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 이전에 대한 충실성

2026-06-08 0 By 커피사유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면 승패가 있는 경기를 벌이게 된다. 그 결과가 내게 중요하다면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내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같은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잘못 짚거나 빗나갔다고 여겨지는 것만 챙겨 듣고, 내가 동의할 수도 있는 부분들은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러고 나서 상대방의 완고함을 부각시키면서 나의 우월한 해결책을 주장한다. 이 경기의 규칙은 우리가 적대적으로 듣고 말하도록 가용하면서, 양쪽 사이의 긴장을 상승시켜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바로 그 때문에 쟁점이 충분하게 논의되기 훨씬 이전에 어떤 사람이 “투표를 제안”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파커 J. 파머 (Parker J. Palmer),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김찬호 역, 글항아리, 2025. p. 253. (블로그 〈후라이의 꿈〉에서 재인용)

‘충실성’에 대한 몇 가지 보충

숙고한 결과 골라낸 상기 인용에 대한 제목 중 ‘충실성’은 최근 짚어나가고 있는 프랑스 철학의 계보 중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용어 Fidélité 를 생각했다. 읽고 있는 책에서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몇 가지 보충해두기로 한다.

#1. 바디우의 ‘사건’ 개념

바디우는 증상 이론을 이어받아서 새로운 질서의 조짐이 등장하는 것사건이라고 말합니다.

… (중략) …

사건은 불어로 évènement, 영어로 event입니다. 사건은 어떤 것일까요? 사건은 천재와 기인에게만 국한되지는 않고,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바디우는 프랑스혁명을 예로 들면서 기존 사회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고, 그 일들이 상징계의 질서인 기존 체계에 구멍을 내고, 구멍이 점점 커지면서 사회를 와해시키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바디우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사건의 또 다른 예로 예수그리스도의 등장을 들고 있습니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법의 체계, 구약의 체계,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만든 기존의 질서 체계에 균열을 내고, 구멍을 내면서 등장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장용순,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이학사, 2023. pp. 137-138.

#2. 바디우의 ‘진리’ 개념

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은 혼돈과 질서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를 바디우의 용어로 말하면 ― 바디우는 수학 용어를 철학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 실재계무한하면서 공백, 공집합($\varnothing$)인 상태, 상징계유한하면서 셈하기가 가능한 상태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상징계는 라캉의 용어로 지식체계이고, 바디우의 용어로 백과사전의 체계라고 말합니다. 이 백과사전의 체계에 구멍을 내는 것이 사건이고 사건은 여러 절차를 거쳐서 진리(vérité/truth)가 될 수 있습니다. 바디우는 상징계에 구멍이 생기는 것으로부터 진리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대단히 특이한 진리관입니다. 대단히 특이한 진리관입니다. 일반적인 진리관과 달라서 당황하실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진리를 하나의 실체처럼 아직 알지 못하지만 도달할 수 있고 파악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진리관입니다. 반면에 바디우의 진리관은 상징계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죠. 뒤샹이나 피카소의 엄청난 작업이 기존 미술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테슬라가 전선 없는 전기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지고, 혁명이 일어나서 ‘이게 뭐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바디우는 진리가 출현하는 절차라고 봅니다. 바디우는 진리가 형성된다, 만들어진다고 하는데요, 이때 먼저 백과사전의 체계에 구멍이 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Ibid. pp. 148-149.

#3. 바디우가 말하는 절차로서의 ‘진리’

바디우에게는 과정으로서의 진리, 절차로서의 진리만이 존재합니다. 바디우에게 실체로서의 진리는 없습니다. 바디우의 이런 생각은 라캉과 하이데거로부터 왔습니다. 라캉에게 무의식이나 증상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바디우에게 진리는 산출되는 것이고, 주체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정치적 사건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주체로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진리의 절차를 간단히 설명드리면 상황의 상태, 상징계의 체계, 백과사전의 체계가 있고 거기에 공백이 출현하는데, 우리는 공백 자체를 볼 수는 없고 그 공백의 가장자리를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됩니다. 백과사전의 체계에 등록되어 있지 않고, 명명 불가능한 것으로 바디우는 불법체류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진짜 불법체류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태지로 예로 들면 그를 발라드, 댄스, 트로트 중 어느 장르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음악의 불법체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중략) …

기존 체계가 정지한 후에 사람들은 사건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명명(nomination)을 바디우는 개입(intervention)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그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일이 사건에 충실한지 확인하고 탐색(enquête)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사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충실성이고, 사건에 합당한 명제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사건에 충실할 때 일어날 일을 미리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 강제입니다.

Ibid. pp. 159-160.

#4. 바디우가 본 현대 사회와 ‘진리’의 관계

무한은 공백을 통해서 그 모습을 나타내지만, 상징계의 기존 권력은 무한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정하거나 억압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무한의 에너지를 무조건적으로 억압하기보다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유한의 권력 안으로 흡수합니다. 이런 방식을 바디우는 ‘은폐(recouvrement)‘라고 부릅니다. 바디우는 민주주의적 유물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에는 오직 몸과 언어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진리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기존 권력은 그것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언어는 세계를 설명해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은폐합니다. 진리는 언어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말할 수 없는(indicible) 것이고, 언어로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구분 불가능한 것입니다. 〈도식 19〉에서 언어와 몸은 상징계 쪽에, 진리, 존재는 실재계 쪽에 위치합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민주주의적 유물론의 세계는 의견과 다수결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물질에 의해서 모든 가치가 결정되는 촘촘하게 짜인 상징계를 말합니다. 바디우는 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한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는 여론조사, 의견 수렴, 그리고 다수결에 의해서 작동되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체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Ibid. pp. 174-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