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3

2025-03-04 0 By 커피사유

낙서 시리즈는 커피사유가 쓰고 있는 글의 일부를 살짝 들추어보는 공간입니다.


쓰고 있는 글의 일부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5.

인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생물학적 죽음 뿐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가능한 모든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가 없기에 인간은 그저 죽음이 어떤지 그의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1그래서 《미키 17》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활할 수 있는 ‘미키 반스’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 (What it feels like to die?)” 라 묻는 것이다.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경험. 대상의 죽음에 반드시 수반되는 바로 이것, 대상과 관계되는 자극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환되는 바로 이 순간을 우리는 〈상실〉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물질들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이기에 인간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어렴풋이 인식한다. 하지만 그 인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끝이라는 무서운 직감으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영속을 꿈꾼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상실된 것에 집착하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는 것, 잃어버린 바로 그 대상을 불완전한 형태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재현하려 시도하는 것 모두는 인간이 자신의 근본적인 불완전성, 언젠가는 자신이 끝나버릴 것이라는 희미한 직감 위에서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그가 덥석 믿어버리는 과정이다.

라캉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대상과 주체의 영원한 단절에 일찍이 집중하여, “인간의 욕망은 〈대상의 결여〉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우리는 그의 이론이 소설의 등장인물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기즈키의 상실과 함께 뒤틀려버린 주인공과 나오코에서부터 사랑과 금전적 지원의 상실로 고통받은 미도리 그리고 정착감과 진중함의 상실로 끊임없이 배회하며 게임을 즐겨야만 하는 나가사와까지. 라캉이 그린 근본적 격리 속에서 불가능한 합일을 향해 손을 뻗는 인간의 운명을 하루키는 문장 사이마다 소복히 쌓인 단절들로써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서사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이해받지 못한 수많은 순간들, 마찬가지로 수많은 욕망과 그 투사체를 발견한다면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름 이전에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해프닝을 곱씹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이제는 상실되어 버린 예전의 이름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소설이 음미하는 인간의 주제를 고백했을지도 모르니까.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상실의 치명성에 영원히 시달려야만 하고, 그건 이 소설을 읽는 독자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라는 바로 그 주제를.


약간의 첨언

얼마 전에 고백했듯 최근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 삶에서 몇 번 없었던 영감의 순간들 중 가장 최근의 것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생각들에 따라 나는 그 제목을 《하얀 문(La Porte Blanche)》으로 정했고2제목을 불어로 병기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를 추억하기 위해서. 둘째, 이 소설의 또 다른 모티브이자 미학적 매듭 중 하나가 될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와 그의 작품에 대한 멋진 평론을 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만들어내는 이성(二聲) 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제 그 구상 단계로 진입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이 상태에 내가 처해 있었기 때문에 니체에 푹 절여져 있던 때 알맞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필연적인 우연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도 적절한 시점에 나에게 제시되어 버린 셈이 되었다. 〈고독〉과 〈영원회귀〉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 내가 깨달은 것들을 서술하려고 하는 입장에서 나는 그에 참고될 만한 소위 ‘선행 연구’들, 즉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것이 내 눈 앞에 나타나 준 것이다.

내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에서 〈고립감〉을 사물과 사건들의 배열로 그려내고 있는 구체적인 양상이다. 문체의 경우 객관적으로 말해서 카뮈의 《이방인》보다 못하긴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주인공과 동일하게 하나의 〈섬〉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므로.) 분위기의 구축 그리고 전달만큼은 주요하게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3장 말미에서 반딧불이를 매개로 하여 ‘나’의 무력감과 기댈 곳 찾기의 심정을 표현한 부분은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근 며칠 동안 오는 8일에 예고되어 있는 1차 독서 모임의 범위인 제5장까지 책을 읽어버리면서 소설 내부에 잘 조직되어 인간 정신의 드넓은 초원에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들과 그 효과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하루키의 방식은 결국 〈우물〉 속으로 빨려드는 소용돌이라는 일차적 소결에 도달하게 되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 기념비적인 참고작에 대해 내가 오는 8일 독서 모임에서 공개해버릴 위와 같은 총평을 쓴 것은 내가 처해버린 맥락상 당연한 귀결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작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계속한 끝에 이제는 뒤쪽에서 등장인물 몇몇이 어떻게 되지 않을 수 없겠다는 명료한 직감까지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다. 개강을 하루 앞둔 지금, 가장 흥미진진하면서도 그 표현의 섬세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텍스트를 읽게 된 것은 따라서 상당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내 모든 여정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긍정적 의미에서의 착각!) 속에서, 나는 올해가 가장 재미있는 해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그래서 《미키 17》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활할 수 있는 ‘미키 반스’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 (What it feels like to die?)” 라 묻는 것이다.
  • 2
    제목을 불어로 병기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를 추억하기 위해서. 둘째, 이 소설의 또 다른 모티브이자 미학적 매듭 중 하나가 될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와 그의 작품에 대한 멋진 평론을 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만들어내는 이성(二聲) 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