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장자의 반대이다

2024-11-15 0 By 커피사유

지금으로부터 대략 2주 전, 그러니까 중간고사 기간이 막 끝나가던 무렵 나는 이번 가을학기의 서두를 열었던 나의 철학적 의문, 즉 〈니체와 장자의 차이에 대한 의문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장자와 니체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지각은 모두 “무한한 변화 · 순환”으로 동일하지만, 그러한 세계를 개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행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내린 판단은 정반대인 듯 하다.

니체의 경우는 후기 사상인 〈영원회귀 · 운명애〉 사상이 대표하듯, 끊임없는 혼란 · 경쟁 즉 변화의 상태에서의 고통마저 긍정하는 것에 이른 반면, 장자의 경우는 반대로 인위에서 벗어난 무위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즉 변화의 상태를 인식해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에 이르고 있는 듯 하다.

즉, 니체와 장자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헤라클레이토스와 동일하지만, 그러한 세계에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모순과 충돌에 의한 고통에 대해 부여하는 질이 정반대이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두 사람의 형이상학적 견해는 동일하거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고통에 대한 긍정 / 부정의 질은 반대인가?”

이상의 질문에 대해 간단한 대답 중 하나는 장자의 경우는 전국 시대의 사상가로, 당시는 사회가 몹시 혼란하여 잘못 처신하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고통이 만연하였기에 그 ‘고통을 뽑아내야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니체의 경우는 염세주의, 즉 ‘니힐리즘’이 사상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즉 두 사상가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다르다는 것일테다.

그러나 나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이란 두 사람의 시대적 상황에 의한 차이가 아닌, 두 사람이 같은 형이상학적 인지에서 결론에 도달하는 궤적이 어떻게 다른지, 그 궤적이 달라지게 하는데 영향을 준 사상적 · 이론적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지, 두 사람의 인간에 대한 인식, 세계에 대한 인식이 추가로 어떻게 달랐기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는지이다.

〈동양철학의 이해〉 강좌의 대략 2주 앞으로 다가온 기말 보고서를 준비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오강남 교수의 《장자》 주석본을 거의 다 읽어가는 지금, 나는 이 질문에 몇 가지 오해가 섞여 있지만 동시에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포착했다는 직감을 다시 발견한다.

오해란 무슨 오해를 말하는가? 교수자의 해석을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덥석 믿었던 나는 도가가 고통을 뿌리뽑는 것, 고통의 총체적인 추방을 말하고 있는 사상이라는 하나의 해석에 안주할 뻔했다. 그러나 오강남 교수의 주석은 이와 대립된다.1여기서 대립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기서 대립차이의 발생으로 인하여 내가 암묵적으로 품었던 절대성이 파괴되었으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뒤에서 기술하겠지만, 바로 이것이 나의 해석에 의하면, 니체와 장자의 근본적이고 아주 중대한 차이점이다. 《장자》 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德充符)에 등장하는 〈무정(無情)〉과 〈유정(有情)〉의 이야기를 되짚어보자. 특히 다음의 대목이 중요하다.

22. 혜자가 물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서 어찌 정이 없을 수 있는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정이란 그런 것이 아닐세.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오강남, 《장자》, 현암사, 1999. p.257.

원문을 우리말로 옮길 때는 항상 주석가의 해석이 개입되기 때문에, 우리말 역문을 보고 원 의미를 짐작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장자가 뜻했던 바가 무엇이었던지와 무관히, 무정(無情)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대학에서 내 앞에서 강의한 교수자가 이 단어를 감정의 제거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 관하여 오강남 교수처럼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 표현 혹은 유사한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할 때 그 의미란 그가 논했듯, “감정을 넘어선 경지,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경지”에 대한 지향일 수도 있다. 즉,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트인 마음”, “어떤 경우에도 끄떡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부동심 · 평등심”, “외부 상황에 속을 태우지 않고 언제나 차분한 마음으로 정신적 자유를 구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해석과 대학 연단에 섰던 교수자의 해석에서는 근본적인 다음의 차이가 전제된다. 교수자의 해석에서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 일체가 부정적인 것, 절대적 평정을 얻기 위해 추방되어야 하는 것이 전제되므로 이 해석에 따른다면 《장자》는 인간 감정에 적대적이다. 그러나 오강남 교수의 주석에 따른다면 《장자》가 경계한 것은 평정을 흔들릴 정도로 과도한 감정, 혹은 이러한 감정에 흔들리는 것이지, 여기서 감정은 나의 온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공존할 수 없는 적으로 선언되지는 않고 적어도 존중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오해의 출발점이 하나의 해석만을 채택한 것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질문의 가치는 유지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장자》는 고통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냐고? 만약 무정(無情)을 오강남 교수처럼 해석한다는 후자의 해석을 채택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문이 문제가 됨을 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 우선 전자의 문장을 보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장자》는 이는 곧 좌망(座忘)이라던가 오상아(吾喪我), 또는 심재(心裁)를 하지 못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장자》에서는 “도(道)라는 아주 큰 만물 생성의 근본 원리이자 만물의 어미, 즉 만물 존재의 근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 즉 동일한 것인데, 인간의 도덕적 판단 · 인간이 수립하고 설정하는 가치 · 가르침 · 앎의 추구 · 시비 가르기는 이 큰 도의 관점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로 별 ‘의미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것을 따르면 거기에 묶여 마음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므로 이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전반 사상의 주축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외물에 사로잡히는 일로부터의 해방의 상태를 말한다. 도가는 삶의 고통이나 시비로 인한 혼란이 도(道), 즉 모든 것은 다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편견과 고집으로 이를 나누고 이것에 사로잡혀 보는 것에서 벌어진다고 보았다. 특히 제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에서 이러한 사상이 경물중생(輕物重生)의 논리와 동반되어 나타나는데, 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사료되는 이 장에서는 주로 처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만의 고집과 신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흘러가는대로 살면서도 하지 않는 듯 은근 슬쩍 하여 권력자와의 갈등을 피하면서도 그들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대목도 등장한다. 한편, 방금 언급했던 무정(無情)의 부분에서도 장자가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神)을 덭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는 점도 상기할 만하다. 외물에 묶여 스스로의 생기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생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분명히 니체가 말하는 생기 혹은 건강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생기란 평정의 상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상태를 보존한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힘 즉 차이, 주도적인 가치평가를 말하는 니체의 건강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니체와 《장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에 근접하고 있으며, 동시에 처음의 질문에서 가장 중대한 나의 착오에 대해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장 중대한 착오란 무엇인가? 그것은 니체와 《장자》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지각이 동일하다라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두 사상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지각, 그리하여 그들이 긍정하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장자》에서는 어떠하단 말인가? 《장자》는 세계를 하나로 지각한다. 다시, 모든 것은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만물의 원리이자 근본인 도(道)의 관점에서 볼 때 구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가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근거 위에서 ‘나 자신을 잊기’, ‘외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말한다. 어차피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구태여 시비를 가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즉 모든 것이 동일한 단 하나의 세계를, 인간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저 초월적 세계의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니체의 형이상학적 견해는 그렇지 않다. 니체가 인정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르고 서로 다른 것들이 병존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세계, 인간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으며 인간이 시비를 가리고 판단을 행하며 스스로의 가치 평가를 창출하는 실제 감각적 세계의 실체이다. 니체는 피안, 즉 육체의 세계와 분리된,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고 인간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모두 생(生)의 재단이다. 그러므로 니체가 보기에 《장자》는 사실상 그가 그렇게 소리높여 파괴하고자 했던 금욕주의적 이상 내지는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동일한 부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장자》에서는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 인간이 판단하고 지각하는 세계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지며, 나아가 인간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지고, 육체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지며, 오직 그 생의 부정으로서의 초월이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전형적인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해당할 것이며, 그는 이것이야말로 무의미한 고통을 설명하기 위한, 혹은 그 무의미한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에 불과하며 유약함의 증거라고 말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내가 처음에 도가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했던 지난 여름의 계기: 〈Nine Sols · 도가(道家) · 니체〉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는 대목이었다. 니체와 장자의 형이상학적 견해는 둘과 하나라는 대립 구도에서 정확히 차이가 드러나는 셈이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되돌아보기로 할까?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확연한 선역과 악역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통상 악에 완전히 잠식된 세계에서 선에 해당하는 주인공이 세계를 구원한다느니 아니면 악의 위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 협력하느니 하는 전형적인 서사로 가득찬 근 · 현대 게임의 세계에서 종종 클리셰를 깨는 게임들이 인디 시장 등을 통해 시장에 진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크게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게임들이 클리셰를 비틀기 위하여 사실은 ‘주인공이 악역이었다’라던가 ‘상대도 좋은 사람이었다’던가와 같은 인물적 설정을 추가로 도입하는데 주목하는데 반하여, 이 게임은 게임의 연출 전체가 선과 악이 혼합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사유, 〈Nine Sols · 도가(道家) · 니체〉

다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제 《장자》를 통해 도란 무엇이며, 이 도(道)를 통해 이 아주 오래 전의 중국 철학자들이 지향하려 했던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 나는 이제 선언할 수 있다. 그것은 피안으로 물러나기이다. 모든 것이 차이와 다양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시비를 가리는 것이 무용하다고 선언할 수 있으려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절대성을 상정하여 이것에 모든 것을 귀의해야 하며, 이것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장자》 등의 도가가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니체의 정확한 반대이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중요한 직감은 다 얻었고, 주장하고자 하는 바도 대략 정리했다. 남은 것은 이제 선행 연구와 근거가 될 원문들을 정리하여, 나의 생각을 저 교수자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일테다. 니체와 《장자》는 물론 둘 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니체는 차이로 가득한 육체의 세계를 긍정했기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속성에 반하는 유일성을 경계하여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한 반면, 《장자》는 차이로 가득한 육체의 세계가 ‘모두 변화한다는 동일성’에 주목하여, 그 너머의 절대적 실체를 상정했고 바로 이 하나의 세계, 현실과 한 단계 떨어진 형이상학적 세계에 근거하여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이것이 니체와 《장자》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사상이라고 보는 나 자신의 견해에 대한 요약이 될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여기서 대립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기서 대립차이의 발생으로 인하여 내가 암묵적으로 품었던 절대성이 파괴되었으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뒤에서 기술하겠지만, 바로 이것이 나의 해석에 의하면, 니체와 장자의 근본적이고 아주 중대한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