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로 점프

2025-11-18 0 By 커피사유

조금 전에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모두 읽었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두 편의 독서노트에서 나는 이 소설로부터 두 가지의 다른 문학 작품들을 떠올려냈다. 하나,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 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둘의 공통점은 기독교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나는 양귀자의 소설을 읽는 내내 불안함에 시달렸다. 그 결말이 어떤 식으로 맺어지는지에 따라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극단 중 하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책꽃이에 평생 모셔둘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었고, 즉각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던져버릴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작품의 처음 1/3을 읽는 동안 나는 희망했고, 다음 1/3을 읽는 동안 격렬하게 꿈틀거렸으며, 마지막 1/3을 읽는 동안 서사가 결말에 도달해감에 따라 고조되는 나의 불안한 예감을 억눌렀다. 특히 마지막 1/3은 대단히 중대했다. 중반부까지 예시되던 파멸의 가능성 중 하나가 사라졌고, 새로운 가능성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으니까.

그리고 단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 총성은 예고된 것이었다. 형은 이미 선고되었고,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러므로 결말의 방향성은 옳았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철칙으로 강민주는 “줄 아래를 보지 않는 것”을 꼽았다. 그녀는 그렇게 선언하고선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끊어진 줄을 아래에 두고서 “구름 위로 점프”해버렸고, 때문에 남아야 할 것들까지 포함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날아가버렸다”.

내가 종전에 언급한 두 작품의 주요 인물은 이 공허함을 해석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직소》에서는 예수와 유다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하나는 뒤틀린 사랑이 문제가 되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사랑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작품들을 하나의 렌즈로 하여 강민주를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저 끔찍한 공허 앞에서 중얼거린다. 그녀의 변용은 독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최악의 형태로 일어났다고. 흰 린넨 드레스를 입고 “구름 위로 점프”한 이 여자의 결말은 숭고함을 획득해버렸으니까. 소냐에 의해 완성되는 저 위대한 사기꾼, 예수의 방식으로.

그렇다. 소설의 결말은 내가 가장 우려했던 방식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참으로 고맙게도 말미의 대사처럼 “밝고 산뜻하게” 비극은 나에게로 왔다. 작가는 강민주의 입을 빌려 이 극을 두고 “황홀한 비극”이라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전혀 감동적이지도 않고, 전혀 황홀하지도 않은 저 비극. 그 앞에서 나는 황홀하다는 바로 그것이 지독한 모욕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소설을 읽을 독자들에게 고한다. 부디 결말을 마음껏 만끽하시라고, 작가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저 제목은 〈커브〉라는 시의 전문이라고 쓰는데, 그 커브를 종교적 색채로 뒤덮은 작가에게 늘 그렇듯 찬사를 보내시라고.

… 한 사람은 예수, 한 사람은 유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바울이 된 저 결말 위에서, 그렇게 한동안 ‘황홀경’에 젖어 있으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