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코와 나, Bill Evans와 Chet Baker

2025-03-26 0 By 커피사유

조금 전 《노르웨이의 숲》의 10장을 모두 읽은 뒤, 제11장으로 넘어가면서 첫 장을 읽은 직후에 내가 직감했던 바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제11장의 첫 마디가 나오코의 〈죽음〉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10장까지만 하더라도 레이코 씨의 편지에서 ‘나오코는 빨리 회복되고 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급격한 반전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이상할 정도로, 평생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증상에 시달려온 나오코가 병원을 옮긴 뒤로 ‘너무나도 빨리 회복되고 있다는 것’은 행간을 읽는 사려깊은 독자에게는 하나의 복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나는 제10장을 닫으면서 나오코가 곧 죽겠다는 직감을 확신으로 바꾸었으며, 11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적어도 표면 상에서는) 급작스러운 나오코의 〈죽음〉, 첫 문장부터 훅 치고 들어오는 부고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삶의 순간들을 되돌아볼 때 나는 〈죽음〉들, 〈상실〉들이 예고를 통해 찾아왔다기 보다는 준비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하나도 주지 않고 쳐들어왔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아니면 충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대비 효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나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정문을 부수고 〈죽음〉이 들이닥치는 순간이란 정말 고요한 아침과 같은 일상적 순간의 한가운데였다. 청천벽력과 같이 갑자기 찾아와 순식간에 앗아가버리는 이 허망한 〈죽음〉들, 그 순간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너무나도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기에 나는 오랫동안 멍하니 제11장의 첫 문장의 앞 부분: “나오코가 죽은 다음에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내가 이 기가 막힌 문장을 맞닥뜨린 오늘의 독서에서 듣고 있던 음악은 Chet Baker와 Bill Evans가 연주한 재즈곡들이었다는 것이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두 사람의 음악이 〈죽음〉과 가지는 관계가 꽤 의미심장하다는 쪽을 지적해야 한다.

우선 Bill Evans의 경우는 그 사람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 앨범 『Waltz for Debby』가 소설 속, 나오코가 듣는 몇 안되는 LP 중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대략 2주 정도 전에 나는 이 음반이 “나와 나오코를 이어주는 하나의 가느다란 실”이라고 썼는데, 나오코의 이 음반이 나 자신의 대학 생활, 철저한 고립 가운데에서 허우적대던 그 당시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소설 속에서 Bill Evans의 음악이 재생되는 장면마다 나는 대학에서의 시간 동안 내가 다녀온 정신의 저 깊은 심연을 생각했고, 비슷한 〈우물〉 속에서 과거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시간들에 시달리고 있는 나오코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리하여 Bill Evans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일찍이 죽음의 숲삶의 초원죽음의 숲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한 나오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Chet Baker의 경우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적어도 《노르웨이의 숲》에는 그의 음악이 언급되는 대목이 없다. 하지만 구태여 내가 그를 Bill Evans 그리고 이 소설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일생에 대해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우울한 사운드로 트럼펫을 불었던 그는 Cool Jazz의 흥망성쇠와 함께 살아간 인물로, 외로움과 약물에 시달리다가 결국 과도한 마약 사용으로 자살인지 실족사인지 모를 죽음을 맞이했다. (말년 공연을 도는 와중 며칠 동안 싸구려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어느 날 아침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바닥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타살의 흔적은 없었고 마약을 한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처음 재즈를 들었던 대학 새내기 당시, 내가 시달리고 있었던 문제들을 그의 사운드가 휘감아 공명시킨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고, 그 이후로 한동안 그의 연주를 들었었다. 그의 음악은 그러니까 나, 일찍이 죽음의 숲삶의 초원 사이의 우물에서 정처없이 떠돌던 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함께 합주한 이 음악들을 들으면서 나오코의 죽음을 확인한 것으로부터 씁쓸한 뒷맛을 느낀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온 저 문제,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저 물음을 던지던 초창기,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의 ‘어쩌면 자살은 적극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 격렬하게 알러지성 반응으로 일관한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나’는 나오코와 미도리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속에서도 ‘나오코’를 위한 마음 속 저 넓은 자리는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었다고 제10장에서 고백하고 있는데, 이 진술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나오코의 죽음으로 그 자리는 영영 채워질 수 없게 되었다고, 따라서 그 비어버린 곳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시린 바람이 영원히 그를 회상에 잠기게 할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대학 초창기의 나 자신을, 수많은 〈죽음〉과 〈상실〉에 시달려온 나 자신에 대한 회상에 잠겨본다. 이 마지막 두 문장의 유사성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Chet Baker & Bill Evans – Alone Together (1958) ―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 내내 내가 해 왔던 짐작을 확인한 오늘, 나는 내가 들었던 Chet Baker와 Bill Evans의 플레이리스트 중 가장 지금에 어울릴 만한 곡을 하나 기록해두지 않을 수 없다. 곡의 제목은 이율배반적인데, 혼자 있음과 같이 있음이 병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같이 있으면서도 혼자 있는 존재이며, 혼자 있으면서도 같이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어느 순간이든 〈죽음〉은 《노르웨이 숲》의 제2장이 고백하듯 삶 속에 자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고독할 것이다. Cool Jazz가 침묵과 절제된 사운드로 잡아내는 테마란 아마도 바로 이러한 《상실의 시대》에 근간을 둔 테마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