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5

2026-01-10 0 By 커피사유

낙서 시리즈는 커피사유가 쓰고 있는 글의 일부를 살짝 들추어보는 공간입니다.


약간의 서문

지난 낙서와 마찬가지로, 벌써 올해로 3번째 해를 맞이하는 고교 친우들과의 ‘날적이’ 독서 모임에서 쓴 글의 일부를 올린다. 이번 글은 나 자신이 금월 모임의 주최자로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그리고 《직소》를 함께 읽는 과정의 일환이다. 2023년에 서평을 남긴지 2년이 지난 지금, 전반적인 평가는 바뀌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분석에서는 스스로의 날카로운 시각이 그럭저럭 성장했음을 느낀다. ‘탐서일지’ 시리즈에 공개하기에는 아직 이전에 마무리짓지 못한 글들이 많아 요원해보여, 일단 여기에 먼저 그 일부만을 공개해둔다.


쓰고 있는 글의 일부

죄(罪)와 마조히즘(Masochism)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아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 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생각한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해서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왠지 모르지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습니다.

― pp. 46-47.
  • 굳이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두 해 전 8월, 이 독서 모임에서 《도덕의 계보》를 같이 읽을 적에 그 ‘두 번째 논문’에 대해 내가 달아두었던 아래와 같은 해설만을 살펴보아도 충분할 것 같다.
    • “니체는 선조들의 ‘가치평가’, 선조들의 ‘입법’에서 기원하였을 전통과 풍습에 대해 복종하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부채 의식’이 선조들이 ‘신’의 영역으로 마침내 올라섰을 때 ‘그 어떠한 대상물로도 이를 변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상, 그리고 이에 따라 자신은 ‘파산한 채무자’이며 따라서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여기게 되는 그리스도교에 이른다고 본다. 처음에는 단순한 채무자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이 책임 의식이 ‘결코 변제받을 수 없는 부채에 대한 의식’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인간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존재하는 ‘잔인함’의 방향을 틀어 스스로를 단죄하고 고통 위에 자발적으로 올라가도록 하는 ‘병’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니체가 보는 〈양심의 가책〉인 것이다.”
    • “‘약자’ 또한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니체는 이들의 힘에의 의지는 이들이 굴종하고 지배받은 역사에 의하여(즉, 관습과 전통,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성역’에 기꺼이 도전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 맹목적으로 복종한 역사에 의하여) 오랜 시간 타(他)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표출될 수 없었으므로, 그리고 바로 이 역사에 의하여 그들이 가지게 된 ‘강자’, 즉 지배 계급에 대한 원한에 의하여 뒤틀린 나머지 먼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즉 자신에 대한 지배의 원천되는 자들에 대한 부정의 질을 부여하고 이들을 ‘악’으로 규정한 뒤, 그런 뒤에야 그 반대로서 ‘선’한 자, 즉 자기 자신을 상정하였고 피지배계급으로서 끊임없이 시달린 억압과 지배받음으로부터의 고통을 오히려 스스로 원하는 마조히스트가 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니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통상의 도덕 · 사회적 규범 · 법률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가지게 되는 〈양심의 가책〉이란 약자들이 이러한 절대성에 도전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에 원한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역설적이지만 역사와 ‘노예도덕’의 발전에 따라서 오히려 죄의식과 ‘인간성의 내면화’가 고도화됨에 따라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이어진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 요조는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말했다. 요조에게 있어 ‘도깨비 그림’이나 ‘지옥의 말’이란 전후 맥락으로 보아 그가 염증을 느낀 타자와 그 타자들로 구성된 사회 일반이다. 요조는 이전까지 이들 앞에서 ‘익살’ 즉 가면을 쓴 필사적인 연기를 통해 사회 부적응자의 낙인을 피하고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온 개인적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이 ‘도깨비 그림’과 ‘지옥의 말’을 그가 기꺼이 그리겠다고 할 때 그것은 이 ‘익살’과 같은 쪽에 놓인 것인가, 아니면 반대쪽에 놓인 것인가를 우리는 마땅히 검토해야 한다.
  • 이 검토에서 우리는 요조가 화가와 자신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아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라고 진술한다. 이러한 기술은 표면적으로는 화가의 심리 그리고 행위에 대한 기술이지만, 그 기술이 작중 요조가 보인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자신을 향한 진술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요조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라고 규정한 상태에서, 이 화가들은 자신과 달리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이라 표현한 것이 된다.
  • 그런데 여기서 ‘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심리적 긴장 상태를 해소하는가? 즉 화가들과 요조가 만약 그들이 피로를 느낀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세계에 대해 가지는 실망감을 해소해주는가? 그렇지 않다. 표현 행위를 통해 이들은 일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 즉 억압된 감정의 배출에 따른 쾌를 느낄 수 있겠지만 그 감각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여전히 이들에게 있어 타인은 ‘도깨비’ 내지는 ‘요괴’이고, 이 인식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그들의 화폭에 반영된다. 세계 앞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낯섬, 구토감은 하나도 해소되지 못하고서 계속하여 그림 위에 올라 되새겨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조의 다짐이란 실질적 해법이라기보다는 단기적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며, 그 미봉책이라는 것도 자신이 불쾌함을 느끼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자신 앞에 세우고 묘사함으로써 쾌감을 얻는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는 고통을 느끼는 대상에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은밀한 만족을 얻는 것을 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방인(L’Etranger)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또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제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또 속된 말로 ‘뒤가 켕기는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 상처는 제가 아기였을 때부터 저절로 한쪽 정강이에 생긴 것이 크면서 치유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 뼈에까지 닿아서 밤마다 겪는 고통이 변화무쌍한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퍽 기묘한 표현입니다만) 그 상처가 점차 혈육보다 더 정답게 느껴지고 그 통증이 상처와 살아 있는 감정, 사랑의 속삭임으로까지 느껴졌던 저라는 남자에게 예의 지하 운동 그룹의 분위기는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편안했습니다. 즉 운동 본래의 목적보다 그 운동의 표피가 저한테 잘 맞았던 것입니다.

pp. 60-61.
  • 요조는 이 대목에서 세계를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 ① ‘합법의 세계’, 그리고 ② ‘비합법의 세계’. 전자는 소위 ‘양지’에 해당하고 후자는 ‘음지’에 해당한다 할 것인데, 그는 스스로를 ‘음지의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합법의 세계’는 요조의 반대에 있는 세계, 즉 그가 속하지 못하는 다수의 세계라 할 것이고(법률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다수에 의해 제정되므로) ‘비합법의 세계’는 요조와 같은 쪽에 있는 세계, 즉 그가 속하는 세계라고 정리할 수 있다.
  • 요조는 ‘음지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 즉 다수로부터 환대받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으며 퇴출이 논의되는 소위 ‘실격자(失格者)’들을 보면 ‘정다운 마음’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다운 마음’은 그가 목격하는 타인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어서 요조는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실격자들과 함께 그 ‘다정한 마음’을 받는 대상에 자기 자신을 놓고 있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대상화(Objectification)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정다운 마음은 ‘패자’, ‘악덕한 자’, ‘떳떳하지 못한 놈’을 대상으로 삼는 마음임에 다시 주목해보자. 자기 자신을 이러한 사람들과 같은 위치로 두는 요조는 이 술어들에 ‘비참한’, ‘범인(犯人, Criminal) 의식’, ‘통증’이라는 날카롭기 그지 없는(통찰력의 차원에서의 ‘날카로움’이 아닌, 힐난의 의미에서의 ‘날카로움’의 차원에서) 표현들을 결부시키면서도 비교적 담담하고 체념어린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말들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은 멀쩡해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제3자로 격하시키는 유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 요조가 이 진술에서 자신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다시 한 번 그의 진술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는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이는 요조가 자기 자신을 ‘연민’을 가장한 혐오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면서 그것으로부터 ‘황홀함’이라는, 그 행위의 잔인함과는 괴리된 감정을 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황홀함은 그가 자기 자신을 죄(罪)를 저지른 범인(犯人)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익숙해졌고 그 통증이 이제는 살아 있는 감정이나 사랑의 속삭임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그의 병리적 상태를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 이러한 그의 상태는 그의 유년기 시절 다케이치에게 도깨비 그림과 지옥의 말을 그릴 것이라고 진술하면서 은밀히 꾀한 자기 희롱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앞서 III.2.에서 진술한 것처럼 요조는 고통을 느끼는 대상 즉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며 답답함과 고립감을 느끼는 타자들 앞에 자신을 끊임없이 세우고, 그들과 상종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일종의 ‘차이와 고립으로부터 오는 쾌감’을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와 고립’이란 결과적으로는 요조 자신이 세계에 대한 부적응자, 즉 이방인(異邦人)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매도하는 행위 속에 숨겨진 일종의 분리적 정체감의 과시를 통해 최종 달성되는 것이다. 그가 ‘지하 운동 그룹’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쓸 때, 그 문장 자체를 쓰인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