신 앞의 문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러면 문도 인간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 누구도 이 잔인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문이 있고 또한 인간이 있기에 이 운명은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게임 · 예술 · 인간 정신 이 셋을 하나로 이어주는 최후의 ‘문’이, ‘무언가’가 우리 눈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질문은 여전히 간단하다. 그러나 치명적이다. 나는 그 영원회귀를 다시 한 번 읊조린다.
“문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질문 ― 저 치명적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저 질문 ― 은 내가 당신에게 지금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란 당신과 나 자신 모두가 맨 처음 제시했던 저 이름 모를 화백이 남긴 그림처럼 저 ‘하얀색 사각형’ 앞에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잠깐, 그림의 저 하얀 부분은 문이 아니지 않냐고? 맞다. 그것은 캔버스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문과 캔버스, 나는 이 두 가지를 동일한 대상으로 유추하는 아주 위험하지만 흥미진진한 사고를 행하고 있다. 두 대상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지 되짚을 때마다 나는 저 그림을 응시하는 나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저 하얀색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벌거벗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왼쪽 발밑에 작은 페인트붓이 떨어져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술하였듯 나는 문 앞에서 인간은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며, 가장 태초적이라 할 수 있을 따라서 가장 맞닥뜨리기 싫은 저 감정, 공포에 전율할 것이라는 흥미진진한 가정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한 감정 앞에서 인간은 드러내기 싫었던 부분들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이 공허로 흩어져 사라진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선택의 무게를 직면함에 따라 그가 지금껏 공간을 자르는 선을 그리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완성되는 최후의 장면이 바로 내가 저 그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내가 저 그림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다.
자, 이제 나는 “당신과 나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용어집의 간극을 좁히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여전히 질문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우리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왔음을 어렴풋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실로 그러하다. 우리는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 회귀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니까, Da Capo.
문장은 단순하지만 가지는 무게는 중대하다. 문장은 짧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문장은 쉽게 읽히지만 그 배경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난 4년 동안의 이 대학 위에서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이 바로 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문을 여는 것이다.
Appendix.
주석 및 참고문헌
- 1「이 모든 경험이 서로 부합하고 일치한다. 궁극적 한계점에 도달한 정신은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자살과 대답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탐구의 순서를 뒤집어서 지적 모험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동작으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여기 열거한 경험들은 사막에서 태어난 것이므로 우리는 그 사막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경험들이 과연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노력이 그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