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絞首) 앞에서의 변론(辯論)
… 나는 솔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죄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이다.
조금 전에 나는 경거망동한 흥분 속에서 부적절한 판단을 내렸던 나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자 중학교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입장을 번복했다. 어떤 계약에서의 입장의 번복이란 참으로 무거운 속성을 지녔으며, 그것은 전화기 너머의 선생님께 굉장한 실례가 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다.
선생님께 번복의 이유를 변명할 때에 나는 서순을 잘못 제시하는 실수를 또 범하고 말았다. 그 실수란 첫 번째 사유로 내가 긴장되고 주변으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이 걱정된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것이 주된 이유로 보이게 한 것이었다. 사실은 둘째 사유인 아이들(후배들)에게 보다 솔직해지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번복의 전달을 마친 뒤 어머니께 이 사실을 고하자 첫번째로 돌아온 것이란 비난이었다. 대략 700명의 학생 앞은 별거 아니지 않으냐, 거기에 선생님도 있어도 별 상관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모 학생은 했다는데 너는 왜 못하겠다고 하느냐 – 라는 복합적인 뜻이 담긴 비난이었지만, 내가 뒤늦게 내가 입장을 번복한 주된 이유는 사실 위의 둘째 사유였습니다 – 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결국 차갑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지 말라고. 네 그 생각에는 대학의 이름이라는 자만이 사실 숨어 있는 것이라고 쏘아붙이셨다.
… 어쩌면 나의 이러한 번복의 어느 편에는 대학의 이름이라는 자만이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째로 잘못 제시했던 이유 중에서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 어머니의 작은 기우에서 기원하였지만 사실은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 비교적 내가 파급력이 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상당히 비논리적이고 속단적인 추정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어서, 나는 이것을 부정하면서 진실로부터 애써 도망치려는 비겁자의 행위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분명히 명백한 사실이어서, 나는 이것으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난 속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라도 다음의 문장을 중얼거리듯 소리치고 싶다. 내가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 그것보다는 잠깐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봉사의 목적은 그 봉사의 대상에 있음에도, 나는 나의 봉사 시간이나 이 일의 확장성을 상정했던 것이었고, 이것이 내가 가장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었다고.
진정으로 내가 후배들에게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700명이나 되는 대중과 수많은 선생님들이 교장 선생님의 제의대로 너무 큰 규모의 행사 속에서 나를 보게 된다면, 나는 아주 전형적인 말 밖에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 앞에 있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간접적으로라도 할 수 없게 된다. 고전적인 교수 방법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 자신은 그 경우 고전적인 교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된다.
몇 시간 지속되는 일방적인 강의, 그냥 앉아서 앞의 사람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것은 올바른 교수 방법이 아니다. 오래 전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적했듯, 지식과 이야기는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교수해야 하는 것이지 나열하는 방법으로 교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열하는 방법으로 교수하는 것은 교수(絞首)이지 교수(敎授)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믿는 교수법인 이끌어내는 방식을 실험하려고 그렇게 기획서를 썼는데…….
전형적이고 싶지 않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인물로 남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시도라도 해 보고 싶다.
그러니까 더더욱… 나는 솔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죄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