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
[…] 처음으로 ‘비참’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오랜 시간 절박한 이들과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연대하는 사람이었을 뿐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걸, 둘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
[…]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난 우물 밖 사람 역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힌 듯 보였고,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 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더 거대하고 더 유구한 우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우물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날 나는 나의 우물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계관이란 나의 우물이 어디쯤에 있고 다른 이들의 우물과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
홍은전, 《그냥, 사람》 中. 임의로 세 부분을 순서 상관없이 발췌함. 달걀Fry – 〈그냥, 사람〉 아카이빙에서 재인용
다시 한 번. 인간은 이방인이다. (L’homme est l’Étranger.) 인간은 인식론적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없다. 그가 경험하는 세계 안에서 그의 세계와 가치관들이 형성될 뿐이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의 모든 사물로부터 유리된 인간은 한편으로 인식론적 불능에 대한 절망감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기를 의욕하는 것이다.
〈우물〉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위의 인용에서 언급한 〈우물〉은 말하자면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가 말한 알에 가까운 것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Das Ei ist die Wei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en.)” 하지만 새가 알에서 깨어나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종류의 〈우물〉을 지각하기 위해서 인간은 또 다른 한 종류의 〈우물〉에 빠질 필요가 있다. 그 우물은 말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말한 우물에 가깝다.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 반드시 빠져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우물. 내가 쓴 바 있듯 “깊고, 어둡고,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저 〈우물〉.”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인식 내지는 진리에 대한 해체란 유아론이나 니힐리즘으로 빠지곤 한다. 이 둘은 적어도 그러한 배경 인식이 결여된 경우보다 덜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도 않는 에포케(epoche)의 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인식에서 오류를 저지르더라도, 나중에 후회하고 다시 수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와 마주하는 인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을 썼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의 인간이 지적한 바 있듯 세계와 인간이라는 양항 중 인간을 잘못 이해한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만큼은 언제나 되새길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