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가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후기
“어떤 때는 그냥 그 의자에 의지한 채 창에 기대어 예전에 창 밖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일종의 해방감을 막연하게 회상하기도 했다.”
국어 〈문학〉 시간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괴상한 시간이었다. 항상 예문으로 제시되곤 하던, 혹은 수업 자료로 제시되던 소설 한 편을 읽고 나면 우울한 감정이 점차 스스로의 안에서 증폭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있을 법한 단 한 번의 예외조차 없었다. 하지만 유난히도 그런 감정이 심하게 닥쳐온 때만큼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은 직후였다.
카프카의 《변신》은 정말 아주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어느 날 ‘벌레’로 전락한 한 아들이 있는 가족 공동체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린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 ‘그레고르’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한 것을 발견한 가족들은 당연히 경악했고, 그를 방으로 몰아넣고서는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외면했다. 처음에는 그가 ‘아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며 가족 공동체로서의 신의를 다하지만, 점차 그가 벌어오던 수입이 끊긴 이래 목을 조여오던 생계 문제가 더욱이 심각해지면서 그는 가족들에게마저도 ‘아들’에서 ‘벌레’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그레고르’는 어느 날에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일반적인 이 소설에 대한 평론은 ‘가족에 대한 환상’을 카프카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혈연’을 강조하면서까지 끈끈함을 과시하는 가족애라고 하는 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성립하는지를 카프카는 독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 또한 작품을 읽으면서 이러한 평론들이 논하거나 인용하는 부분들을 눈여겨 본 독자이므로, 나는 이와 같은 평론들에 대하여 반기를 들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러나 나는 조금 색다른 시각, 즉 ‘가족’이라는 틀 바깥에서 이 작품을 다시 조명해보고 싶은 생각까지 지울 수는 없다.
이 소설이 지적하는 바를 ‘가족’에 대한 것에서 한 단계 더 추상화한다면, 아마도 나는 다음의 명제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즉, “거짓된 것을 우리는 가치로 숭배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사이에서 그 구성원들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서 함께 살아간다는 일반적인 사회의 통념을 카프카가 극한의 영역까지 상황을 몰고 가서 깨뜨리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무언가 다른 것들도 극한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보면 어떨까하는 호기심이 일어나는 법이다. 따라서 나는 ‘변신’을 읽은 후 ‘가족’과 비슷한 위상에 있는 사회 통념 또는 가치인 ‘우정’이나 ‘사제간의 사랑’, 또는 ‘꿈’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모두 극한의 영역까지 한 번 애써 이끌고 가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했다.
결과는 카프카가 가져다 준 것과 동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논리에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생각한 바를 압축하여 이야기하면 나는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 있는 두 절친, 교육청에 선생을 신고한 학생,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냉혹한 현실을 생각해보고 ‘우정’이나 ‘사제간의 사랑’이나 ‘꿈’이라고 부르는, 그나마 견고하다고 생각되는 사회 통념도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 탄 두 절친 앞에 낙하산이 딱 하나 있다면, 양보와 같은 미덕은 아마도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으며 우정은 생존 앞에서 무용해질 것으로 생각되었고, 선생을 교육청에 신고해서 재기 불능의 커리어적 치명타를 가한다면, 그 선생은 학생을 흔히 말하는 ‘사제간의 사랑’으로 대할 수 없을 것이 아주 분명해보인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당장에 먹고 살기 바빠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는 나의 사촌을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질서’라고 하는 시스템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꿈’이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틀을 이 생각 때문에 내리 앓은 후 나는 문득 예전에 어떤 한 미술 교수가 강연을 왔을 때 ‘거짓된 세계에서 거짓을 추구하는’ 것을 현대 예술이 지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말을 들을 적에 나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제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현실, 즉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기술의 덕택으로 구성되고 있는 가상의 세계로 점차 넘어가는 듯 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실제로 살기 힘든 세상을 등지고, 자신이 비교적 자유롭게 상상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세계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이나 위치를 마련하려는 필사적인 사투가 진행되고 있는 증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실재’, 거짓된 가치를 우리는 계속 숭배할 수 있는가. 그러나 현실도 다를 바는 없다. 이것이 여전히 나를 암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