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 괴델, 에셔, 바흐 – 서론과 제1장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매주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개요
이번 주는 까치출판에서 나온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저, 박여성 및 안병서 역인 책의 일부를 읽고 나 자신이 느끼고 배우며, 가지게 된 의문들을 기록하는 첫 번째 장을 작정하기로 했다. 이번 주에 읽은 부분은 사실상 맨 앞부터 제1장의 말미까지가 해당하는데, 중간에 책의 차례를 짚는 부분은 각 부분을 읽을 때 길라잡이로 읽을 생각이라 읽으려 했던 제1장까지만 보고 뛰어넘겼다.
호기심을 향한 문(問)과 답(答)들
“작은 영혼의 인간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4p.
△ 그래서 저 “작은 영혼의 인간들”이 도대체 왜 모욕적이고 낡은 성차별의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원문 단어를 알면 검색해볼만 하겠지만, 원문 단어가 불행히도 나에게는 아직 없다.
어떤 체계이든 ‘수학 원리’처럼 강력한 체계는, 사실은 꼭 자체의 것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른 형식체계의 모델들을 포함한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4~15p.
△ 그래서 ‘수학 원리’와 같은 강력한 체계는 다른 어떤 형식체계들의 모델들을 포함한다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그 이론 체계가 어떤 다른 이론들을 포함하였을까?
“푸가“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9p.
△ 음악 용어인 것은 알지만, 도대체 푸가는 어떤 형식을 지칭하는 음악 용어인가?
△ 다행히 검색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푸가는 둘 이상의 가락이 동시에 엮어나가는 형태(그리고 그 가락이 모두 주 가락이면서)를 지니는 다성 음악의 일종으로, 카논이나 인벤션과 같이 한 성부의 주제를 다른 성부들이 모방을 하지만, 엄격한 카논이나 인벤션의 경우와는 달리 보다 부드럽게, 똑같이 모방하지 않고 좀 더 자유롭고 작곡자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인 듯 하다. 찾아본 글에서 설명되어 있기를, 푸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제 – 응답의 형태인데, 보통 한 성부(주로 Dux – 이끄는 자의 의미를 가진다)에서 주제가 등장하면 다른 성부(Comes – 동반자의 의미를 가진다)에서 5도 간격으로 응답이 나타난다고 한다. Dux와 Comes는 어떤 성부에서나 시작할 수 있는데, 푸가에서는 이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 나머지 성부들은 대주제(대선율)라 하여, 주제와 대조적으로 작곡가가 자유롭게 만들게 된다고 한다. 모든 성부에 주제가 한 번씩 나타나면 푸가의 제1부가 끝나게 되는 형태이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kj3774&logNo=12015886303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바흐류의 대위법 형식들(Bach-like contrapuntal forms)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9p.
△ 바흐도 모를 정도로 내가 음악에 문외한이지는 않지만 대위법은 잘 모르겠다. 대위법이 도대체 뭐지?
△ 대위법이란 두 개 이상의 선율을 독립적으로 활용하여 조화로운 음악을 만드는 작곡 기법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바로크 시대의 바흐 음악들이 유명하다고 한다. (https://namu.wiki/w/%EB%8C%80%EC%9C%84%EB%B2%95)
의미론(semantics)이 통사론(syntax)과 같은 종류인가, 어덯게 패턴과 재료가 서로 뗄 수 없는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21p.
△ 의미론과 통사론이 도대체 어떤 이데올로기, 혹은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인지 모르겠다.
GEB에서는 생각 없이 선불교의 유행을 열심히 따르고 있고, 미국 물리학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광포하게 반과학적이고, 비트족의 영향을 받은 히피 같은 불합리성이 깨달음에 이르는 지고의 길로서 환영받고 있고, 동시에 인습타파적인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를 그 모든 것의 수호성인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24p.
△ 이 문장에서 특히 좀 모르는 단어들이 많았다. 선불교가 불교의 한 종파이며, 수행을 중시하는 종파라는 것은 한국사 시간에 배워서는 아는데 도대체 선불교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길래, 그리고 선불교의 유행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길레 GEB에서는 생각 없이 선불교의 유행을 열심히 따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지가 궁금하다. 또, 광포하다라는 표현의 의미가 궁금하고, 비트족이 무엇인지, 인습타파적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리고 작곡가 존 케이지에 대해서 그의 작품 중 하나인 ‘4분 33초’를 제외한 것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
바흐는 열다섯 개의 3성 인벤션(three-part invention)을 작곡했다.
책의 구성. 39p.
△ 인벤션이 음악의 한 종류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더라…….
△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결국 인벤션도 다성 음악의 한 형태인데, 짧은 동기들의 모음곡이라 줄일 수 있겠다. 발명, 착상이라는 뜻이 라틴어 inventi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인벤션은 주로 카논의 모방 기법을 사용하면서 짧은 주제를 전개하는 악곡인데, 여기서의 주제는 보통의 주제에 비해 길이도 훨씬 짧고 역할도 약해서, 보통 ‘주제’라고 부르기보다는 ‘주요 동기’라고 흔히 칭한다고 한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kj3774&logNo=12015886303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여섯 개의 오블리가토 성부로 된 푸가가 듣고 싶다고 했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5p.
△ 푸가야 아까 다루어 찾아보아서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오블리가토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예전에 음악 시간에 들은 기억으로는 중세 교회의 음계였던 것으로 기억되기는 하는데, 맞는지를 모르겠다.
△ 오블리가토는 중세 교회의 음계는 아니고, 예전 바로크 시대에 한 주 선율을 꾸며주는 다른 선율이라고 한다. (http://blog.daum.net/musicanova/7565108)
…… 엄격한 카논을 완성했고 그것에 “음악의 헌정(Musical Offering)”이라는 제목을 붙여 동판에 인쇄했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5p.
△ 이번에는 카논이 뭐냐는 것이다. 또 음악의 한 형태겠지?
△ 찾아보니 나온다. 카논은 일종의 엄격한 형태를 지닌 돌림 노래라 할 수 있다. 주로 주제라고 하는 한 가락을 그 전체를 그대로 모방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 성부의 가락을 다른 성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충실하게 따라하면서, 저절로 화성이 만들어지는 형태이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kj3774&logNo=12015886303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그나저나, 바흐가 작곡했다는 그 음악의 헌정이라는 곡이 어떤 곡인지가 궁금해졌다.
△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었다. (하긴,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음악이기는 하다). 1악장 전체 재생 리스트가 있어 링크를 걸어 두고, 여기에는 1번째 음악을 삽입해두는 선에서 만족하려고 한다.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eytZXD0sfPpd2keyrToFoa6h7F90KSCx
이 생각은 여러 수학자가 거의 동시에 발견한 비유클리드 기하학 – 수학이 실재 세계를 연구한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에 수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발견 – 으로 인해서 박살났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5p.
△ 예전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평면이 아닌 곳에서의 ‘기하학’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을 E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빛의 물리학’에서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어떻게 수학이 실재 세계를 연구한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것인지, 어째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는 영 모르겠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내용과 역사에 관한 조사가 필요할 듯 하다.
유한적인 추론방식이란 수학자들이 통상 받아들이는 작은 규모의 추론방법이었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30p.
△ 그래서 ‘유한적인 추론방식’이 도대체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 어떤 절차의 추론 방법들을 일컫는 것인가?
사실, 괴델의 정리에 상응하는 것이 계산이론에 있는데, 앨런 튜링이 발견한 정지 문제(halting problem)의 해결 불가능성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컴퓨터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구멍”이 있음을 들춰냈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33p.
△ 앨런 튜링이 발견하였다는 정지 문제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것이 가장 강력한 컴퓨터에서조차 피할 수 없는 “구멍”이 있음을 들춰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 정지 문제(Halting Problem)은 판정 문제의 한 갈래로, ‘유한한 수의 단계 후에 주어진 프로그램이 해결되고자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지 우리에게 미리 말해줄 수 있는 어떠한 알고리즘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튜링 머신에 1개의 프로그램과 Input 자료 1개를 넣으면서, 이것이 유한한 단계 후에 답이 나올지 풀어보기 전에 미리 알려줄 수 있겠느냐를 요구할 때, 이를 해결해줄 수 있는 특정한 단일 프로그램이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1936년 앨런 튜링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유물론 옹호자들이 제안하는 모든 것은……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35p.
△ 유물론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 찾아보니 유물론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라고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AC%BC%EB%A1%A0#:~:text=%EC%9C%A0%EB%AC%BC%EB%A1%A0(%E5%94%AF%E7%89%A9%E8%AB%96)%EC%9D%80%20%EB%A7%8C%EB%AC%BC,%EC%9D%B4%EB%9D%BC%EA%B3%A0%20%EC%A3%BC%EC%9E%A5%ED%95%98%EB%8A%94%20%EC%9D%B4%EB%A1%A0%EC%9D%B4%EB%8B%A4.)
이해에 대한 갈망들
GEB의 경우에는, 괴델의 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면은 어떤 진술의 의미가 아마도 의미가 없는 우주에서조차 심오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G는 ‘수학 원리’ 안에서 증명될 수 없다(이것이 정확히 G 자체가 주장하는 것이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괴델의 문장 G(“G는 ‘수학 원리’ 안에서 증명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문장)의 의미이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2p.
△ 위 내용에서, 도대체 괴델의 문장 G 자체가 자기 반복적으로 정의된 것이 약간 꺼림직하게 여겨진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G의 의미 내에 G가 스스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째 나에게는 모순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좀 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라고 하면 괴델의 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면은 어떤 진술의 의미가 아마도 의미가 없는 우주에서조차 심오한 결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이라는 것인데, 도대체 괴델의 업적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예시라도 좀 들어주면 좋으련만…….
△ 2021-01-11의 영원이오 제1차 모임에서 해명되었다. 설명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괴델의 문장 G는 주어진 공리계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참/거짓을 명확히 판별할 수 없는 어떤 진술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러한 괴델의 문장 G가 무모순인 공리계에서는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 추가적으로, 어떤 수학적 체계에 대한 좋은 설명이 있어 덧붙인다. 어떤 참인 명제들의 집합과, 증명 가능한 명제들의 집합이 있다고 하자. 어떤 체계에서, 증명 가능한 모든 명제들이 참이라면, 즉 증명 가능한 명제들의 집합이 참인 명제들의 집합의 부분 집합이라면 이 체계는 건전성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체계에서, 참인 모든 명제들이 증명 가능하다면, 즉 참인 명제들의 집합이 증명 가능한 명제들의 집합의 부분 집합이라면 이 체계는 완전성을 가진다고 한다. 하지만 체계의 건전성은 일반적으로 그 체계가 ‘무모순’적이라고 간주되는 한 성립되는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체계의 완전성에 대한 부정이다. 즉,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다르게 표현하자면 참이지만 체계에서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무모순적인 체계에서는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를 보인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참과 증명 가능을 동치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사실 G는, 정수에 대해서 참인 진술이므로, 증명할 수 있어야 마땅한데, 그러나 – 자기 자신이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자신에 대한 진술로서의 추가적인 의미 층위(levels of meaning) 때문에 – G는 증명할 수 없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3p.
△ 위 내용에서, G가 정수에 대해서 참인 진술이라는 점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G에 대해서 7쪽에서는 G는 그 스스로가 ‘수학 원리’라는 어떤 체계 내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어떤 한 명제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정수에 대한 진술이라는 점은 전혀 생뚱맞게 들린다. 뒤쪽 내용을 조금 살펴보고 나니, 무언가 괴델이 이 G라는 그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가 정확히 이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건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괴델 수(모든 기호체계를 정수에 대응시키는 일대일 대응으로 얻어지는 일련의 숫자열)를 도입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보면 짐작은 되지만, 그래도 무언가 통쾌하게 이해되는 듯한 느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또한, G가 증명할 수 없다라는 의미 자체가 다소 애매해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나아졌다. 증명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개념이라면, ‘어떤 체계 내에서 어떤 명제의 참과 거짓을 드러내는 것, 혹은 그 일련의 과정’인데, 만약 자기 자신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술을 포함하는 G의 특성상, G를 참이라고 가정하면 자신은 증명될 수 없다는 주장도 참일 것이므로 G는 거짓이라는 모순이, G를 거짓이라고 가정해도 같은 원리로 G는 참이라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그 유명한 ‘크레타 역설’ – 이를테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라고 말한 크레타 사람의 말 – 참/거짓 여부의 판단에 관한 그런 느낌의 흐름과 상통하는 듯 하다.
△ 여전히 어떤 참이라고 생각되는 명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앞쪽의 정지 문제에 관한 설명을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정지 문제의 증명 과정은 어떤 하나의 체계 외부적인 조작(혹은 그냥 조작)을 통하여, 체계 스스로가 모순을 도출해내도록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정확하게는 귀류법을 이용하는데 – 정지 문제에서 말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어떤 문제를 예시로 드는데, 그 문제에서 내리는 결론에서 참, 거짓이 명확히 갈리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모순을 발생, 귀류법에 따라 대전제인 이러한 정지 문제의 해법이 존재한다가 틀렸다고 판별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그러니 아마도 괴델은 괴델 수라는 대응(조작)을 도입하고, 이 괴델 수와 체계 내의 방법을 이용해서 귀류법적으로 접근해서 모순, 혹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보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한다.
“나”이다 라는 것(being an “I”) – 다른 말로 하면, 인과율과의 경계가 흐려질 정도로 너무나 깊고 뿌리 뽑을 수 없는 자기라는 감각(sence of self)을 가지는 것 – 은, 지능과 동의어인 유연성(flexibility)과 힘의 불가피한 부수물이고 성분이다. 그리고 지능은 개념적 유연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그것은 다시 의미 있는 기호들을 뜻한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33p.
△ 지능과 유연성이 동의어라는 설명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뒷 부분인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에서의 지능에 관해 다음의 속성들이 본질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기술을 보면 약간 어렴풋하게 엮이기는 한다.
- 여러 상황에 매우 유연하게 대응한다.
- 우발적인 주변 조건을 활용한다.
- 모호하거나 모순적인 메시지로부터 의미를 도출한다.
- 상황의 상이한 요소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것을 인식한다.
- 서로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황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는다.
- 서로를 연계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상황들 사이의 차이를 찾는다.
- 기존 개념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개념들을 합성한다.
-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하지만 그래도 지능이 개념적 유연성과 동의어라는 것, 그리고 개념적 유연성은 의미 있는 기호들과 동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 싶다.
수론의 명제는 수론의 명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수론의 명제는 다만 수론의 명제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2p.
△ 다 좋은데, 수론의 명제가 다만 수론의 명제일 뿐이다라는 것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가 모르겠다. 그냥 하나의 참/거짓을 판별할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참/거짓을 판별할 모든 대상은 하나의 주장이지 않던가? 이 경우 앞 문장 – 수론의 명제는 수론의 명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와 모순이 된다. 뭐지?
△ 뒤쪽 2성 인벤션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수론의 명제는 그 수론의 명제 자체만의 의미를 가진다. 이를테면 수론의 명제에 대한 주장(이 수론의 명제는 참이다)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명제가 되는데, 이것은 수론의 명제보다 계층적으로 보았을 때는 보다 상위 계층에 존재하는 명제일 뿐이다. 즉, 수론의 명제는 그 자체만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수론의 명제에 대한 주장이라는 새로운 명제가 되지, 수론의 명제는 아니다.
이 수론의 명제는 ‘수학 원리’의 체계 안에서 어떤 증명도 가지지 않는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3p.
△ 괴델 문장 G가 위 문장으로 쓰여질 수 있다고 하는데, 괴델 문장 G가 지시하는 수론의 명제란 무엇인가? 만약 이 수론의 명제가 G 그 스스로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관련된 지금의 논의는 수론이라기 보다는 어떤 체계를 논하고 있으니 무언가 이상해진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수론의 명제를 칭하고 있을 것인데, 그러면 무엇을 칭하는 것인가?
△ 2021-01-11의 영원이오에서의 논의에 따르면 괴델 문장 G에서 논의되는 수론은 일반적인 수 체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생각된다. 따라서 수론이라는 용어는 체계와 동의어라고 생각될 수 있을 듯 하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무모순의 체계 내에서도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3성 인벤션의 제논의 역설처럼) 그 체계가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정리라는 점에서, 이 수론의 명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괴델 문장 G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것이 주어진 무모순 체계에서 참이지만 증명될 수는 없다는 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인 셈이다.
즉 ‘수학 원리’의 증명방법이 너무 빈약하여 참임을 증명할 수 없는 수론의 참인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3p.
△ 어떤 명제들의 상위 계층에 있을 체계에 해당하는 수론이 참임을 증명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 하위 계층의 체계인 명제들이 참임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일까? 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괴델의 증명 방법에 관해 알고 싶어진다. 간략하게라도.
△ 2021-01-11 영원이오 모임에서 얼떨결에 말해버려서 정리되어버렸는데 –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증명에 대한 관념이 정리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증명’이라는 것은 어떤 체계의 하층 체계로부터 상층 체계의 한 진술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를테면 A와 B가 참이면 C도 참이다는 식의 삼단 논법도, A와 B라는 하층 체계의 진술로부터 C라는 상층 체계의 진술을 이끌어내는 일련의 과정으로, 증명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수학에서는 이러한 증명 과정을 체계화하는 것이 요구되는데, 이것이 주된 메타논리학의 과제라고 책에서 제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기는 했다.
“외율논리적” 자체는 외율논리적인가?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6p.
△ 일단 외율논리적이라는 말 자체부터가 어렵게 느껴져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그 의미를 아직 이해를 못한 것인지, 위 문장의 의미를 쉽게 풀어쓰면 어떤 의미가 되는지 모르겠다. 즉, 저 문장의 의미 파악 자체가 안 된다.
△ 외율논리적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아닌 다른 요소와 연계될 때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한 논의인 듯 하다. 외율논리적, 자기논리적이라는 용어는 크레타인의 거짓말 –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을 한다”라는 모순의 고리가 스스로, 단 한 문장 내에 있는 명제, 그리고 두 문장의 모순 – 뒷 문장은 거짓이다와 앞 문장은 참이다 – 라는 모순의 고리가 스스로에게는 내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특정 다른 문장들과 엮일 때 발생하는 모순의 고리가 있는 경우를 짚을 때 등장한다. 전자가 자기논리적이고, 후자를 외율논리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특징짓기(characterization)”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분명히 MIU-체계의 추론규칙과 공리는 정리인 문자열을 드러나지 않게 특징짓는다.
제1장 MU-수수께끼. 56p.
△ 드러나지 않게 특징짓다라는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짐작도 안 간다.
덧붙여 형식체계에 대한 한 가지 요구 사항은, 결정절차가 공리 전체를 특징지어야만 한다는, 즉 공리성에 대한 리트머스-테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1장 MU-수수께끼. 56p.
△ 공리를 특징짓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리는 하나의 약속에 해당하는 것인데(형식체계 내에서,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것이 특징지어져야할 필요가 있는가? 즉, 공리에 대한 결정 절차는 왜 필요한가?
기억해두고 싶어지는 문장들
간단히 말해서, “나”는 – 적어도 내 견해로는 – 일종의 소용돌이를 통해서 생기는데, 이것에 의해서 뇌 속의 패턴들은 세상에 대한 뇌의 반영을 반영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들을 반영하는데, 그래서 “나”라는 소용돌이는 실재의 인과적 실체가 된다. 이 기묘한 추상적 현상에 대한 불완전하지만 생생하고 구체적인 유사체를 위해서, TV 화면 자체에 화면을 내보내도록 (그리고 화면 자체에 그 화면을, 등등) TV 카메라가 TV 화면을 향해서 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라 – GEB에서 내가”스스로를 삼키는 텔레비전”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이후 내가 쓴 글들에서 때때로 “층위-교차 되먹임 고리(level-crossing feedback loop)”라고 불렀던 것.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3p.
일반적으로 소, 칠면조, 개구리 그리고 물고기 같은 “인간들” 모두에게는 약간의 의식의 불꽃이나 어떤 종류의 원시적 “영혼”이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맹세코 우리 것보다 훨씬 더 작다는 데에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4p.
GEB는 본질적으로, 자기성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은유로서 이상한 고리를 제안한 긴 이야기이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15p.
인생이 짧다는 것 외에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GEB는 말하자면, 단숨에 쓰였다는 것이다. GEB는 누군가 꿈꾸었던 깨끗하고 순수한 비전이었다. 그는 분명히 당신의 것과 아주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다른 전망과 다소 다른 의제를 가졌다. GEB는 바로 그 사람이 좋아서 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 적어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 그것은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 38p.
모든 유형의 “모방”은, 주제가 그 어떤 임의의 모방으로부터도 완전히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원래의 주제에 있는 모든 정보를 보존한다는 것을 주목하라. 이러한 정보-보존 변형을 종종 동형성(isomorphism)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책에서 동형성과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11p.
“이상한 고리”라는 현상은 위계체계의 층위들에서 위(또는 아래)로 움직이다가 예기치 못하게 출발점에 돌아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발생한다. (여기서 체계는 음악의 조성이다.) 나는 종종 이상한 고리가 발생하는 그런 체계를 기술하는 데에 뒤엉킨 계층질서(Tangled Hierarchy)라는 용어를 쓴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13p.
증명이라는 것은 고정된 체계 내부에서 명제들의 도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2p.
규칙을 가지고 생성할 수 있는 이러한 문자열을 정리(theorem)라고 한다. 물론 수학에서는 “정리”라는 용어에 방금 말한 용법과는 아주 다른 통상적인 용법이 있다. 수학의 정리는 운동의 “비존재”에 대한 제논의 정리나 소수(prime number)는 무한히 많다는 유클리드의 정리같이 엄격한 논증을 통해서 참으로 증명된 언어 명제를 뜻한다. 그러나 형식체계에서는 정리를 명제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지 기호로 이루어진 문자열일 뿐이다. 또한 정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활자처리 규칙에 따라 마치 기계로 생성되듯이 생성될 뿐이다.
제1장 MU-수수께끼. 48p.
모든 형식체계에는 MU-체계의 네 개의 규칙 같은 기호-조작 규칙이 있다. 이 규칙들을 생성규칙(rules of production) 또는 추론규칙(rules of inference)이라고 한다.
제1장 MU-수수께끼. 49p.
정리의 도출은 형식체계의 규칙에 따라서 그 정리를 생성하는 방법을 한줄 한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도출의 개념은 증명의 개념을 모델로 삼았지만, 도출은 증명의 간소한 사촌이다.
제1장 MU-수수께끼. 49p.
이것이 사람과 기계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더 분명히 해보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 가장 명백한 사실들조차도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판에 박힌 일을 하도록 기계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인간의식에 본질적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당신이 휴대용 계산기에 1을 입력하고 그리고 “1”을 더하고 또 1을 더하고, 더하고 더하고 몇 시간 동안 그렇게 계속해도 그 계산기는 당신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서 스스로 그것을 하는 것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라면 반복되는 행동을 재빨리 파악할 텐데 말이다. 또는 좀 우스운 예를 들면, 차 주인이 아무리 오랫동안 또는 운행을 잘 해도 자동차는 차 주인이 도로 위에서 다른 차나 장애물에 충돌하지 않도록 운전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차 주인이 가장 자주 다니는 노선조차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기계는 관찰력 없이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고 사람은 관찰력 없이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가 모든 기계가 필연적으로 정교한 관찰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라. 그렇지 않은 기계도 있다. 모든 사람이 항상 정교한 관찰을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사람들도 종종 매우 관찰력 없이 행동한다. 그러나 기계는 완전히 관찰력이 없도록 만들 수는 있지만, 사람은 되지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대부분의 기계는 관찰력이 전혀 없는 것에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이런 이유로 관찰력이 없다는 속성이 곧 기계의 특성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누가 어떤 작업이 “기계적”이라고 말하면, 사람이 그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만이 불평 없이, 지루해하지도 않고 반복해서 그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제1장 MU-수수께끼. 50~51p.
형식체계를 연구할 때 체계 안에서 작업하는 것과 체계에 대한 진술 또는 관찰을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1장 MU-수수께끼. 52p.
정리성에 대한 테스트, 즉 언제나 유한한 시간 안에 종료되는 테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그 테스트를 주어진 형식체계에 대한 결정절차(decision procedure)라고 한다.
제1장 MU-수수께끼. 55p.
말하고 싶어지는 것들
우리는 앞에서 주어진 2단계의 에피메니데스 고리를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장은 두 번째 문장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두 번째 문장보다 더 높은 층위에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두 번째 문장 또한 첫 번째 문장보다 더 높은 층위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두 문장들은 “무의미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문장들은 언어의 엄격한 계층질서에 근거하는 체계에서는 전혀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은 그렐링의 역설과 에피메니데스 역설의 모든 버전을 막는다.
서론: 음악-논리학의 헌정. 28p.
△ 나에게는 마치 역설을 저지하기 위해 설계한 ‘수학 원리’가 그냥 역설 자체를 성립시키는 요소들을 부인함으로써 애써 역설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역설’을 해결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역설’을 회피하려는, 애써 외면하려는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 느끼기에는.
제논: 이게 왜 그런지 두 분께 설명해도 될는지요? 나는 오늘 오후 내내 A 지점에서 엘레아로 왔습니다. 나의 엄밀한 논증에 귀를 기울일 누군가를 찾으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더군요. 사람들에게 연거푸 퇴짜 맞는 일이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인지 당신들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겁니다. 아, 내 문제로 부담을 줘서 미안합니다…….
3성 인벤션. 42p.
△ 문제의 3성 인벤션 부분에는 제논의 역설 – 그러니까 사실상 ‘운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 제논이라는 사람이 스스로가 창작한 아킬레스와 거북의 역설 속에 등장하여(이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아킬레스와 거북이 그 창작자와 이야기를 한다는 점부터가 상당히 메타적이지만) 대화를 하는데, 이미 스스로가 ‘운동을 하였음’을 이 부분으로(나는 오늘 오후 내내 A 지점에서 엘레아로 왔습니다)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후기
솔직하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초기 GEB 20주년 기념판 서문을 읽을 때는 정말 글이 난해했다. 마치, 내가 별 생각없이 몽롱한 상태에서, 수정 한 번 없이 쭉 문장들을 이어 한 문단을 한 문장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할 때 탄생하는 문장들을 읽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처음 온 목요일에 읽고, 몇 장을 못 넘기고 흥미를 잃어버리고야 말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참고 좀 더 페이지를 넘겨가니 조금씩 재미있어졌다. 특히, 이 책의 서론에서 푸가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푸가 자체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반복과 모방 및 변화를 토대로 하는 음악 장르라는 설명이 마치 책 전체에 대해 반복되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굉장히 놀랍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책 자체가 저자의 설명대로 글과 이야기라는 2개의 주제가 대위법적으로 배치된 구조인데, 이상하게도 바흐의 음악의 헌정 마냥 둘 사이가 밀접하게 엮인 조화를 이루면서 일정 방향성을 가지는 듯 하다. 약간 두려운 것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느끼는 이 상승과 하강의 결말이, 마찬가지로 이상한 고리를 이루게 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이 결과적으로는 자아에 대한 탐구라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 고리를 이루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귀착지가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아니지, 어쩌면 그 고리의 과정에서 무언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 되었든, 조금 더 읽어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