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창시절의 삭제에 대하여
조금 전에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의 기말고사를 준비하려는 목적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슬픔과 우울”을 읽었다가,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나 스스로에 관한 직관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성격의 것이라 빠르게 여기 적어둔다.
최근 들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우울(로 추정되는 것)에 대하여 몇 가지 추적을 행하고는 있는데, 내가 오늘 읽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우울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상실이 있을 때, 대상에 부여하고 있는 리비도가 자아로 철회되면서(혹은 회수되면서) 이 때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애증의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자아로 되돌아오면서, 자아의 일부를 비판 기관이 인지할 수 있는 독립 대상화시켜 자기 비하 등을 초래한다고 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나는 최근 들어 나 자신의 <비판 기관>이 나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계속 경종을 울려대고 있어 그 경종 소리에 시끄러워 지쳐버리게 되었는데, 나는 혹시 그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나 자신이 사랑과 애증의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사랑과 애증의 두 가지 입장을 아주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가장 가까운 요소라고 하는 것은 내게 이중적인 존재인 고등학교 뿐이였는데, 대학 입시의 입장에서는 사랑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며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내게 선사된 수많은 불합리로 강력한 애증을 가지게 된 이 고등학교와 관련된 생각으로 넘어가니, 문득 그 생각이 중학교와 초등학교 때까지 미쳐 버렸는데, 여기서 나는 중대한 한 가지 발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어떤 특정 긍정적인 기억을 제외하고는 모든 기억이 전무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봉인 된 듯이 생각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를 당장 회상해보면 천문동아리와 과학동아리 활동, 그리고 학생회장으로서의 활동은 기억이 어느 정도 살아 있지만, 그리고 몇몇 선생님과의 관계에 대한 측면은 교우 관계와 관련된 측면, 그 이외의 학교 생활에 관한 측면은 중학교 1학년 때의 감정이 좀 많이 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연관되었던 애증의 대상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전무하다. 초등학교 때에는 실험 활동, 그리고 환경동아리 활동은 기억이 나고, 또한 6학년 반에서 1년 정도 의도치 않은 월반(?: 혹은 유사 월반 행위)을 했었다는 것, 컴퓨터 방과후와 도서관에서의 아득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전무하다. 교우 관계에 대한 것은 특히 기억이 아예 없다. 깔끔하게 날아간 모양인지 아니면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즈음 한 가지 연상되는 것이라면 한 장의 이미지는 있는데, 문득 해가 거의 떨어지고 있어 하늘이 황혼으로 빛나고 있을 때에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내가 그저 책을 한 권 들고(혹은 들지 않아도 좋으니) 텅 빈 운동장과 그 붉게 물든 나의 교정과 그 주변의 동네 일대를 2층인가 3층 교실의 어느 교탁 옆의 창틀로 바라보는 어떤 그림 구도가 바로 그것이다.
추정하건대 나는 그 모든 학교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교우 관계에 대한 문제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그 학교에 대한 애증을 만들었고, 그 애증에 시달린 나는 견디다 못해 무의식적인 측면에서 교우 관계에 대한 기억을 소각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르는 일인 것 같다. 무언가가 가로막힌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강력한 어떤 것이 – 마치 PTSD와 같은 느낌처럼 – 기억의 그 영역에 접근하는 것을 강제로 중지시키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