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육에서 빠진 것에 관한 메모
좀 전에 한병철 씨의 ‘피로사회’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슬픔과 우울’, 그리고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와 3자 연계하여 읽다가 폭발하듯 터져나온 생각이 하나 있어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하려고 한다.
나는 일전에 나 자신의 학문적 혹은 영혼적 성격에 대하여 무언가가 부서지고 그 틈으로 새로운 것이 쏟아져들어올 때 일련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했다. (경계가 무너지고 타자가 나를 침범할 때에, 어떤 맥락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다소 변태같은 것일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보통 사실의 나열이나 과거의 경험을 학습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희열 이상의 감각, 혹은 광적인 흥분이 오지 않는데, 희한하게도 특정 어떤 경험이나 글, 논증을 계기로 하여 나의 특정 공고하다고 믿었던 세계의 기반이 무너지고, 그 뚫린 보로 인하여 홍수가 나서 쓸려내려가면, 나는 그것을 보고 좋아라고 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해서, 적어도 삼일 안에는 사라진다. 그러한 광적인 흥분이 사라지는 경우 나는 다시 무료한 일상으로 복귀하여, 학문 – 즉, 과거의 경험의 축적의 나열 – 을 익힌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광적 희열의 순간이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에, 나는 그래도 그 경험의 축적이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경험의 축적의 무료함을 충분히 보상할 수 있을 만큼, 축적이 일련의 영감의 격발쇠와 함께 혼합되어 어마무시한 파괴력으로 내 영혼의 어떤 부분을 송두리째 날려먹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격발과 파괴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에, 그리고 그렇게 파인 상처를 다시금 회복함으로서 오늘의 자신이 그와는 다른 어제의 자신을 스스로 죽여버릴 때에, 나의 학문적 의미가 발견된다. 즉, 학문을 계속할 의지가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비판적인 근대 교육을 잠깐 이 생각으로 끌고 들어와보니, 근대 교육에서는 바로 이 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아마 모든 개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어떤 세계가 깨져 나가는 것에서 내가 느끼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는 광적 희열 또는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반복적으로 체득되어 마침내 개인이 이 학문이 선사하는 광적 희열의 순간에 조련되면(혹은 길들여지면) 개인은 다시 이러한 순간이 필연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 하에 학문을 지속할 의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 교육은 이것이 결여되어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학문을 지속할 의지를 중도에 스스로에게서 제거하거나 혹은 아예 가지지도 못하고 학창 시절을 종료하고, 오직 자본주의라는 근대 질서 下에서 (경제활동이라는 아름다운 수식언으로 포장되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무의미한 세계와 기술과 교육이 아닌 주입과 되풀이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되고,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환각과 혼합되어 모든 의미를 상실하는 결과로 그들의 삶을 종결시키게 된다.
만약 근대 교육에서 이러한 자기 초극에 길들여짐을 교육과정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편제한다면 어떨까? 많은 학생들은 처음에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극도로 자신에게 몰려들어오는 ‘자신이 아닌 것’ – 즉 타(他) – 에 극도로 반발할 것이다. 이는 극도로 괴로운 과정이고, 그들은 스스로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주 짜릿한 전율(혹은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그 뒤 자신의 어떤 금지가, 어떤 관념이, 어떤 부분이 해제되어 그러한 고통스러운 기폭제를 받아들이면, 그 기폭제는 이윽고 그들 개인이 암묵적으로 축적해두었던 폭약들에 불씨를 당기고, 그 결과 학생의 아(我)의 어떤 부분은 송두리째 파괴된다. 그리고 그 폭발에 학생의 자아는 말려들어 사망하고, 그 폭발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학생의 아(我)가 탄생하고는 죽어버린 그의 과거의 아(我)를 걷어차버리고 다시 걸어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자기 초극의 반복적인 확인이 더 이상 학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기술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의미 잃은 삶의 반복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교육의 변혁법 중의 하나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는 한병철의 ‘우울한 근대성과주의적 개인’을 이 과정을 통하여 관점을 비틀어 니체의 ‘자기초극의 개인’으로 회귀시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교육에서 주로 검토되어야 할 사항 중에 하나인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