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2. 괴델, 에셔, 바흐 – 제2장과 제3장

탐서일지 #2. 괴델, 에셔, 바흐 – 제2장과 제3장

2021-01-18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매주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개요

지난 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까치출판에서 나온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저, 박여성 및 안병서 역 – 의 책을 읽었다. 이번 주에는 제2장과 제3장을 읽었다.

호기심을 향한 문(問)과 답(答)들

나는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를 나름대로 각색했다. 캐럴의 대화에서는 같은 사건이 매번 더 높은 층위에서 반복하여 일어난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3p.

△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는 무엇인가? 그가 변형한 ‘거북과 아킬레스’ 이야기에서는 같은 사건이 매번 더 높은 층위에서 반복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어떤 말인가? 매번 더 높은 층위에서 반복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마치 바흐의 ‘음악의 헌정’의 한없이 높아지는 조성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

△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 이야기가 무엇인고 했더니, 알고 보니까 제1장과 제2장 사이에 등장한 2성 인벤션에 등장한 이야기 자체가 ‘거북과 아킬레스’이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캐럴의 거북이와 MP(Modus Ponens, 전건긍정) 라는 개념이 등장하길래, 이것에 대해서 찾아보고 내가 이해한대로 기술하고자 한다.

이 기술은 다음의 두 인터넷 문헌을 참고하였다.

루이스 캐럴과 <영리한 악어>

우선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이라는 사람은 실제 사람 이름은 아니고, 본명이 찰스 도그슨(C. Dodgson)이라는 사람이 그의 집필명으로 사용한 가명이다. 여튼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 어릴 때에는 그냥 뭔가 이상한 동화인 줄 알고 읽었다가 커서는 무언가가 이상하고 추상적인 어떤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사람인데, 이 양반은 사실 동화책 작가는 아니고, 수학자이자 사진가였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수학자답게, 그는 특히 논리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그가 집필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내에서도 잘 드러나고, 그가 제시한 일례의 삼단 논법 사례인 <영리한 악어>라는 삼단 논법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리한 악어>
* 영리한 모든 동물은 사람이다.
* 모든 악어는 영리한 동물이다.
* 모든 악어는 사람이다.

이는 흔히 우리가 옛날 우스갯소리 삼단논법 시리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흔한 구조인데 – 무언가 결론을 제외한 두 전제의 진술들은 참으로 생각되지만 이들이 병렬되었을 때, 즉 함께 나열되어서 이들의 연결이 파악되어 우리가 잘 아는 삼단논법의 규칙으로 최종적 결론을 도출하였을 때, 이 결론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 오는 인지부조화의 우스꽝스러움을 노리는 이러한 구조의 내가 알고 있는 대표적 예시로는 다음이 있다.

<오래된 인지부조화 삼단논법 개그 I>
*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이다.
* 보배는 금은방에서 팔 수 있다.
* 어린이는 금은방에 팔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각각의 두 전제 문장은 합리적이지만, 이들이 동시에 나열되어 있을 때에 도출되는 결론을 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삼단 논법의 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물론 나의 경우는 위의 논의 중 사용된 각 진술에서의 동일해 보이는 단어의 사용 범주가 다르다는 점 – 즉, 이를테면 <영리한 악어>에 관한 논리에 대해서는 제일 윗 전제에 대한 ‘영리한 모든 동물’과 아랫 전제에 대한 ‘영리한 동물’에서의 ‘영리함’이라는 의미에 대한 범주성 – 즉, 그 ‘영리함’이라는 말이 가지는 범위에서의 애매모호함을 지적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리함’이라는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이상의 논의 과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최종 결론인 ‘모든 악어는 사람’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영리한 악어>에 관한 짧은 논의는 결과적으로 내용적으로 타당하고 그럴 듯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로부터 우리는 내용적으로 타당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증과 그렇지 않은 논증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들의 구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과 <영리한 악어>

위에서 다룬 논증 <영리한 악어>는 결과적으로 ‘악어’, ‘영리한 동물’, ‘사람’이라는 세 단어로 대표되는 어떠한 집합에 대한 논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악어’라는 낱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악어들 중 하나의 악어를 생각한다. 즉, 제시된 세 개의 단어들은 어떤 전체 현실 세계에서의 특정 집합에 속하는 하나의 원소인 셈이라는 것이다. <영리한 악어>에 등장하는 위 세 단어를 각각 X, Y, Z로 대체한다고 생각하자. 이 경우, 우리는 흔히 ‘바바라(barbara)’라고 불리는 다음의 삼단 논법 형식을 얻게 된다.

<바바라>
* 모든 Y는 Z이다. ( = Y가 속하는 집합은 Z가 속하는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 모든 X는 Y이다. ( = X가 속하는 집합은 Y가 속하는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 모든 X는 Z이다. ( = X가 속하는 집합은 Z가 속하는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X가 속하는 집합, Y가 속하는 집합, Z가 속하는 어떤 대상들의 집합을 각각 X, Y, Z의 외연이라고 한다고 한다.

여기서 다음의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 <영리한 악어>와 <바바라> 형식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용 의존적인 일상적 논증의 타당성과 형식적 타당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일상적 합리성과 형식적 합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논의는 결과적으로 <영리한 악어>가 <바바라>라는 삼단 논법의 형식으로부터 얻어졌다는 점, 그리고 그 <영리한 악어>는 우리가 흔히 참이라고 생각되는 형식적 체계에 의하여 도출되었는데 그것이 현실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앞서 논의된 모순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제시할 수 있는 두 가지, 서로 대조되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도식적 사고 방식(schematic thinking)>과 <비도식적 사고 방식(non-schematic thinking)>이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두 사고 방식의 차이는 형식적 체계와 일상적 사례의 층위 순서에 대한 것이 핵심인 듯 하다. 무슨 말인지 하나씩 설명해보기로 하자.

도식적 사고 방식(schematic thinking)

도식적 사고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해하자면, 형식적 체계를 보다 기본적인 층위 – 즉 하위 층위로 두고, 이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도출해내는 – 예를 들자면, 일상적 사례로 생각될 수 있는 것들을 – 사고 방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듯 하다.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참이고 거짓인 진술을 판별하는 규칙으로써 위의 <바바라>의 체계와 같은 삼단 논법 체계를 습득하였고, 이를 통하여 어떤 일상적 진술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특히, 합리성을 ‘결론에 대한 적절한 근거 찾기, 근거를 가지고 적합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성향들’을 통칭하는 은유라고 할 때, <바바라>의 형식 등을 구성하는 형식적 합리성은, <영리한 악어>라는 비교적 일상적 차원에 가까운 진술의 하위 층위에 있다. (이것을 내가 읽은 글에서는 ‘규범적 기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영리한 악어>의 논의의 결론에서 도달한 인지부조화에 의하여, 이러한 <도식적 사고> 방식에 대한 적절성은 무언가 다시금 숙고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가 흔히 ‘연역적 사고’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러한 방식 – 즉, 체계에 의하여 일상적 사례를 분석하는 이 사고 과정이 실제 논증 분석에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그렇다고 <도식적 사고>가 만물을 해결하는 만능 열쇠와 같다고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만약 <도식적 사고 방식>이 근본적 사고 방식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상적 진술을 이미 적절하거나 합리적이라고 전제되어 있는 이 사고 방식으로 판단하고 있으므로 – 즉, 이러한 형식이 이미 마음과 같은 것에 각인되어 있어 공리와 같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형식’을 발견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역사적 사실도 알고 있으니, 이것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여, <도식적 사고 방식>에 반하는 다른 사고 방식을 하나 떠올릴 수 있다.

비도식적 사고 방식(non-schematic thinking)

비도식적 사고 방식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도식적 사고 방식과 달리 형식적 체계와 일상적 진술의 층위가 반대로 되어 있다. 즉, 형식적 체계로부터 일상적 진술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진술로부터 형식적 체계가 판단된다는(혹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줌달의 일반 화학에서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모형 세우기’와 같은 것으로, 실질적인 현상이나 물질에서부터 추상적인 개념을 얻는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즉, 결과적으로 이 사고 방식을 옹호한다면, <바바라> 형식으로부터 얻어진 <영리한 악어>가 잘못된 진술이 된다. <영리한 악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 이를테면 그 유명한 다음의 삼단 논법:

<소크라테스의 죽음>
* 모든 사람은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 역시도 ‘사람’, ‘소크라테스’, ‘죽는 존재’라는 어떤 용어와 이 용어에 상응하는 외연들을 상정할 때, 결과적으로 <바바라> 형식과 같은 집합의 부분 집합 관계로 추상화될 수 있는 일상적 진술이다. 비도식적 사고 방식은, <바바라> 라는 형식적 체계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슷한 일상적 진술들의 동형성으로부터 얻어진 어떤 하나의 모델, 혹은 체계라고 주장하는 사고 방식이며, <바바라> 라는 형식 체계로부터 이들 일상적 진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현실의 요소가 추상화 과정 – 이를테면, ‘개념을 모임이나 집합으로 대체시키는 것(‘악어’가 현실 세계의 악어들의 집합으로 대체되는 과정)’, ‘내용 구성에 내재한 인과 관계나 시제, 가능성, 필연성, 당위성 등의 양상을 제거시키거나 연산자들로 대체시키는 것(<영리한 악어>에서 우리가 일련의 나열된 각 문장들에서 집합들의 포함 관계라는 진술을 얻어낸 것)’, ‘내용적 연결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접속사들을 논리적 연결사들로 대체시키는 것(이를테면, 언어에서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그러므로’를 상징하는 수학적 기호로 대체하는 것)’ 등 – 을 통하여, 형식적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도식적 사고 방식에서 ‘형식적 합리성’ – 이를테면 <영리한 악어>라는 논의가 <바바라> 라는 형식에 들어맞는다 – 는 발견은 일상적인 합리성, 즉 <영리한 악어>는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술, 혹은 논의가 형식적으로 옳다고 해서, 그 논의가, 그 진술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영리한 악어>의 사례처럼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적 합리성은 일상적 합리성으로부터 추상화 과정의 특정 조건들을 경유해 생성되는 것이지,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영리한 악어>와 <바바라> 형식의 비교를 통해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정당화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캐럴의 거북이 논쟁을 가지고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옹호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논의인 듯 하다. 왜냐하면, <영리한 악어>와 <바바라> 형식의 비교를 통해 단순히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정당화하기에는, 즉 이상의 사례 하나로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에는 <바바라> 형식이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면, 그 어떤 논증 및 추론 형식 – 즉 형식적 체계도 ‘그 형식을 만족하지만 타당하지 않은 논증’ – 이를테면 <바바라>에게는 <영리한 악어>와 같은 사례 – 가 생기기 마련인데, <바바라> 형식만을 예로 들어 이를 요구하기에는, <바바라> 형식이 너무 특별하다. 즉, <바바라> 라는 형식은 세 개의 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외연을 요구하고 있으며(‘사람’, ‘영리한 동물’, ‘악어’와 이에 상응하는 현실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 집합들), 더욱이 그 중 하나는 두 전제 사이를 이어주기 위해서 두 전제에 공통적으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영리한 동물은 사람이다’와 ‘모든 악어는 영리한 동물이다’라는 두 전제에서 ‘영리한 동물’이라는 용어와 이의 외연은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이것이 <바바라> 형식의 제한이기도 하다)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대화로 구성된, 루이스 캐럴의 아킬레스-거북이 논쟁은 전건 긍정(MP)라는 좀 더 일반적인 <비도식적 사고 방식>의 일종을 채용한다는 점에서 좀 더 논의할 만 하다.

그래서, 루이스 캐럴의 거북이와 아킬레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서론이 좀 많이(그리고 심각하게) 길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라는 논의가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옹호하는 논의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명시해두고 싶었다.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 논의는 멀지 않았다. 이 책의 제1장과 제2장 사이에 있는 대화문 ‘2성 인벤션’이 결과적으로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 논의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해당 전문을 그대로 옮기기는 너무나 기니, 축약해보도록 하자.

아킬레스는 거북이에게 다음의 세 진술을 보여 준다.

(A) 길이, 면적, 무게 등에서 똑같은 것으로 동일한 대상들은 서로 동일하다(책에서는, ‘어떤 하나에 대해서 같은 것들은 그들끼리 서로 같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B) 이 삼각형의 양변은 길이에서 똑같은 것으로, 동일한 두 대상들이다(책에서는, ‘이 삼각형의 두 변은 나머지 변에 대하여 같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Z) 이 삼각형의 양변은 서로 동일하다(책에서는, ‘이 삼각형의 두 변은 서로 같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거북이는 A와 B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윽고 Z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A와 B를 받아들이면서도, Z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거북을 아킬레스는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그는 A와 B를 받아들이면 내용적으로 자연히 Z를 부정하기는 힘들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는 그런 그에게 다음 명제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C1) A와 B가 참이면, Z도 참이어야 한다.

거북은 결과적으로 아킬레스의 사고 과정은 C1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참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생략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거북은 A와 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고 다시 주장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추론한다는 것의 의미를, A와 B에서 Z를 유한 번의 단계적인 절차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아킬레스와의 대화를 통해, 거북은 C1을 참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A와 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고(즉, 유한한 단계 안에서 이끌어낼 수 없다) 주장한다. 그러자 아킬레스는 거북에게 다음의 진술을 보여 준다.

(C2) A, B, C1이 참이면, Z도 참이어야 한다. 즉, A와 B가 참이고, A와 B가 참일 때 Z도 참이라면, Z도 참이다.

거북은 C2의 진술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Z를 받아들이기 거부한다. 그러자, 아킬레스는 거북에게 다음의 진술을 보여준다.

(C3) A, B, C1, C2가 참이면, Z도 참이어야 한다.

여전히 거북은 C3의 진술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Z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A와 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하려면(유한한 단계 내에 이끌어짐을 보이려면) C1, C2, C3, C4, … 와 같은 진술들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거북이의 사고 방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가 가능한 것이다.

<거북의 사고방식>

(1) A
(2) B
(3) A 그리고 B
(4) C1, 즉 A 그리고 B이면, Z
(5) C2, 즉 A 그리고 C1이면, Z
(6) C3, 즉 A 그리고 C2이면, Z

이러한 복합적인 논증 형태를 띤 <거북의 사고방식>은 Z를 입증하기 위하여 계속 진술 C1, C2, … 가 계속 발생하는 ‘무한한 단계’ 덕분에, A와 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었다. – 즉, Z를 받아들일 수 있는, Z의 진위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절차’가 없다, 이 말이다.

여기까지가 2성 인벤션에서 논의되는 거북과 아킬레스의 대화인데, 이는 그 부분에서도 다루고 있듯, 19세기의 논리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과 교훈을 낳았다. 이들의 논쟁으로부터 얻어진 주요한 교훈 중 하나는 MP(modus ponens, 전건 긍정 형식) 이라는 형식을 사례로 한 <비도식적 사고 방식>에 대한 옹호였다.

전건 긍정 형식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급선무일 듯 하다.

전건 긍정 형식(MP, modus ponens)

전건 긍정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적 체계인데, 다음과 같다.

p와 q가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진술들이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p
p이면, q
q

MP의 형식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대화에서 C1이라는 진술로 대표되고 있는데, 19세기의 논리학자들은 긴 논쟁 끝에 <추론 규칙>과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이라는 개념을 들고 와서 아킬레스로 하여금 거북을 질타하도록 했다. 즉, 아킬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거북을 질타하도록 했다.

거북 자네는 결과적으로 <도식적 사고 방식>의 틀에 묶여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세. 자네가 매 단계에서 발생하는 C1, C2, C3, … 의 진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네가 그저 우리의 논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형식에만 너무 집착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일세. 자, 우리가 C1이라는 진술을 MP라는 추론 규칙이라고 생각하자고. 이것은 우리의 논의 과정에서 하나의 ‘진술’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야. 즉,자네가 C2로 나타낸 진술도 결과적으로는 MP의 p에 ‘A 그리고 B’를, q에 ‘Z’를 집어넣은 경우를 나타낸 것 뿐이라는 것이며, 자네는 그 경우를 마치 Z를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근거, 혹은 전제로 취급한 것이지. 그 바람에 자네의 논리에서는, 역시 MP의 사례로 취급될 수 있는 C3, C4, C5, …의 진술들이 계속 발생한 것이고. 하지만 알아두게. MP는 논리적 추론 중의 근거, 혹은 전제가 아닐세. MP는 그 과정의 근거, 혹은 전제들에, 즉 우리의 진술들에 작용하되, 그 진술로 취급되지는 않는, 우리 논의 밖의 ‘외적으로 작용하는 추론 규칙’인 것일세. 자네는 MP라는 형식 체계를 취급할 때, 이것을 <도식적 사고 과정>에 따라, 이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추가 진술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점을 들어, 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MP라는 이 형식 체계는 애초부터 우리가 논의 이전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논의 바깥의 ‘약속’이라는 것일세.

거북의 사고 방식은 MP라는 형식 체계를 논의 바깥에 약속된 ‘추론 규칙’이며, 이것이 논의 바깥에서 논의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도식적 사고 방식>에 따라 부정하고 이 형식 체계마저 하나의 진술로 끌어들이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비도식적 사고 방식>에서 강조되고 있는, 형식적 합리성이 항상 현실적 합리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거북의 형식적인 체계의 실재 세계에서의 논의에서의 구축에 의한 논리는 현실에 대한 합리성을 결론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MP와 같은 형식 체계의 일부 – 우리가 일상적 참인 진술로부터 추상화한 어떤 형식을 추론 규칙으로 지정하고, 이것을 논의 바깥에서 논의로 적용하되, 이것을 하나의 논의 내 진술로 보지 않는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을 받아들인다면, <거북의 사고방식>은 근거 혹은 전체(논의 내 진술)과 추론 규칙(논의 외 약속)을 혼돈한 것일 뿐이다. 애초에, 우리가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 합리성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구축하는 일련의 사고 단계이지, 전적으로 형식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 집에 와서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중 하나를 듣지 않겠나? …

무반주 아킬레스를 위한 소나타. 83p.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가 왜 등장하는지, 그리고 이 제목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 작가가 그 장의 제목과 소재가 너무 밀접한 관련이 있게 구성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해하고픈 욕망이 독자인 나로써는 아주 강렬하게 불타오른다.

△ 우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1번(Sonata for Violin Solo No. 1 in G minor, BWV1001)을 Youtube 연주 링크를 걸어 둔다.

하지만 이 곡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고 난 결과, 아무래도 내가 내린 이 작가가 왜 이 장을 이렇게 구성하였는가에 대한 해답은 곡에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음 설명들을 병렬하는 한 후 부언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 https://m.blog.naver.com/opazizi/221585169538

개설

연주가로써의 바흐를 생각할 때 우선 첫째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가 오르가니스트라는 것이며, 이어서 클라비어로 향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하나에 바이올리니스트로써의 바흐가 있다. 그는 어릴 때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 주법을 배웠던 것 같다. 북독일의 뤼네부르크에 있는 성미카엘 교회 부속 고등학교의 급비생이었던 15세로부터 17세 때 처음에는 합창 단원이었으나 이윽고 변성기를 맞이하여 그 후에는 바이올린 주자나 비올라 주자로써 교회의 합창단에 고용되었으며, 같은 무렵에 중부 독일의 소도시 쩨레로 여행을 하여 그곳의 궁정에서도 바이올린 주자로서 아르바이트를 한 듯 하며, 여기에서 언급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기악 음악은 후의 바흐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702년에 성미카엘 교회 부속 고등학교를 마쳤다(중도 퇴학인지, 아니면 이미 단위를 모두 취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후에 오르가니스트의 직장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취직한 곳은 바이마르 궁정의 바이올리니스트 자리였다. 이상의 사실로 보더라도 바흐가 바이올린 주법에 정통했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작품 면에서 증명한 대표적인 것으로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들 수 있다. 홀수 번호의 세 곡은 이른바 교회 소나타(소나타 다 키에자)이며, 짝수 번호의 세 곡은 각 악장이 춤곡으로써 형성된 바로크 모음곡, 즉 실내 소나타(소나타 다 카메라) – ‘파르티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파르티타(partita, partie, partia, parthia, parthie)는 원래 16~17세기의 기악 작품을 의미했으나, 요한 쿠나우, 그의 학생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 용어를 무용 모음곡과 동의어인 음악 작품들의 모음집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A5%B4%ED%8B%B0%ED%83%80

감상

바이올린 독주곡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입체적인 구성이 취해져 있어 충실한 화음의 울림, 대위법 등 대단히 고도의 주법이 도처에 아로새겨져 있다. 느림 – 빠름 – 느림 – 빠름이라는 네 개의 악장으로 된 전형적인 교회 소나타의 형태를 하고 있는 세 곡과 4, 5, 6악장으로 악장의 수효가 하나씩 늘어 나가는 파르티타가 번갈아 가면서 늘어 놓여져 있는 데에서는 정과 동의 원리를 읽을 수 있다. 즉, 정연한 양식을 가한 바로크 춤곡에 의해서 구성된 모음곡 – 파르티타가 번갈아가면서 배치된 것은 분명히 계산된 것이며,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소나타에 있어서의 제1악장은 제2악장의 푸가와 한 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제2, 및 제3소나타는 제1악장이 빨림음 위에 반마침되어 있어서 서주적 색채가 짙다.
서주적이다 – ‘序奏적이다’로 사용된 듯 하며, 서주(序奏)는 음악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뒤에 나올 중요한 부분의 악곡을 도입하는 준비로서 연주하는 전주라고 한다. – https://ko.dict.naver.com/#/entry/koko/cb39030a8f4c43d2a5342da557d3d47c

★ 바이올린의 가능성을 실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가 다른 바이올린 작품들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음악적인 특징은, 기본적으로 선율 악기인 바이올린에서 건반 악기적인 입체적인 음향을 발굴해 내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바흐의 뛰어난 음악적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바이올린의 4현을 이용해 4개의 음, 혹은 그 이상의 음으로 구성되는 다성부 음향을 창조해 냄으로써 마치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과 유사한 음향을 얻는다. 이러한 바이올린 어법은 드물고 혁신적인 것으로, 당시 독일의 몇몇 바이올린 작곡가들에 의해 새로이 시도되고 있었던 다성적 기반의 독주 바이올린 작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에 작곡된 유사한 형태의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들 중 바흐의 작품만이 살아남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때문에 외젠 이자이나 바르톡과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의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들에서도 이 명작의 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부언

주목하여야 할 것은 바흐가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둘 다 다루어본 작곡가였다는 점,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라는 작품은, 바이올린 독주곡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과 유사한 음향을 얻어내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작가가 아킬레스의 말만을 수록한 것은, 이 바흐의 작품에서 홀로 연주되는 ‘바이올린 선율’에 대응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바이올린 선율이 홀로 연주되지만 이것이 은연 중에 감상자로 하여금 오르간과 같은 건반 악기의 다채로운 음색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제3장의 전경과 배경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이것은, 마치 84p에 제시되는 에셔의 그림 모자이크 II와 같이, 어떤 한 색상의 여백이 다른 색상을 구성하는 것과 유사한 대응 관계에 있다. 또한, 아킬레스의 말로 거북의 대화를 짐작케 하였다는 책의 순서에서의 작가의 말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바이올린으로부터의 건반 악기의 연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해에 대한 갈망들

어떤 형식 체계에서든 적격 문자열이라는 개념은, 그 문자열의 기호가 다른 기호로 해석되었을 경우, 문법적인 문장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2p.

△ 위 문장에서 두번 등장하는 ‘기호’가 같은 기호인지 다른 기호인지 헷갈린다. 무슨 말이지?

△ 그 ‘기호’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해석’이라는 말에 집중해보면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석이라는 행위는 동형성을 근거로 하여 두 형식 체계의 요소들을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을 지시하므로, 어떤 한 형식 체계에서의 적격 문자열은 이 형식 체계가 다른 형식 체계에 일대일 대응되어도(즉, 해석되어도) 그 다른 형식 체계의 규약에 맞는 다른 문자열(문장)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p—q——$이라는 $pq-$ 체계에서의 적격 문자열은 이 체계가 덧셈 체계에 대응되었을 때 얻어지는 $2+3=6$이라는 문장으로 대응된다. (산출) 물론, 이 문장(진술)이 참인 것은 아니지만.

제3장 – 전경과 배경 전체

솔직하게, 내가 수학적으로 주로 다루던 기호가 아닌 하이픈과 문자를 사용한 문자열 형태의 새로운 형식 체계를 정의해서 소수와 합성수를 다루는 이 저자의 시도 덕에 이 장 전체를 이해하는데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일단 문장들을 보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를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일단은 줄을 긋고자 하는 욕구를 참아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장을 다 읽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정도 갈피가 잡혔는지 – 그가 하지 말라고 만류하기는 했지만 해석을 도입해서 내가 알고 있는 수학적 사실들과 연관시켜 이 형식 체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니 좀 나은 듯 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의문점을 기록할 생각은 없고, 이해가 되지 않던 제3장에 등장하는 형식 체계들에 대한 일반적으로 배운 수학적 체계로 대응한 해석을 병렬하려고 한다. 혹은, 지금까지 이해한 그 문장의 의미를 기술해놓고자 한다.

이것을 활자형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일단 중요한 것은 활자형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전체 레퍼토리를 MIU- 체계와 pq- 체계에서 제시했고, 이제는 우리가 허용한 종류의 것들에 대한 목록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1) 유한한 기호 집합 중에서 어떤 것이든 읽고 인식하기
(2) 그 집합에 속하는 어떤 기호이든 적기
(3) 그 기호들 중에서 어떤 것이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복사하기
(4) 그 기호들 중에서 어떤 것이든 삭제하기
(5) 어떤 기호가 다른 기호와 동일한지 점검하기
(6) 앞서 산출된 정리들의 목록을 유지하고 사용하기

제3장. 전경과 배경. 87p.

△ 아무래도 활자형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위의 내용에서 나열된 6개의 행위만을 이용하여 진행하는 작업인 듯 하다. 위 6개의 행위에서 등장하는 ‘기호’가 ‘정리’를 지시하는지, 아니면 형식 체계에서 약속된 ‘기호’ – 이를테면 1, 2, 3, … 과 같은 숫자나 +, -와 같은 연산자를 지시하는지 헷갈리기는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건대 ‘기호’는 후자를 가리키는 듯 하다. 왜냐하면 제1장에서 ‘정리’를 주어진 형식 체계 내에서 생성 규칙에 따라 공리들을 변형하여 얻어낸 것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생성 규칙은 현재까지 봐 온 바에 따르면, 위의 작업 중 (1) ~ (5)의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MIU- 체계에서 하이픈 연장이나 U 삭제와 같은 규칙을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이러한 비유에서 ‘기호’는 체계에서 약속한 표시 문자, 혹은 연산자 등을 통칭하여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수식을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1)의 행위이고, 수식을 적어 내리는 것은 (2)번 행위이며, 그 수식을 옮기거나 인용, 사용하는 것은 (3)번 행위이고, 수식을 지우고 수정하는 행위는 (4)번 행위를 동반하며, 어떤 한 수학적 방식이 다른 수학적 방식과 동일한지를 점검하는 것은 (5)번 행위이고, 수학적 논리 전개에서 각종 알고 있는 정보, 정리를 사용하는 것은 (6)번 행위로 비유된다.

공리도식: x가 하이픈-문자열일 경우 xt-qx는 공리이다.

추론규칙: x, y와 z가 하이픈-문자열이라고 하자. 그리고 xtyqz가 기존 정리라고 하자. 그러면 xty-qzx는 새로운 정리이다.

이에 따라서 –t—q——라는 정리를 도출해보면:

(1) –t-q– (공리)
(2) –t–q—- ((1)을 기존 정리로 사용하고, 추론 규칙에 따라서)
(3) –t—q—— ((2)를 기존 정리로 사용하고, 추론 규칙에 따라서)

제3장. 전경과 배경. 88p.

△ 이 tq- 체계는 이 저자가 자연수에서의 곱셈을 나타내는 형식 체계를 하이픈을 사용하여 문자열 형태로 나타내려고 한 시도이다. x가 하이픈 문자열이라는 것은 x가 자연수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되며, 이 경우 공리 도식은 x가 자연수인 경우 $x \times 1 = x$는 공리이다로 해석된다. 마찬가지로 추론 규칙의 경우는 x, y, z가 자연수라 하자. 그리고 $x \times y = z$이면, $x \times (y+1) = z + x$이다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t—q——은 $2 \times 3 = 6$이라는 정리로 해석되며, 정리의 도출 과정은 (1) $2 \times 1 = 2$ (공리) -> (2) $2 \times 2 = 4$ (1로부터) -> (3) $2 \times 3 = 5$ (2로부터)로 해석될 것이다.

규칙: x, y, z가 하이픈-문자열이라고 하자. x-ty-qz가 정리라면 Cz도 정리이다.

제3장. 전경과 배경. 89p.

△ 이 규칙은 마찬가지의 해석을 도입하면, x, y, z가 자연수일 때, $(x+1) \times (y+1) = z$이라면 z는 합성수이다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저자는 C라는 기호를 ‘합성수’에 대응하는 활자형 기호로 채택한 것이다.

제안 규칙: x가 하이픈-문자열이라 하자. Cx가 정리가 아니면, Px가 정리이다.

제3장. 전경과 배경. 89p.

△ 마찬가지의 해석 하에서, 자연수 x가 합성수가 아니면, x는 소수이다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단락 바로 뒤에서, 이렇게 정의하는 소수는 Cx가 정리가 아님을 보이는 것, 즉 x가 합성수가 아님을 보이는 것은 체계 내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체계 내에서는 유한한 단계 내에서 x가 합성수가 아님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이려면, 체계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해석에서는, 이 하이픈-형 체계에 상응하는 자연수 체계라던가, 수론의 체계 밖으로) 이것은 체계 전체를 훼손하는 규칙이므로, 완전한 체계를 구축하고픈 수학자들의 욕망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정형(구멍을 통한) 정의 말고, 일반적인 소수에 대한 규칙성, 혹은 소수를 일반적으로 부정적 선언이 아닌 선언으로써 정의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 즉, 소수를 부정적 선언이 아니도록 정의하는 형식 체계를 찾으려고 한다. 이 말을 책에서는 91p에 그 구멍들도 또한 공통으로 어떤 “형태”를 가지는가? 라는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필기체로 그릴 수 있는 전경은 그 배경이 그림을 그릴 때 우연히 나타는 부산물일 뿐인 전경이다. 재귀적인 전경은 그것의 배경 또한 독자적인 전경으로 파악될 수 있는 전경을 말한다.

제3장. 전경과 배경. 92p.

△ 저자가 어려운 수학적 개념을 최대한 미술적 비유로써 쉽게 설명하려고 한 노력은 보이지만, 더 어려워졌다. ‘전경’이 무엇을 비유하였는가가 본격적인 문제가 될 것인데, 전경과 배경은 서로 NOT 게이트를 통과하는 의미 – 즉 서로 부정격에 있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전경의 역을 보면 배경이며, 배경의 역이 곧 전경이다. 하지만 문제는 97p에 기술되는 다음의 정리에 따르면, 아무래도 전경의 의미는 ‘어떤 체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정리들의 집합’으로 봐야 할 것 같다. 97p부터 등장하는 다음 표혀에서, 전경은 적극적 공간, 정리 집합, 형식 체계와 가까운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닐까?

형식 체계 중에는, 그것의 소극적 공간(비정리 집합 – 정리가 아닌 것들의 집합)이 그 어떤 형식 체계의 적극적 공간(정리 집합)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

제3장. 전경과 배경. 97p.

△ 이는 결국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유사한 표현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듯 하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대하여 제1장에서 살펴본 표현은 ‘무모순인 어떤 수론 체계 내에서도, 참/거짓 여부가 명확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는(체계 내의 수단으로 기술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위 말은, 결과적으로 어떠한 형식 체계에서 약속된 정리 집합의 여집합 – 즉, 소극적 공간(비정리 집합)이 그 어떤 형식 체계의 적극적 공간(정리 집합)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정리의 형태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수론 체계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보인 것이므로, 수론 체계의 한계를 기술한다는 점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동급이다.

재귀적 열거 가능 집합이지만 재귀적이지 않은 집합들이 존재한다.

제3장. 전경과 배경. 98p.

△ 위 문장에 이어지는 하단의 설명에서 문자열에 대한 재귀적 열거 가능은 이 문자열이 활자형 규칙에 따라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정리가, 혹은 진술이 수론 체계의 생성 규칙에 따라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용어일 것이다. 즉, 적극적인 공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 정리 집합에 속한다를 뜻하는 다른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 반면 재귀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비정리 집합도 어떤 체계 내에서는 정리 집합이 된다를 지시하는 표현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표현으로도 이상의 정리가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형식 체계 중에는, 활자형 결정 절차가 없는 것도 존재한다. (= 정리 집합 내에 속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제3장. 전경과 배경. 98p.

공리도식: xyDNDx (x, y는 하이픈-문자열이다)

보기: —–DND–, 여기서 x는 –로, y는 —로 대체되었다.

규칙: xDNDy가 정리이면, xDNDxy도 정리이다.

제3장. 전경과 배경. 100p.

△ 앞서 적용하였던 하이픈-문자열에 대한 해석을 고수하면, 공리도식은 자연수 x, y,에 대하여 x+y는 x의 약수가 아니다로 해석된다. 이 진술은 자연수 x, y의 경우 x+y는 항상 x보다 크므로, x를 어떤 수로 나누어 얻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공리를 얻는 방법이다. 규칙은 자연수 x, y에 대하여 x가 y의 약수가 아니면, x는 x+y의 약수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는 대우를 생각해보면 편하다. 대우는 자연수 x, y에 대하여 x가 x+y의 약수이면 x는 y의 약수이다인데, x가 x+y의 약수라면 $x+y = x(1 + k)$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 경우 $y = kx$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규칙: –DNDz가 정리이면, zDF–도 정리이다.

규칙: zDFx가 정리이고 또한 x-DNDz가 정리라면, zDFx-는 정리이다.

규칙: z-DFz가 정리라면, Pz-는 정리이다.

공리: P–

제3장. 전경과 배경. 100 ~ 101p.

△ 같은 해석을 적용한다면, 첫 번째 규칙은 자연수 z에 대하여, 2가 z의 약수가 아니라면, z는 2부터 2까지의 그 어떤 자연수로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로 해석될 것이다. 이는 당연하다. 두 번째 규칙은 자연수 x, z에 대하여, z가 2부터 x까지의 그 어떤 자연수로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고, x+1이 z의 약수가 아니라면, z는 2부터 x+1까지의 그 어떤 자연수로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로 해석된다. 역시 당연하다. 세 번째 규칙은, 소수 집합을 적극적 형태로 정의하는 것으로써(어떤 체계의 정리 형태로 기술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자연수 z에 대하여, z+1이 2부터 z까지의 그 어떤 자연수로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다면, z+1은 소수이다로 해석된다. 또한, 그 밑의 공리는 2는 소수이다로 해석된다.

기억해두고 싶어지는 문장들

‘$x$’는 두 번 다 같은 개수의 하이픈으로 이루어진 문자열을 나타낸다는 것에 유의하라. 예를 들면 $–p-q—$는 공리이다. 물론 ‘$xp-qx-$’라는 표현 자체는 공리가 아니다(‘$x$’는 $pq-$ 체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공리를 주조하는 거푸집 같은 것으로 공리도식(axiom-schema)이라고 한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4p.

△ 이 공리 도식을 단순히 무한성과 연결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듯 싶다. 왜냐하면, 공리 도식은 단순히 틀, 거푸집과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항상 생성되는 공리들의 개수가 무한하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공리 도식에서 들어가는 input의 개수를, 공리 도식의 정의 자체에서 제한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경우, 그 중에는 생성 가능한 공리의 개수가 유한한 것도 존재한다. 공리 도식으로 생성될 수 있는 공리들의 개수는 무한할수도, 유한할수도 있다. (2021-01-25. 영원이오)

무엇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느끼게 할까? 내 대답은 우리가 $pq-$ 정리들과 덧셈 사이에 동형성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동형성”이라는 낱말을 정보-보존 변형이라고 정의했다. 이제 그 개념에 좀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동형성”이라는 용어는 두 개의 복합 구조가 서로에 대해서 일대일 대응될 수 있을 때 적용하는데, 이때 한쪽 구조의 각 부분에 대해서 다른 구조에 대응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대응하는”이라는 낱말은 두 부분이 그들의 각각의 구조에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8p.

아래에 동형성의 개념에 대한 탁월한 본보기가 있다. “더 낮은 층위”의 동형성, 즉 두 구조의 부분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 있다:

p <- -> 더하기
q <- -> 같다
– <- -> 하나
— <- -> 둘
— <- -> 셋

이 기호-낱말 대응관계를 해석(interpretation)이라 한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8p.

또다른 해석 방식은 의미 있는(meaningfu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해석에서는 정리와 참이 대응한다. 즉 정리와 현실의 어떤 부분 사이에 동형성이 존재한다. 그것이 해석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좋은 이유이다. 그 어떤 기존 낱말도 ‘$p$’에 대한 해석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더하기’가 우리가 내놓은 유일한 의미 있는 선택이다. 요컨대, ‘$p$’는 수백만 개의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p$’의 의미는 ‘더하기’인 것 같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0p.

형식 체계 안에서의 의미는 수동적인 상태로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문자열을 구성하는 기호의 의미에 따라서 개개의 문자열을 판독할 수는 있지만, 순전히 우리가 기호에 할당한 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정리들을 창출할 권한은 없다. 해석된 형식 체계는 의미가 없는 체계와 의미를 가진 체계 사이의 경계선에 걸쳐 있다. 그 문자열들은 사물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체계의 형식적 속성의 결과로서만 그럴 수 있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1p.

그런 거창한 그림을 다루지 말고 “현실세계”를 수학으로 국한해보자. 여기에서 심각한 질문이 하나 제기된다: 우리가 수학의 어떤 부분을 본떠서 형식 체계를 만들었다면 우리가 그 과제를 정확하게 해냈는지 – 특히 수학의 그 부분에 아직 100퍼센트 익숙하지 않다면 –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형식 체계의 목적이 우리에게 그 분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가 그 동형성이 완벽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았다면, 모든 정리의 해석이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그 분야의 진리에 대해서 아직 모두 알지 못한다면 그 동형성이 완벽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떤 발굴 현장에서 좀 불가사의한 형식 체계를 우리가 실제로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여러 가지 해석을 시도해볼 것이고 아마도 결국 모든 정리는 참이 되도록 하고, 모든 비정리는 거짓이 되돌 하는 것 같은 해석을 발견해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점검할 것이 유한해서, 우리가 바로 직접 점검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정리의 집합은 무한할 것이다. 그 형식 체계와 그에 대응하는 해석 영역 모두에 대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면, 모든 정리들이 그 해석 아래 참을 표현한다는 것을 어떻게 것인가?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4p.

이 마지막 단계는 일반화(generalization)라고 하는데, 나중에 더 형식적인 맥락 속에서 이 일반화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일반화는 우리가 단 하나의 수($N$)의 관점으로 논증을 펼치고 나서 $N$이 지정된 수가 아니라는 점을, 따라서 그 논증은 일반적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 있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80p.

말하고 싶어지는 것들

언어와 사고는 형식적 규칙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3p.

△ 결과적으로 위 질문은 앞서 문과 답에서 내가 살펴본 루이스 캐럴의 아킬레스와 거북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것에 대한 다른 형태가 <도식적 사고 방식>과 <비도식적 사고 방식> 중 어느 것을 더 옹호할 수 있겠는가? 혹은 형식적 합리성과 일상적 합리성 중 어느 것이 선행되는가? 따위의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 이게 이 책의 핵심이자 궁극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2021-01-25. 영원이오)

△ 일상적에서의 “언어 문법 규칙”과 동형성은 동일한가? (2021-01-25. 영원이오)

깊이 생각해본다면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 $pq-$ 체계는 원래는 의미가 없지만 한 형식 체계의 기호들이, 적어도 동형성이 발견되면, 일종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 형식 체계에서의 의미와 언어에서의 의미 사이의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그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우리가 한 언어에서 어떤 낱말의 의미를 배웠다면, 우리는 그 낱말의 의미를 토대로 새로운 진술들을 만든다. 어떤 점에서 그 의미는 문장을 만드는 새로운 규칙을 창출하기 때문에 능동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완성된 제품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장을 만들기 위한 규칙은 새로운 의미들을 배울 때 증가한다. 반면에 형식 체계 안에서는 정리들이 생성 규칙을 통해서 미리 정해져 있다. 우리는 정리들과 참인 명제들 사이의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경우) 동형성에 근거하는 의미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기존 정리에 새로운 정리들을 추가하는 데에 틀을 벗어나서 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제1장의 형식성 요구가 당신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0 ~ 71p.

△ 솔직하게, 지난 2년 동안 고등학교 수학을 배워온 나로써는 위 문단을 읽고 수학적 귀납법이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수학적 귀납법이 딱 저런 식 아니였는가. 흔히 초기 상태(이를테면, 자연수에 대한 수학적 귀납법의 경우는 1인 경우에 대해) 먼저 주어진 진술이 참임을 보이고, 그 다음은 일련의 진술들의 생성 규칙(k일때 성립하면 k+1일 때 성립) 내에서 연쇄적으로 진술들의 참/거짓 여부가 일치함을 보여 결과적으로 무한한 어떤 범주 내에서도 주어진 진술이 정당하다고 보이는 수학적 방법 중 하나니까…….

짧은 정리로 긴 정리를 만드는 방법을 일러주는, 그러나 그 역은 불가능한, 모든 형식 체계는 자신의 정리에 대한 결정 절차를 반드시 가진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5p.

△ 뒤에서 논의되는 상향 결정절차하향 결정절차라는 개념 덕분에 이 문장은 받아들일 만 하다. 왜냐하면, 두 결정 절차로 하여 공리성에 대한 결정 절차가 존재하는 어떤 체계 내에서는 모든 정리를 공리로 환원시키거나, 공리들로부터 정리를 얻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상향 결정 절차는 결정 절차가 존재하는(공리도식이 존재하는) 체계의 공리들로부터 정리들을 유한한 단계 내에 얻어내는 방법이고, 하향 결정 절차는 결정 절차가 존재하는(공리도식이 존재하는) 체계의 정리들을 유한한 단계 내에 이미 인정되는 공리들로 환원시키는 방법이다. 그렇게 이해될 수 있을 듯 하다.

둘째로 더 높은 층위에 참인 명제와 정리 사이의 대응이 있다. 그러나 이 더 높은 층위 대응은 기호에 대해서 어떤 해석을 할까라는 선행 선택 없이는 인식할 수 없음에 주의하라. 따라서 그것을 참인 명제와 해석된 정리들 사이의 대응이라고 기술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두 층으로 된” 대응관계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모든 동형성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8p.

△ 약간 다시 읽을 때 헷갈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석을 달아 둔다. 위 문장은 동형성을 기반으로 하는 형식적 체계와 일상적 진술 사이의 연관이라는 행위를 ‘낮은 층위의 대응’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선행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참인 명제와 정리 사이의 대응’을 ‘높은 층위의 대응’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참인 명제’는 ‘일상적 진술’과 가까운 말이고, ‘정리’는 ‘형식적 체계’ 쪽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결정절차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정리성에 대한 기준은 처음 두 무리의 하이픈들을 더하면 세 번째 무리의 하이픈 개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2=4$이므로 $–p–q—-$는 정리인 반면, $2+2$는 $1$이 아니기 때문에 $–p–q-$는 정리가 아니다. 왜 이것이 적절한 기준인지 보기 위해서 먼저 공리도식을 보자. 분명히 공리도식은 덧셈 기준을 충족시키는 공리만을 만든다. 둘째, 생성 규칙을 보자. 첫 번째 문자열이 덧셈 기준을 충족시키면, 두 번째 문자열도 반드시 그렇다. 반대로 첫 번째 문자열이 덧셈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두 번째 문자열도 반드시 그렇다. 그 규칙은 정리가 덧셈 기준을 유전적 속성으로 가지도록 한다. 즉 $pq-$ 체계의 모든 정리는 덧셈 기준을 후속 정리들에게 전해준다. 이것은 왜 덧셈 기준이 옳은지를 보여준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65p.

△ 솔직하게 말하건대, 앞서 살핀 아킬레스와 거북 이야기를 읽고 다시 이 문단을 살펴보았을 때, <비도식적 사고 방식> 및 <도식적 사고 방식>에 대한 논의와 이 문단 사이의 동형성이라고 생각된 것에 대해서 기록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윽고 생각하다가, 그것은 동형성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기에, 나중에 또 헷갈릴까 염려되어 기록해둔다. 이 문단에서 말하는 것은, 비록 일상에서 형식 체계에 잘 맞는 사례가 있더라 하더라도, 이 사례들로 하여 기존에 있는 형식 체계에 마음대로 새로운 정리를 추가하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미 형식 체계는 생성 규칙들을 통해 미리 정리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앞서 논의한 <비도식적 사고 방식>과 <도식적 사고 방식>은 사고 방식에서의 이러한 형식 체계와 현실 사이의 우선 순위에 대한 논의이며, 그 중 <비도식적 사고 방식>은 이러한 형식 체계는 현실적인 요소보다 우위일 수는 없다는 논의이지, 이것이 이 문단과 동치는 아니다. 즉, 앞선 사고 방식에 대한 논의와 이 문단은 동형성이 없다.

그러나 현실과 형식 체계는 독립적이다. 그 누구도 이 둘 사이에 동형성이 있다고 의식할 필요는 없다. 양자는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p-q–$가 정리라는 것을 알든 모르든 $1+1=2$이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3p.

△ 이 문장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저자가 현실의 사례로 든 $1+1=2$라는 문장은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을 추상화한 하나의 형식 체계에서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두 형식 체계를 예시로 병렬하고 있지, 현실과 형식 체계의 예시를 병렬하고 있지는 않다. 차라리 현실과 형식 체계라고 하기 보다는, 두 형식 체계 사이의 대응으로 설명하는 것이 나았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현실 자체가 매우 복잡한 형식 체계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73p.

△ 위 문장은 결과적으로 볼 때 ‘결정론’의 의미를 함축하는 듯 하다.

이 증명은 질서 정연한 사고 과정을 예증한다. 모든 명제는 그 앞의 명제와 거스를 수 없는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것이 그것을 “훌륭한 증거”라기보다는 “증명”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수학의 목표는 언제나 명백하지 않은 명제에 대하여 엄격한 증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단계들이 엄격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명제들을 함께 묶는 패턴화된 구조(patterned structure)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80p.

△ 이 부분에 이 논의를 가져와도 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패턴화된 구조가 사실은 아까 <아킬레우스와 거북> 이야기의 추론 규칙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논의 외적에서 파악되는, 각각의 진술들을 이어주는 일련의 약속이자 규칙. 그것이 추론 규칙이며, 패턴이니까.

우리는 평생 낱말들을 특정한 패턴으로 사용해왔는데, 그 패턴을 “규칙”이라고 부르는 대신, 우리의 사고 과정들의 절차들이 낱말들의 “의미” 때문에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발견은 수론의 형식화로 나아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얻은 아주 중대한 인식이었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81p.

△ 이 부분도 아까 <아킬레우스의 거북> 이야기를 가져와서 해석하면 재미있게 느껴진다. ‘사고 과정들의 절차들이 낱말들의 의미 때문에 생겨난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은, ‘사고 과정의 절차’들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체계’에 상응하는 개념이며 ‘낱말’은 보다 ‘일상적 영역’에 상응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마치 19세기의 논리학에서의 논쟁에서 ‘형식적 합리성’이 ‘일상적 합리성’으로부터 근원한다는 <비도식적 사고 방식>의 옹호가 득세한 것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어떤 형식 체계를 이용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사고 능력 수준을 얻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제2장. 수학에서의 의미와 형식. 82p.

△ 이 문장은 ‘인공지능’을 떠오르게 하는 문장인 듯 하다. 어떤 형식 체계로 우리가 가진 사고 능력 수준을 얻는 것을 이론적으로 구현하고 이것을 현실로 옮기는 시도가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후기

제2장은 전반적으로 찾아보다가 걸린 루이스 캐럴의 아킬레스와 거북 이야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 덕분에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으나, 제3장은 완벽하게 낯선 형식 체계들의 갑작스러운 덮침 덕에 당황해서 좀 얼이 빠진 상태로 두 세번을 읽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제3장과 제4장 사이의 두문자어 대위법은 읽을 염두가 나지는 않는다. 음… 한숨 자고 일어나서 읽으면 나으련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책은 참으로 드물게 나를 흥분시키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