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 음악의 예술성 논고
이하의 내용은 2025학년도 2학기, 청강으로 듣고 있는 서울대학교 《음악론입문》강좌의 〈묘사하는 음악〉에 대한 학생 발표에서 제시된 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토의 이전에 기록해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I. 묘사 음악은 단순히 외부 세계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예술적 창조인가?
- 묘사 음악은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 세계의 소리를 모방하기도 하지만 (비발디 《사계》의 새소리,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이 경우는 실제 대포 · 종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한할 것이다] 등) 표제 대상이 되는 소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이를테면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죽은 자들의 해골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악마 및 유령과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묘사하나, 단순히 해골들의 움직임에 따라 뼈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실로폰으로 재현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선율과 리듬의 맥락 속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연상될 수 있도록’ 재배치한다. 만약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잔디를 밟는 소리만을 악기로 재현하는 것으로 이 작품이 끝났다면 오늘날까지 기억되었을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 나아가, 묘사 음악이 묘사하는 대상은 ‘외부 세계의 소리’만은 아니다. 묘사 음악은 사물의 거동과 생김새를 묘사하기도 하며 (베토벤의 《전원》 제4악장은 천둥과 바람 소리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음의 강세와 높낮이를 통해 적란운대가 접근하는 모습과 멀어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나아가서는 아예 오감으로 관찰할 수 있는 외부 대상에서 나아가 장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전반적인 분위기, 내면의 갈등이나 감정 등을 묘사하기도 한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제4악장은 단두대로 끌려가는 죄수 앞에서 울려퍼지는 처형식의 팡파레, 떨어져나간 목이 굴러가는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의 죄수의 불안한 심정, 달아오른 구경꾼들의 분위기까지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 이처럼 묘사 음악은 외부 세계의 소리만이 아닌 외형 · 분위기, 특정 인물의 내면 및 감정 등을 표현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외부 세계의 소리를 대상으로 삼는 경우라 하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장면에 따라 화성, 리듬, 빠르기, 악기 음색 등의 장치를 이용해 ‘또다른 맥락’에서 소리를 재현한다. 고로 ‘외부 세계의 소리를 모방하는 음악’이 ‘묘사 음악’의 한 종류는 될 수 있겠지만 ‘묘사 음악’이 ‘외부 세계의 소리를 모방하는 음악’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묘사하는 음악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새로운 맥락 속에 세워내는 예술적 창조 혹은 재해석의 작업 결과물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훨씬 정확해 보인다.
II. 오늘날 영화 · 게임 속 묘사 음악이 발달한 시대에, 절대 음악의 가치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 우선 오늘날 대중 음악은 거의 모두가 ‘묘사 음악’이라는 점은 이의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K-pop 음악은 대부분 가사에 맞는 분위기를 전달 · 묘사하기 위한 악곡 구조나 조성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영화 · 게임 속의 음악도 바로크 시대를 다루지 않는 이상은 표현하거나 묘사하고자 하는 특정한 모습 혹은 감정선이 있는 것 같다.
- 그러나 《젤다의 전설》의 〈카시와의 테마〉로부터 주인공 링크가 하이랄 대륙을 뛰어 돌아다니는 모습을(애초에 말미부에 《젤다의 전설》의 주제가 흘러나온다), 《여인의 향기》에 삽입된 〈Por Una Cabeza〉에서 두 남녀가 아슬아슬한 스텝을 밟아가며 탱고를 추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아무리 대세가 되었더라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등으로 대표되는 절대 음악의 가치는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이를테면 바흐의 《Ricercar a 6》나 《Canon a 2 per tonos》(이쪽은 아예 ‘끊임없이 상승하는 카논’으로 굉장히 유명하다)는 묘사하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지만, 그 선율의 전개만으로도 충분히 절제와 조화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음악을 듣고 특정한 장면이나 감정선을 떠올리기보다는 말 그대로 선율과 리듬의 전개를 따라가는 별도의 감상하는 맛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감상 경험의 전율이 흔치 않은 오늘날 오히려 절대 음악의 가치는 그 희소성만큼이나 예전보다 더욱 상승했다고 생각한다.
III. 인공지능이 만든 묘사 음악도 예술로 인정할 수 있을까?
- 우선 이 질문에서 사용하는 ‘예술’의 의미를 ‘좋은 예술’로 구체화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전통적인 Fine Arts에는 이미 ‘음악’이 포함되고 있으며 음악이 예술이라는 사실은 그 음악을 누가 작곡했던지와 무관하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의 여부에 따른 예술성의 성립 여부를 묻고 있는 이 질문의 경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예술의 가치이지 예술인지의 여부가 아니다.
-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선행 의문에 대답해야 한다. 개개인의 미적 취향이 다르므로 좋은 예술을 어떻게 정의내릴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술은 본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조건으로 포착하거나 정의내릴 수는 없고 가족유사성에 근거하여 ‘예술이다/아니다’라는 표현만이 가능하다고 볼 뿐인 예술정의불가론(mainly represented by M. Weitz)을 지지하며, ‘좋은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논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이 ‘좋은 예술이다’고 이야기하는데는 문제의 대상이 이미 우리가 ‘좋은 예술’이라는 표현을 결부시키는데 동의한 대상들과 유사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면, 인공지능이 만든 묘사 음악도 충분히 ‘좋은 예술’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의 적절한 배치와 구조적 표현을 통해 특정한 감정선 혹은 미(美)를 감상자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음악은 성공적이라거나 좋다고 표현하는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감상자들이 ‘좋은 음악’의 충분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음악적 여운의 전달’을 인공지능이 작곡한 음악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상, 음악이 인공지능에 의해 작곡되었다는 것이 흠결이 될지언정 보편적 의미에서의 ‘좋은 예술’과 가족유사성을 심각할 정도로 결여시키지는 않는 것 같다.
- 주요한 개인적 실례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예전에 베토벤의 음악 스타일을 학습시킨 인공지능을 이용해 베토벤이 사후에 남긴 미완성 원고들을 완성한 작품들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물론 프로듀서와 연주 · 작곡가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긴 했지만… / Beethoven X The AI Project) 인공지능이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예술적 가치가 퇴색된다고 생각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만약 누군가가 이 음악들과 베토벤이 실제로 작곡한 음악을 뒤섞어서 들려주는 일종의 ‘음악 튜링 테스트’를 나에게 감행한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이 진짜 베토벤이고 어느 쪽이 인공지능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 나아가 ‘좋은 예술’인지의 여부가 작곡가 혹은 창작자가 어떤 자인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모나리자》가 만약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아니라 그냥 무명의 학생이 그린 작품이었다고 해서, 그 예술성이 부정된다고 결론내리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이니까. 창작자가 누구인지의 여부가 작품의 예술성의 척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거나 없다면, 그 창작자가 기계인지 인간인지의 여부도 마찬가지 아닐까?