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7. 사건, 증상, 주체로서의 〈단소 살인마〉

문답록 #7. 사건, 증상, 주체로서의 〈단소 살인마〉

2026-06-25 0 By 커피사유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글들 간 동형성 · 차이점을 기반으로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확장해보는 공간입니다.

들어가며

이하에는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사계 대광장에 게재된 우리 온라인 문화에서 조롱성 밈(Meme)으로 소비되고 있는 〈단소 살인마〉 클립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분석을 본 뒤 쓴 글을 달아둡니다. 글의 성격 상, 당초의 글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원 글을 쓴 FM0905씨의 양해를 구해 그의 원문을 제 글 앞에 먼저 둡니다.


원문(原文). FM0905, ‘나는 누구인가?’: 엽편영화로서의 「단소 살인마」 비평

먼저, 이 글은 유튜브에 「(원본)지하철 단소빌런 앞에 나타난 해병 532기 연평부대 출신 … 분위기 순식간에 반전」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7호선 취객 난동 사건을 촬영한 영상을 엽편영화로서 비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위 영상의 제목은 밈으로 알려진 이름인 「단소 살인마」로 정리하겠다.

이 글의 목표는 「단소 살인마」를 한 편의 영화로 보며 이 안에서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고, 일상이 비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보겠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3분 14초이고, 고정된 카메라가 ‘단소 살인마’를 따라가며 원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한 영화이다. 즉, 기본적으로 ‘단소 살인마’의 행적을 보여주는 영화인 셈이다.

‘단소 살인마’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저항하는 인간, 반항하는 인간으로 볼 수 있다. ‘단소 살인마’는 사회의 규범과 규칙에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의 준칙과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자 하는 인간이다.

「단소 살인마」는 이러한 ‘단소 살인마’가 저항하고 꺾이는 서사를 3분 14초에 압축한 영화라 볼 수 있다.

첫 장면부터 천천히 따라가보겠다. 7호선 열차가 신대방삼거리에서 출발한 지 한참 지나, 보라매역에 다다를 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외친다. “차 문 닫아! 절 싫으면 절 떠나! 절에 부처님이 없잖아. 교회! 씨발, 교회, 교회…”

‘단소 살인마’는 안내방송에 저항한다. 안내방송은 역에 도착할 것임을, 곧 문이 열릴 것임을 알린다. 전철의 문이 열고 닫히는 것은 개인이 컨트롤 할 수가 없다. 철도회사의 시간표에 맞추어 움직이는 열차의 문은 정해진 시간에 기관사가 열고 닫는다.

그러나, ‘단소 살인마’는 “차 문 닫아!”라고 명령문으로 말한다. 열차의 문을 열고 닫는 게 자신인 것처럼 말함으로서 ‘단소 살인마’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을 꿈꾼다.

이 생각은 확장되어 “절 싫으면 절 떠나!”로 이어진다. 이러한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인이 나가라는 선언이다. ‘단소 살인마’의 대사는 의식의 흐름을 취하고 있다. 위 대사의 ‘절’은 “절에 부처님이 없잖아.”로 이어진다.

절에 부처가 없다는 명제는, 우리가 절에 다니고 불전함에 돈을 넣고 무언가를 비는 행위가 무의미함을. 우리가 종교에 의지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선언한다. 특히, 불교라는 종교가 스스로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한 열반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을 생각하면, 절에 부처가 없다는 선언은 종교가 인간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상기한다.

또한 이 대사는 ‘교회’로 이어지며, 유일한 로고스인 하느님을 믿는 유일신교에 대한 반발의 단말마로 읽힐 수 있다. 즉, 이 첫대사에서 ‘단소 살인마’는 개인을 억압하고 따르게 하는 규범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깨닫고 의지로 행동하는 삶을 선언한다.

‘단소 살인마’는 뒤이어 봉을 단소로 여러 번 친다. ‘단소’는 저항의 의미를 나타내는 소품이다.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누군가를 공격하든 휘두르고 소리를 낸다. ‘단소’는 어떤 윤리도, 도덕도 따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단소 살인마’는 타인에게 먼저 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사회에, 종교에, 시스템에 분개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사건은 한 시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저항을 마친 ‘단소 살인마’가 자리에 앉으려 할 때 한 시민(‘시민 1’로 칭하겠다)이 말한다. “저런 씨발 새끼 저거, 저거…” ‘단소 살인마’는 개인을 모욕하지 않았지만 ‘시민 1’에게 모욕을 받게 된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이런 개새끼!”로 응수하면서 모든 사건이 시작된다.

‘시민 1’은 이런 반항하고, 자신의 의지를 행하고자 하는 개인을 조롱하는 사회의 목소리이다. 제일 먼저 욕을 하고 이에 ‘단소 살인마’가 다가가 ‘단소’를 휘두르자, “때려봐!”라고 응수하며 ‘단소 살인마’를 조롱한다.

이런 충돌은 새로운 시민(‘시민 2’로 칭하겠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시민 2’는 말한다. “어이! 어이! 야 인마! 조용히 해!”

앞으로 등장한 ‘시민 2’가 ‘단소 살인마’를 향해 하는 모든 말이 명령문인 것을 감안하면, ‘시민 2’는 사회의 명령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시민 2’에게 ‘단소 살인마’는 응수한다. “좆대가리 물고 저승 간다.”

‘시민 2’는 다시금 앉으라는 명령을 하지만, ‘단소 살인마’는 의식에 따른 말을 내뱉는다. “나는 저승을 안 가봐지고…” 그러나 그런 말을 끊고 새로운 명령이 온다. “자리에 앉아!”

그러자 ‘단소 살인마’는 “이런 씹새끼야! 안 앉으면 어쩔래?”라는 말과 함께 ‘시민 2’에게 다가간다. ‘시민 2’는 그 말을 무시하며 계속하여 같은 명령, “자리에 앉아!”만을 반복한다. 그런 ‘시민 2’에게 단소 살인마는 말한다. “안 앉으면 어쩔래? 나 여깄어, 나 여깄어, 해봐!”

‘단소 살인마’는 사회의 명령을 되풀이 할 뿐인 ‘시민 2’에게 자신은 사회의 명령을 거부할 것임을 밝히고, ‘시민 2’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할 수 있다면 집행해보라고 말한다. ‘시민 2’가 손을 얹자 뿌리치는 것으로 이러한 저항은 거세진다.

그러나 ‘시민 2’는 같은 명령을 되풀이한다. 이 이후 이어지는 ‘단소 살인마’의 질문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대변한다. “너 누구야?” ‘단소 살인마’는 ‘너’에 대해 묻는다. ‘너’는 그저 ‘너’이다. 사회도, 무엇도 아닌 그저 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다. ‘단소 살인마’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의 의지와, 사회의 명령을 되풀이하는 ‘시민 2’에게 ‘너’는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나 ‘시민 2’는 반복하여 명령을 내린다. 그에 ‘단소 살인마’는 응수한다. “Who are you?”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한다. ‘단소 살인마’에게 영어는 ‘강조’의 언어이다. 또한 한국에서 영어를 말함으로서 사회의 공용어 개념에 저항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되풀이 되는 명령에 ‘단소 살인마’는 주먹을 휘두른다. 존재의 표시이다.

그러나 ‘시민 2’는 여전히 명령만 내린다. ‘단소 살인마’의 폭력적 위협 또한 무시한채 권위에 기댄 명령만을 내린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나는 너 그 벌써 봤어. 왜? 개새끼 뚜드려 잡고 깽값 물어줄 일 있냐? 씨발새끼야!”라고 말한다.

이는 두 가지를 상기시킨다. ‘단소 살인마’는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개인은 저항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러나 또한 ‘깽값’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사회는 저항하고자 하는 개인을 규범과 법률로 묶어놓고 오히려 제압할 수 있다. 강자의 폭력은 정의지만 약자의 폭력은 ‘깽값’의 영역임을 상기하는 것이다.

이에 ‘시민 2’의 옆에 앉아있던 시민(‘시민 3’으로 칭하겠다)은 그저 웃는다. 이러한 충돌과 저항의 장면이 누군가에겐 단지 유희, 웃음임을 상기한다. ‘단소 살인마’는 돌아가다가 다시 한 번 ‘시민 2’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단소’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 ‘단소’를 줍는 과정에서 ‘시민 3’이 웃는 것을 보자 “씨발새끼, 너도 까불래? 콱! 단소로 눈깔을 뽑아버릴라 이 씨발새끼들아! 확 뽑아버려, 이 개새끼야!”를 외치며 두 사람을 위협한 뒤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단소 살인마’는 “Come on, come on, come on. 나 여깄어.”라고 외친다. 저항과 강조의 언어인 영어를 통해, 자신의 구역, 자신이 유리한 장소로 갔음을 알린다. 이 때, ‘단소 살인마’가 앉는 좌석이 교통약자석임을 알 수 있다. 교통약자석은 약자를 위한 좌석이다. 개인으로서의 ‘단소 살인마’가 약자에 있고, 사회의 시스템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고 벗어날 수 없는 인간상임을 보여준다. 이는 후반의 분위기 전환을 이끄는 상징이다.

‘단소 살인마’가 자리에 돌아가자, ‘시민 2’는 경찰에 신고한다. 자신보다 더 강한 구속력이 있는 사회의 명령을 재소환하는 것이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이리 와! 이리 와! 저런 씹새끼! 그러지 말고 덤벼봐! 콱!”이라고 외친다.

‘너’는 누구인지 답하지 않고, 그저 강한 권력만을 소환하여 개인을 지우려는 태도에 대한 항의이다. ‘단소 살인마’는 다시 일어나 옆 칸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시민 2’를 쳐다보며 외친다. “너 이 씨발새끼, 오늘 제사상에 밥그릇 심어 놔. 너 오늘 뒤지면 나도 제삿날 다 봤어.” 그러나 ‘시민 2’는 동요하지 않고 신고를 이어간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분개하고 그를 조롱하기에 이른다. “에라이 이 썩을 놈의 새끼야, Goddamm! Son of a bitch!” 강조의 언어를 바로 사용함으로서 그를 철저히 비난하고 조롱한다. 특히, 이 뒤에 이어지는 “니기미 씹구멍이나 빨아라, 이 개새끼야!”라는 말과 이어지는 세 번 끊어지는 웃음은 개인을 잃은 채 권위에 기대고 사회의 목소리만을 되풀이하는 목소리를 향한 조롱이다.

그리고 그 사이 열차에 들어와 상황을 목격한 시민(‘시민 4’로 칭하겠다)은 말한다. “아저씨!” 그러자 ‘단소 살인마’는 외친다. “너 누구야?” ‘시민 4’에게도 ‘단소 살인마’는 ‘너는 누구인’지 묻는다.

원본 영상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상을 업로드한 ‘시민 4’는 해병대에서 전역했다. 국가의 정예 무력, 가혹한 환경으로 대변되는 해병대는 남자다움, 즉 ‘힘’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시민 4’는 “너 누구야?”라는 물음에 “이 씹…!”이라고 욕을 한 뒤 “왜 이렇게 시끄럽게 지랄이야?”라고 폭력의 언어를 난사한다.

그러자 ‘단소 살인마’는 당혹감을 느끼며 ‘어, 씹? 이런 씹새끼야!”하고 다시 위협하지만, ‘시민 4’는 그저 “앉아.”라는 말을 반복하며 ‘단소 살인마’를 노약자석으로 밀친다.

그러자 ‘단소 살인마’는 “밀었어? 확! 비켜 이 새끼야.”라고 위협한다. ‘시민 4’는 사회의 무력이자 힘인 만큼 굴하지 않고, “때려라, 이 새끼야. 때려라.”로 응수한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자신의 무력이 통하지 않고, 또한 그 무력은 자신을 파멸시킬 것을 알기에 “안 때려.”라고 말한다.

이에 모든 승객이 폭소한다. 저항이 허망하게 꺾이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단소 살인마’는 “미친 개 때려잡고 깽값 물 이유는 없어…”라며 변명을 시도해보지만, ‘시민 4’는 그저 “병신 같은 게…”라는 말로 조롱한다. ‘단소 살인마’는 그저 ‘시민 4’ 주위로 단소를 휘두를 뿐이다. 승객은 웃고, ‘시민 4’는 무시한다. ‘시민 2’는 차분히 경찰에 신고했음을 알린다.

그러던 중, ‘단소’가 지하철 봉에 부딪힌다. 그러자 ‘시민 4’는 “어? 때렸냐?”라고 말한다. ‘시민 4’는 본인이 맞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약자의 폭력은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명분이기에, 그저 명분을 확보할 뿐이다.

그러자 ‘단소 살인마’는 “안 때렸어. 야가 가다가 마주쳐서 소리가…” 하며 변명한다. 동작도 작아진다. 구차하고 초라한 인간이 된다. 이에 ‘시민 4’는 그저 비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이에 ‘단소 살인마’는 마지막으로 “Get out!”이라 외친다. 그러나 이미 초라한 외침이다. ‘시민 4’는 비웃으며 자리에 앉고, ‘시민 2’는 신고를 완료했음을 알린다. 권위의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3분 14초 짜리 엽편영화 「단소 살인마」는 끝이 난다. 단순한 취객의 난동 코미디로 보이는 이 영화는 그 해학과 웃음 속에 ‘나’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과 그 인간이 사회의 권위에 저항하지만 굴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에, 우리는 우리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 자주적으로 존재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가? ‘단소 살인마’가 내게 “너 누구야?”라고 물으면 우리는 무엇을 답할 것인가.


답문(答文). 사건, 증상, 주체로서의 〈단소 살인마〉

〈단소 살인마〉라는 사건, ‘단소 살인마’라는 증상

‘개’, ‘축산물’, ‘병신’, ‘전과 22범 쓰레기’, ‘극우성조기부대 틀딱’ 그리고는 마침내 ‘정신이상자’. 소위 〈단소 살인마〉의 서사를 담은 한 편의 동영상 하단에 기록된 멸칭들의 목록이다. 3분 14초짜리 영상에는 ‘민폐 덩어리를 제압하는 통쾌한 사이다’와 같은 세평이 붙고, 저런 ‘몰상식’한 사람들을 누구나 빠르게 제재할 수 있게끔 법률을 바꿔야 한다는 외침들이 뒤따라다닌다.

〈단소 살인마〉는 하나의 사건(事件)이다. 위에서 본 반응들이 증명하듯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도 있다. 영상에서는 기존 사회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고, 그 일이 사회질서 · 체계에 구멍을 낸다. 구멍은 점점 커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한 끝에 마침내는 질서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된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러한 종류의 과정에 사건(évènemen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내방송, 절과 교회, 지하철 손잡이를 겸하는 쇠봉, 이름이나 정체조차 밝히지 않는 수많은 개인. ‘단소 살인마’가 단소를 휘두르며 응수한 대상들의 목록이다. 영상을 보며 사람들은 ‘단소 살인마’의 ‘행패’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선량한 시민들에게 공연한 위협감을 주었으므로 당연히 폭력으로라도 제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의 이름으로 공공질서는 물론이거니와 기본적인 사회적 예의조차 준수할 생각이 없는 그를 처벌하여 흐트러진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같은 공공적 힘의 작용을 긍정적이고 당연하게 보지만, 바디우를 위시한 현대 프랑스 철학은 이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색다른 그들의 세계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소 살인마’의 행위와 그 행위를 억압하는 사회 사이에 무엇이 더 근원이 되는 쪽에 있느냐는 물음이다.

〈단소 살인마〉는 하나의 증상(症狀)이다. 위에서 본 외침들이 증명하듯 비정상적인 자를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 처치 또는 제거해야 할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철학적 틀을 사용해 이 사건을 다시 바라볼 수도 있다. 영상 속에서 ‘단소 살인마’의 행동은 급작스럽고 또한 혼돈스러운 형태로 발현된다. 그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틈을 뚫고 올라와 자신의 욕망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그 어떠한 자기검열도 없는 신체적인 활동으로 발휘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이러한 종류의 과정에 증상(symptom, symptôm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건, 그리고 증상. 이 두 개념은 우리가 〈단소 살인마〉를 단순한 유희 또는 조롱으로 소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는 핵심이다. 사회적인 ‘사건(évènement)’과 개인적인 ‘증상(symptom)’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잘 맞지 않는 요(凹)와 철(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의 연결 관계는 프로이트-라캉-바디우로 이어지는 계보를 살펴보아야만 드러난다.

프로이트와 라캉: 증상(symptôme)

프로이트는 잘 알려져 있듯 유명한 ‘안나 O(Anna O.)’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환자가 보이는 히스테리 증상을 억압되었던 무의식적인 욕망 내지는 상태가 억압을 뚫고 올라온 결과물로 보는 관점을 제안했다. 그의 도식에서 우리가 상기하기 싫어하는 특정한 기억은 의식에서 밀려나더라도 기억과 결부된 감정적 고착, 즉 정동(情動, affekt)은 제대로 발산되지 못하고 쌓인다. 만약 이 정동이 표층으로 분출되어 해소되지 않는다면, 압력을 견디지 못한 암석이 파열되며 마그마가 맹렬하게 분출하는 것처럼 정동 역시 분출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낯선 모습으로 현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를 종종 놀라게 하는 사람들의 이상행동이라는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 관점을 언어를 통한 구조화에 주목하여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는 무의식과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인간의 욕망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 타자(L’Autre)의 담론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언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를 언어 외의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전개하지 못한다. 미술이나 음악이 반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여기서의 언어란 소쉬르가 설명한 것처럼 기호들이 다른 기호들과 어떻게 결합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형식체계다.1미술의 경우 조형, 부조, 형상 및 색채가, 음악의 경우 리듬, 높낮이, 음색이 함께 배치된 다른 것들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를 획득하는 체계이므로 하나의 언어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생각은 언어가 타자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거나 사고를 전개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언어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말을 가르쳐야 하며, 그림을 잘 그리거나 작곡을 잘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가정과 사회에서 자라는 인간은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무엇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고, 또 어떤 것이 체계에서 금지되어 있으며 허용되는지를 습득하고 끊임없이 조직한다.

언어가 외율적(外律的, Heteronomous)이라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과 욕망이 타자의 담론이라는 인식과 어떻게 연결될까? 라캉의 주체 구성은 외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지적이 바로 그 연결점이다. 우리는 다른 사물 또는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의 외형부터 호오(好惡), 성격 등의 내면까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양육되면서 자신의 욕망 중 어떤 것이 금지되어 있고 어떤 것이 허용되는지도 알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말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단어를 배우고, 그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말하는 ‘나’란 실재하는 ‘나’라기보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이미지로서 지각하는 ‘나’이며, 이 ‘나’는 언어의 기호적 질서에 종속된다. 즉 주체는 언어 · 사회적 습득을 통해 원초적인 나로부터 괴리된, 타자를 통해 비추어진 나가 자신과 동일시되고, 언어적 세계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고 억압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망들은 모두 상징화된 나가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것을 사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 누군가와 잘 지내고 싶다는 모든 것은 기호로서의 ‘나’가 ‘어떤 것’, ‘무엇’, ‘누군가’라는 타자를 향한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타자들에 의해 구성된 의식 구조에 구속되어 있다. 라캉은 우리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타자와 언어의 공간,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고 욕망하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이 공간을 대타자(Grand Autre, $\mathbf{A}$)라 부르고, 그 유명한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며,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는 말로 이 모든 것을 압축해 표현했다.

라캉은 괴리된 원초적인 나와 타자의 질서가 각각 속하는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실재계(Le Réel)와 상징계(Le Symbolique)의 도식을 도입한다.2물론 엄밀하게는 주체의 최초 구성 과정이라 할 거울 단계와 함께 도입된 상상계(L’Imaginaire)까지 포함한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의 삼계(三界)가 그의 온전한 도식이다. 상징계는 쉽게 말해 언어 세계 그 자체다. 언어 속에서 우리가 다양한 기호들을 배치하고 결합시키면서 구성한 질서의 세계가 상징계다. 주체는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형성된다고 라캉은 말한다. 그런데 이 편입 과정은 상술한 것처럼 언어 · 사회적 질서 이전에 있었던 원초의 나, 즉 무질서하고 리비도(Libido)가 넘치는 나의 세계와의 결별이기도 하다. 라캉은 주체 형성 이전에 있는 언어적 질서 바깥의 세계를 실재계라고 부른다. 실재계는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이자, 상징계의 질서 작용이 실패하는 지점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증상(symptom)을 실재계와 상징계의 도식을 사용해 더욱 세련되게 해석한다. 라캉에게 있어 증상(symptôme)은 억압된 실재계가 상징계를 뚫고 올라오는 과정이다. 실재계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질서 바깥의 세계다. 대타자의 담론과 욕망에 익숙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언어로 지시할 수 없는 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고, 낯선 것들을 어떻게든 기존의 익숙한 것들로 끌어내리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한다. 상징계의 주체는 실재계를 감당할 수 없기에 그것을 기호들의 관계망이라는 질서로 빈틈없이 덮어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3오스트리아 수학자 쿠르트 괴델이 1931년에 발표한 정리로, “모든 무모순인 형식 체계는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하나 이상 존재한다”로 요약될 수 있다.가 형식체계 일반에 예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미지로부터의 공포가 실증하는 것처럼 상징계가 덮지 못하는 실재계의 부분이 언제나 발생하고, 그 부분들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상징계에 더욱 천착하여 그것이 덮은 실재계의 부분들을 더욱 크게 억누른다. 이 압력이 고착화되면, 실재계는 이에 저항하여 상징계의 질서와 언어의 상태를 뚫고 올라온다. 마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암석이 파열되며 마그마가 맹렬하게 분출되는 것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증상(symptom)이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한다면, 라캉에게 있어 증상(symptôme)은 실재의 귀환이다.

라캉과 바디우: 사건(évènement)

바디우의 사건(évènement)은 라캉의 증상(symptôme) 개념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 마침내는 존재론적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그는 상징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실재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이 과정을 사회 질서에 도전하는 범인(凡人)이 등장한 역사와 연결짓는다. 라캉이 말하는 증상(symptôme)은 바디우에게 있어 새로운 질서의 조짐, 즉 사회가 만들어둔 상징계의 질서에 반하는 구멍이 등장하는 일로 다시금 해석된다. 이 구멍을 바디우는 공백(Le vide)이라 명명했다.4바디우의 철학에서 공백(Le vide)은 도식적으로 라캉이 말하는 증상(symptôme)과 대단히 유사하다. 둘 모두 상징계의 질서를 뚫고 실재계가 드러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디우의 공백 개념은 수학적 집합론에 기초를 둔다는 점에서 라캉의 증상과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용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는 기존의 지식 · 질서 체계를 뚫거나 부수면서 무언가가 발생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 때 바디우는 새로운 무언가가 가르고 나오는 기성의 지식 체계와 질서를 상황의 상태(État de la situation)라고 부른다. 국가나 사회가 지정해둔 법률과 도덕은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너무나도 다양한 세계의 모습(상황, La situation)을 하나의 셀 수 있는 대상(상태, L’État)으로 고정시킨다.5불어 État은 영어의 State에 대응하는 표현으로서, 현재 어떤 계의 구분할 수 있는 모습 내지는 순간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정 단위인 주(州)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가 썩은 사과, 녹색 사과, 작은 사과, 내가 직접 딴 사과 이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사과’라는 단어로 축약해버리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 과정은 언어 질서가 주체에게 외율적으로 강제된 결과로 발생한다. 라캉이 지적했듯 이 축약된 질서인 상징계를 찢고 나오는 공백을 인식하는 과정은 낯선 것의 귀환이며, 두려움과 배척의 대상이 된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그것을 억누르는데, 사회 또한 기성 구조의 유지를 위해 마찬가지의 행동을 한다.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바로 이것, 봉합하고 다시 질서의 영향 아래로 복귀시켜야 할 것만 같은 이 공백은 정말로 부정적인 것일까? 바디우는 공백이 사회의 압력에 의해 좌절되어 다시 상징계 밑으로 짓눌려져 봉합될 수도 있지만, 분출에 성공하여 기성 질서로 편입되는 경우 오늘날 우리가 없는 경우를 상상하기도 힘든 혁신들을 일으켜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바디우가 대표적으로 드는 예시는 프랑스 혁명(La Révolution)이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음악의 발전사를 생각해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클래식이 참된 음악으로 취급받았던 때 주로 노동 계급의 퇴폐적이고 시끄러운 음악으로 간주되었던 록 장르는 오늘날 대중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초가 되었으며, 이 록 장르의 발전사에서조차도 기성의 문법에 반한 아트 록(Art Rock)이나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과 같은 반동적 음악이 오늘날에는 록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위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바디우를 위시한 현대 프랑스 철학 전통은 ‘증상’ 또는 공백의 산출적인 측면에 주목할 필요를 강조한다. 새로운 기준, 또는 진리(La vérité)란 언제나 기성의 질서를 뒤집고 올라오며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결정 불가능하고, 구분 불가능하며, 명명 불가능한 균열로써 나타나기에 공백이 나타나는 과정은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상황의 상태를 뚫고 진리를 예시하는 공백이 출현하는 이 순간을 사건(évènement)이라 부른다. 기존 사회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고, 그 일들이 상징계의 질서라고 할 수 있을 기성의 질서에 구멍을 내며, 기존 상황의 상태가 작동을 중지해 혼란이 퍼져가는 가운데 명명할 수 없는 낯선 무언가가 새로운 진리로 산출되는 이 모든 과정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사건인 것이다. 바디우는 사건 동안 만들어지는 구멍, 실재계가 상징계를 뚫고 올라온 자리를 사건의 자리 또는 진리의 가능성이라고 부르며, 사건을 통해 예시되는 진리는 상황의 상태에 발생한 이 공백의 가장자리를 보며 공백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6라캉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 전통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언어적 질서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이며, 상징계에 구속된 주체는 상징계 바깥을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실재계에 속하는 구멍은 그 자체로는 인식 또는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상징계에 속하는 그 가장자리만이 분석과 사유의 대상이 된다.이 사건 주변을 돌면서 여러 일들이 사건에 충실한지 확인 · 탐색하며, 그에 합당한 명제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건 자체에 충실해지는 과정을 거칠 때에야 진리가 된다는 존재론적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évènement)이란 진리의 절차를 촉발하는 계기이며, 사람들이 기존 질서를 넘어선 무언가를 스스로 빚어내고 탐구할 수 있는 기회의 입구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는 사건을 목격한 개인이 그 사건 자체에 충실해지는 과정을 견뎌낼 때에야, 비로소 주체(Sujet)가 된다고 말하기에 이른다.7바디우의 ‘주체’는 라캉의 ‘주체’와는 다르다. 라캉에게 있어 ‘주체’는 언어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진입하며 실재계라는 결여를 떠안고 분열된 존재인 반면, 바디우의 경우 ‘주체’란 사건이 만들어낸 공백을 감지하고 그것에 충실하게 헌신하는 창조적이고 주도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단소 살인마〉라는 사건, ‘단소 살인마’라는 증상, 그리고 주체

안내방송, 절과 교회, 지하철 손잡이를 겸하는 쇠봉, 이름이나 정체조차 밝히지 않는 수많은 개인. ‘단소 살인마’가 단소를 휘두르며 응수한 대상들의 목록이다. 영상을 보며 사람들은 ‘단소 살인마’의 ‘행패’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선량한 시민들에게 공연한 위협감을 주었으므로 당연히 폭력으로라도 제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의 이름으로 공공질서는 물론이거니와 기본적인 사회적 예의조차 준수할 생각이 없는 그를 처벌하여 흐트러진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같은 공공적 힘의 작용을 긍정적이고 당연하게 보지만, 바디우를 위시한 현대 프랑스 철학을 살펴본 우리는 이제 그들의 물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단소 살인마’의 행위와 그 행위를 억압하는 사회 사이에 무엇이 더 근원이 되는 쪽에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단소 살인마〉는 하나의 증상(症狀)이다. 위에서 본 외침들이 증명하듯 비정상적인 자를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 처치 또는 제거해야 할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철학적 틀을 사용해 이 사건을 다시 바라볼 수도 있다. 그의 행동은 분명 사람들에게 공연한 위협감을 주었고, 기성 질서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자 사회적 약속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단소 살인마’는 아무도 때리지 않았으며, 먼저 특정한 개인을 모욕하지도 않았고, 단지 통상의 질서에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개’, ‘축산물’, ‘병신’, ‘전과 22범 쓰레기’, ‘극우성조기부대 틀딱’ 그리고는 마침내 ‘정신이상자’. 소위〈단소 살인마〉의 서사를 담은 한 편의 동영상 하단에 기록된 멸칭들의 목록이다. 3분 14초짜리 영상에는 ‘민폐 덩어리를 제압하는 통쾌한 사이다’와 같은 세평이 붙고, 저런 ‘몰상식’한 사람들을 누구나 빠르게 제재할 수 있게끔 법률을 바꿔야 한다는 외침들이 뒤따라다닌다.

〈단소 살인마〉는 하나의 사건(事件)이다. 위에서 본 반응들이 증명하듯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도 있다. 열차 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떠어떠한 행동을 금지하는 안내방송, 자신이 열고 닫을 수 없는 열차의 문, 철도안전법과 운영 스케줄에 의해 규율되는 공간인 지하철은 철저하게 상징계의 영역이다. ‘단소 살인마’는 안내방송에, 문에, 지하철의 규칙에 반발한다. 그는 사회와 문명이라는 상징계에서 우리가 철저하게 감추어왔던 실재계를 향해 말한다. 그가 휘두르는 단소는 그것이 사람을 물리적으로 상처 입혔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단소는 사회와 타자의 언어적 질서에 익숙해질 정도로 시달린 우리 자신 앞에 낯선 실재의 귀환이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과정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반항은 지하철의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것이었고, 너무나도 용감하고 무모한 것이었기 때문에 명명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 “자리에 앉아!”라는 기존의 언어적 질서로 그를 억압하려고 했고, ‘단소 살인마’, ‘정신이상자’, ‘극우성조기부대 틀딱’, ‘전과 22범 쓰레기’, ‘병신’, ‘축산물’, 그리고 ‘개’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다시 봉합하려고 했다.

〈단소 살인마〉는 몰상식한 인간 이하의 존재의 난동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단소 살인마’는 몰상식한 인간이었기에, 상징계의 질서 속에 갇혀 결여에 시달리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잔인할 정도로 투명하게 드러낼 정도로 몰상식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단소 살인마〉는 가장 인간적인 작품(L’Œuvre)일 수도 있다. 바디우는 무한이 유한한 세계에 나타나는 것을 작품이라고 불렀다. 라캉이라면 바디우가 말하는 작품은 상징계의 가장 내밀한(intime) 위치에 있으면서도 가장 외부적으로 밀접한, 즉 외밀한(extime) 자리에 있다고 썼을 것이다. 사건, 그리고 증상. 이 두 개념은 우리가 〈단소 살인마〉를 단순한 유희 또는 조롱으로 소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는 핵심이다. 우리는 라캉의 주체와 바디우의 주체 사이에 서 있는 자신 앞에 펼쳐진 증상 또는 공백의 가장자리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 김석,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 김영사, 2010.
  • 장용순,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이학사, 2023.

주석 및 참고문헌

  • 1
    미술의 경우 조형, 부조, 형상 및 색채가, 음악의 경우 리듬, 높낮이, 음색이 함께 배치된 다른 것들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를 획득하는 체계이므로 하나의 언어 체계라고 할 수 있다.
  • 2
    물론 엄밀하게는 주체의 최초 구성 과정이라 할 거울 단계와 함께 도입된 상상계(L’Imaginaire)까지 포함한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의 삼계(三界)가 그의 온전한 도식이다.
  • 3
    오스트리아 수학자 쿠르트 괴델이 1931년에 발표한 정리로, “모든 무모순인 형식 체계는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하나 이상 존재한다”로 요약될 수 있다.
  • 4
    바디우의 철학에서 공백(Le vide)은 도식적으로 라캉이 말하는 증상(symptôme)과 대단히 유사하다. 둘 모두 상징계의 질서를 뚫고 실재계가 드러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디우의 공백 개념은 수학적 집합론에 기초를 둔다는 점에서 라캉의 증상과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 5
    불어 État은 영어의 State에 대응하는 표현으로서, 현재 어떤 계의 구분할 수 있는 모습 내지는 순간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정 단위인 주(州)를 가리키기도 한다.
  • 6
    라캉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 전통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언어적 질서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이며, 상징계에 구속된 주체는 상징계 바깥을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실재계에 속하는 구멍은 그 자체로는 인식 또는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상징계에 속하는 그 가장자리만이 분석과 사유의 대상이 된다.
  • 7
    바디우의 ‘주체’는 라캉의 ‘주체’와는 다르다. 라캉에게 있어 ‘주체’는 언어라는 상징계의 질서에 진입하며 실재계라는 결여를 떠안고 분열된 존재인 반면, 바디우의 경우 ‘주체’란 사건이 만들어낸 공백을 감지하고 그것에 충실하게 헌신하는 창조적이고 주도적인 존재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