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
질문 하나. “극단주의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 12 · 3 비상계엄 사태1개인적으로는 이를 내란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반대 주장을 나름대로 ‘존중하여’ 비교적 중립적 표현을 쓰기로 한다. 이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 질문. 중 · 고등학교 때 헌법을 취미로2농담이 아니고, 진짜 재미삼아서 공부했다. ‘법’을 재미삼아 공부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헌법은 누구나 읽기 좋고 어려운 법률 용어가 전무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공부하며 그 안에 새겨진 가치들, 건국 과정에서부터 4 · 19 혁명, 부마 민주 항쟁, 5 · 18 민주 항쟁 등을 거쳐오며 흘린 피웅덩이 위에 새겨진 교훈들과 가치들을 살펴본 나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지금까지 합의해오고 지켜온 체제를 정면 공격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질문이 던져지는 배경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내 말이 잘못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언한다면 나는 양당 지지층이 모두 극단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극단주의’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합의를 부정하고 법치주의의 기둥,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공격하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래 전부터 강조해왔던 것처럼 그것은 키치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자신만의 믿음에 갇혀서 다른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다른 주장을 보면 척결 대상 즉 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보는 것, 마침내는 판단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닌 키치로 옮겨가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극단주의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정치 상황을 둘러싸고, 나는 무엇보다도 시민 사회에 팽배한 단순 이원론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우리 편이면 모두 맞고 다른 편이면 모두 틀렸다”는 주장이 넘실대는 것을 경계한다.
누군가는 중립을 유지하라고 외치지만 세상에 완전한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그어대는 선들이 모조리 모호한데, 그 선을 기준으로 나눈들 가운데가 진짜 가운데라는 보장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자신이 믿고 싶은 믿음 위에서 살아가는 운명 속,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반대 의견을 끝까지 들어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요즘에는 이러한 철학적 소결이 실존적 위협을 맞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들이 설파하는, 거짓 주장들을 우리가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이 득세하도록 돕는 것은 아닐까?”하는 바로 이 물음으로.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오늘날 선거가 조작되었다는 잘못된 믿음이 널리 퍼져나가며 치명적인 독기를 뿜는 것을 본다. 물론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의견에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그들이 부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의 함정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세력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는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세력을 불린다. 세력에서 이탈하는 자들에게 ‘빨갱이’, ‘종북’ 등의 혐오적 저주를 붙여서 사회적인 불이익을 유도하고, 세력에 합류하는 자들에게는 정보에 대한 해석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거짓 정보를 적절히 타서 자신의 설파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한다. 그렇다면 극단주의에는 극단주의로 대항할 수밖에 없는가? 침몰해가는 듯한 배 위에서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 위에서 인간은 모든 방법을 갈구해 살 길을 찾는다. 그래서 극단주의는 더욱 위험하다. 이 반발적인 물음 때문에 극단주의는 새로운 극단주의를 낳게 되니까.
그러나 열린 사회의 적들에게는 열린 방법으로 대항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고 시간에 쫓길 것이 다분하다. 하지만 너무 늦기 전에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극단주의를 지탱하고 있으며, 반대되는 의견을 어떻게 봉쇄하고 있는지 그 구조를 확인해 뿌리채 들어내야 한다.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괴물이 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폭주 기관차를 막기 위해 폭주 기관차를 충돌시키면 그것은 참사가 되고, 아울러 그 기관차들이 올라선 선로조차 붕괴시키는 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의 믿음을, 희미한 저 가능성을 붙잡고서 살아간다. ‘문’ 바깥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려주고 끝없이 설파한다면, 누군가는 나올 수 있으리라고.
다시, “극단주의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 침몰하는 민주주의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다양성을 외치고, 니체를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개인적으로는 이를 내란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반대 주장을 나름대로 ‘존중하여’ 비교적 중립적 표현을 쓰기로 한다.
- 2농담이 아니고, 진짜 재미삼아서 공부했다. ‘법’을 재미삼아 공부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헌법은 누구나 읽기 좋고 어려운 법률 용어가 전무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